실시간 뉴스
UPDATED. 2018-11-21 20:40 (수)
조선통치비화(27)/ 교묘한 방법으로 지배의 기틀을 공고히 쌓아가다
조선통치비화(27)/ 교묘한 방법으로 지배의 기틀을 공고히 쌓아가다
  • 박장미
  • 승인 2018.07.29 2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의친왕(義親王) 이강(사진)은 고종의 다섯째 아들로 배일사상이 강해 당시 조선 황족 중에서 항일 투쟁에 가장 적극적인 관심을 가진 인물이다. 일제의 감시를 피해 임시정부로 탈출해 상해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려 했으나 대대적인 체포 작전을 전개한 일경에 발각돼 다시 국내로 송환됐다. 일제의 여러 회유책에도 끝까지 배일정신을 지켰다. 출처 : 동양일보 '이땅의 푸른 깃발'(http://www.dynews.co.kr)

(동양일보 박장미 기자) ■폭탄범인과 학생소요사건

●배재학교의 만세 소요(2)

▷지바 “소위 어전회의에 대한 양상은 나중에 들었습니다만 정무총감은 이를 치안을 문란케 하는 범죄라 판단하고 소요가 일어난 이상 학교 밖이든, 학교 안이든 반드시 취급을 따로 해야 할 필요가 없으니까 필요하다면 경찰력을 써서 이를 처단해도 아무 지장이 없을 것이라는 의견을 밝히셨습니다. 이 취지를 시라가미군을 통해 통지해 주었으므로 알게 됐습니다. 학무국 경무국이 이 일의 처리를 피차 미루고 있는 중, 학무국에서는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은 사정으로 말이 통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은 손을 뺐고, 경찰에서는 하는 대로 맡기기로 했습니다. 때문에 저녁 무렵 다시 서대문 서장을 중심으로 하여 교장과 담판을 했고, 주모자의 인도를 요구했는데 역시 교장이 이를 거절했기 때문에 그러면 사법권이 직접 이를 취조할 수 있게 한다는 승낙만을 교장으로부터 일단 받은 후 밤 12시까지 2백 수 십 명의 학생을 전부 하나하나 조사하게 됐습니다. 밤 12시가 가까웠다고 생각되는데 오카모토 고등과장이 나에게 와서 12시가 넘어서 취조하는 것은 형편상 좋지 않으니 일단 12시로 취조를 일단락 짓고 취조한 결과가 매우 복잡하지만 우선 경찰이 주모자로 심증을 굳히는 십 수 명만을 경무 총감부로 구인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12시까지 조사를 끝내도록 지시했고 서대문서는 십 수 명의 주모자로 인정되는 자를 전부 구금한 후 나머지 학생들은 자택으로 돌려보냈습니다. 이 때 급박한 상황을 듣고 몰려온 학부모들이 수백 명 학교 문 앞에 집합해 있었는데 십 수 명의 주모자가 경찰에 구인 되는 것을 보고도 아펜셀라 교장을 비롯한 교사들이 전혀 수수방관하는 상황을 직접 목격하게 된 것입니다. 이를 보고 부모들은 지금까지는 외국인 교장 하에 있는 학생들이 바로 눈앞에서 경찰권이 행사되어 붙잡혀 가도록 방관하는 예가 없었는데, 지나치게 의지를 상실한 것이 아닌가 하는 감상을 이구동성으로 말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나는 조선의 치안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첫째로는 외국보다도 일본통치의 힘이 더 강하다는 것을 조선인들에게 자각시킬 필요가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이 사건은 더욱이 특기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이 취조 결과에 의해 각 처분을 하는 것과도 관계가 있지만, 교장의 책임에 대해서는 총독부에서 신중한 심의를 한 결과 경기도 지사의 명의로 교장 아펜젤러 씨 직무를 해제함으로써, 그 책임을 명백히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더욱이 이 사건에 대해서는 총독에게 외국 선교사들이 직접 개입하여 여러 가지 경위가 있었다는 말을 들었는데, 이에 대해서는 아마 미즈노 각하께서 말씀해 주실 것이라 생각되며, 일단 경찰로서 처리한 과정만을 말씀드렸습니다.”



●배제(培材)학교장의 해직문제

▷미즈노 “지금 말씀하신 배재학당의 불온 사건 처리방안에 대해서는 당초 학무국과 경찰 사이에 다소 의견이 달랐던 것 같습니다. 결국 저는 불온한 행동이 발생했을 경우에 학교 당국자가 자진하여 이를 처리할 수 없다면 경찰이 관여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때문에 학생이 불온한 행동을 한 경우에는 이것이 학교 내에서 일어났다 해도 경찰이 학교 내에 들어가 수사해도 별 지장이 없을 것이라고 결정했던 것입니다. 과거 조선에서는 외국 선교사가 경영하고 있는 학교는 마치 치외법권 하에 있는 것처럼 인식되어 있어 일단 학교 내로 들어가기만 하면 경찰도 관헌도 도저히 손을 쓸 수가 없다고 생각하여 조선인은 관헌보다도 오히려 선교사를 믿고 의지하는 경향이 있었던 것입니다. 금번 사건에서는 아무리 외국 선교사가 경영하는 학교라 하더라도 조금이라도 치안을 문란케 했다면 경찰이 당연히 여기에 관여할 수 있다는 실례를 보여준 것이었습니다. 때문에 조선인들은 과거에는 선교사나 외국인을 방패로 하여 만사를 의뢰해 왔으나, 아번 사건으로 이 신뢰가 배신감으로 바뀌어 외국선교사도 이젠 의지할 수가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됐던 것입니다. 따라서 이 사건의 결과 총독부의 위엄을 좀 더 높이게 됐고, 선교사도 외국인도 잘못된 행위를 저지르면, 총독부는 곧 이를 처분할 힘이 있는 곳이라는 느낌을 조선인에게 갖도록 함으로써 조선 통치 상 매우 좋은 효과를 가져 왔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 관련하여 배재학당의 교장인 아펜젤러의 처분문제에 대해 큰 논란이 있었습니다. 이 같은 사건이 야기되기까지는 누가 뭐라 해도 교장의 책임이 큰 것입니다. 교장이 학생들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 사건이 일어난 것이므로 교장에 대한 처분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고, 이로 인해 교장의 퇴직 명령을 내렸던 것인데, 이에 대해 문제가 발생했던 것입니다. 당시 총독은 동경에 출장 중이었는데, 이 사건이 발생하자마자 웰치 감독이 매우 분개하여 아펜젤러 교장을 해직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아펜셀라는 결코 융통성 없는 불합리한 분이 아니니까 이러한 분을 해직한다면, 앞으로 선교사 측과 총독부 측 사이에 감정상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오므로 아펜젤러의 해직을 꼭 취소해 주었으면 한다는 의견을 총독에게 말씀드렸던 것입니다. 총독은 이 의견을 지당하다고 생각하시어, 아펜젤러의 해직을 취소하고 원래대로 교장 직에 있게 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라는 긴 전보를 학무국장 앞으로 보내 왔습니다.

시바다 학무국장이 서둘러 내게 와서 총독께서 이러한 전보를 보내왔는데 어떻게 처리하는 것이 좋을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경기도 지사가 아펜젤러를 해직하게 되기까지는 이미 학무국도 양해했고, 또 나 자신도 여기에 동의했던 처지였으므로 지금 새삼스럽게 그 처분을 취소할 수는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앞으로 총독부가 학교를 감독하는데도 영향을 미칠 것이므로 해직 처분 문제는 취소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시바다 국장이 밝혔습니다. 나 자신도 시바다 국장의 의견이 지당하다고 생각됐으므로 내 편에서도 상경 중인 총독 앞으로 아펜셀라의 해직은 정당한 조치입니다. 지금 새삼스럽게 이를 취소할 수는 없었습니다. 이 처분을 취소한다면, 장래에는 더 큰 악례를 낳게 되어 조선 통치 상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이므로 윌치씨의 요구를 거절하는 것이 타당하실 것이라는 의미의 전보를 발송했습니다. 그러나 다시 총독으로부터 아펜젤러 교장의 해직은 배재학당 쪽에서 보아도 곤란한 문제이고, 또 다른 선교사들 측에서 보아도 나쁜 영향을 미칠 우려가 있으니, 꼭 이를 취소해 주었으면 한다는 내용과 웰치 씨가 총독에게 보낸 편지를 동봉하여 보내 왔습니다. 그러나 이는 누가 뭐라 해도 응할 수가 없는 요구였고, 단 아펜젤러가 자기의 잘못을 깨닫고 다시는 이 같은 일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을 한 후라면, 후일 이를 재고할 여지가 있으나 지금 당장 해직을 취소할 수는 없습니다. 지금은 단연코 이 처분을 수행하지 않을 수 없다는 강경한 의견을 다시 총독에게 보냈습니다. 그러자 총독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포기하셨는지 웰치 씨에게 그대로 이 사실을 전해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웰치 씨가 다시 내게 편지를 보내와 아펜젤러의 처분 문제에 대해 다시 한 번 재고해 주었으면 한다는 내용을 강조했지만, 본인은 이를 단연히 거절했습니다. 그리하여 아펜젤러는 대리 교장을 두고, 그 대리 교장에게 학교 일을 맡긴 후, 그 자신은 은퇴하는 형식을 취하여 은퇴했습니다. 그 후 분명히 1년이 경과된 후라고 생각되는데 아펜젤러는 시바다 학무국장을 면회하러 와서 자신의 행동이 부당했었다고 밝히고, 앞으로는 총독부의 시정 의지를 마음에 새겨 교육에 종사하겠다고 말해왔기 때문에 그 의지에 따라 1년 후, 아펜젤러를 복직시켰습니다.

이 사건의 부산물로 총독부의 선교사에 대한 위엄이 좀 더 확실해졌을 뿐만 아니라, 조선인에 대한 위신도 증대됐습니다. 과거 조선인은 외국인과 관계되는 일이라면, 총독부가 전혀 손도 쓸 수 없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 사건 결과 비록 외국인이 관계하고 있는 일이라 하더라도, 또 선교사가 행한 일이라고 하더라도 이것이 불합리하다면 총독부는 이를 거침없이 처분한다는 인상을 그들에게 심어주었기 때문에 이제는 더 이상 선교사에게 의존할 힘이 없다는 것을 실감했고, 이는 총독정치 상 매우 좋은 효과를 거두었다고 생각합니다.”



■이강공(李堈公) 탈출사건의 진상

●조선 귀족의 동요

▷야마가미 “치안 유지에 관련되는 문제로 당시 내외에서는 엄청난 쇼크를 주었던 이강(李堈)공 탈출사건에 대해 지장이 없는 범위 내에서 그 진상을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지바 “1919년 9월 이래 불온한 분위기는 10월 1일에 있었던 폐점운동의 진압으로 다소 완화됐, 이어서 10월 31일에 있었던 천장절(天長節 대정(大正) 천황의 생일)의 축하 기분과 더불어 취체방면의 수배는 한층 더 완화됐습니다. 그런데 11월에 접어들자 귀족들 사이에 동요가 일어나고 있다는 정보가 자주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남작 김가진(金嘉鎭)이 이종욱(李鍾郁)에 의해 상하이(上海)로 유괴됐다는 확실한 정보가 입수됐기 때문에 귀족저택에 대한 특별한 경계가 필요하다고 생각되어 수배망을 좁혔습니다. 이러한 정세에 오랫동안 대치해야 할 경찰의 경위 담당자들이 긴장하고 있는 듯 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에 11월 10일에는 각 귀족 저택에 나가 있는 경위 순사를 반반씩 내 집무실로 소집하여 시국의 중대함을 설명했습니다. 그 후 귀족들의 경호에 만의 하나라도 부주의가 있어서는 안 될 것이라고 엄중히 훈시를 했습니다. 바로 그날 오전 11시 경이었다고 기억되는데, 제 3부 경위반의 주임이 훈시를 한참하고 있는 중에 내게 다가와서 귀속 말로 말하기를 어제 밤 이강공 전하가 공저를 탈출한 혐의가 있다고 보고해 왔습니다. 나는 드디어 중대사가 발생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훈시를 끝낸 후, 시급히 경위 순사를 각 귀족 저택 앞에 배치하고, 즉시 이강공 전하의 주변 상황을 조사하는 일에 착수하도록 지시했습니다.



●이강공(李堈公)의 탈출

▷지바 “그래서 제일 먼저 이강공 전하가 탈출하셨다는 전보의 경위 여부를 확인했던 바, 전날 밤 10시가 조금 지나 이강공 전하가 거주하고 계시는 저택의 후문 경계를 맡았던 츠시(土師)라는 형사가 한밤중에 이강공 전하의 저택 뒷문 부근에서 키가 큰 두 사람의 모습을 희미하게 확인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때문에 수상하다고 생각되어 가까이 접근하여 밤눈으로 확인한 결과, 아무래도 주의가 집중되고 있는 전하의 모습과 같다고 생각됐기 때문에 두 사람의 뒤를 밟았는데, 바로 명월관 지점의 문 부근에서 그 모습을 놓쳐 버렸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실을 즉시 이강공의 저택 경사순사에게 알린 뒤 경계를 부탁했고, 그 후 제 3부의 숙직에게 보고했다는 정보 내용이었습니다. 저는 먼저 그것이 정말 전하인지 아닌지를 확인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믿고, 즉시 경위과에 있는 자를 이강공 저택에 출두시켜 구로가키테이죠(黑埼定三)라는 이왕직(李王職) 사무관에게 면회시켜 전하가 계시는지 안 계시는지를 확인시켰습니다. 그런데 오후 3시 경에 제게 그 답변이 왔는데, 구로자키 사무관의 답변에 의하면, 전하께서는 분명히 저택에 계시다는 회답이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만의 하나라도 그 사무관의 조사에 잘못이 있다면, 이강공 전하는 이미 상해로 탈출을 기도했을 것이고, 이 결과가 조선 통치에 미칠 영향은 너무나도 막중하다고 생각됐으므로 사무관에게 전화를 걸어 저택에 있으시다는 것을 확실히 증명할 수 있는 근거가 어디에 있는지를 확인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비(妃) 전하를 알현하여 전하께서 계시는지 안 계시는지를 여쭈었다는 것인데, 비 전하가 전하께서는 아무 탈 없이 잘 계시다고 대답하셨다는 것이 하나의 근거이고, 또한 부재(不在)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서류에 결재해 달라고 내시를 들여보냈는데, 전하께서 결재는 나중에 해도 좋지 않겠느냐는 말씀을 하셨다는 것이 두 번째의 근거라는 것이었습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충청대로 103 (율량동)
  • 대표전화 : 043)218-7117
  • 팩스 : 043)218-7447,7557
  • 창간 : 1991-12-29
  • 제보전화 : 043)218-7227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원중
  • 명칭 : 동양일보
  • 제호 : 동양일보 '이땅의 푸른 깃발'
  • 등록번호 : 충북 가 00003
  • 등록일 : 1991-12-27
  • 발행일 : 1991-12-27
  • 회장 : 조철호
  • 발행/인쇄인 : 유영선
  • 편집인 겸 편집국장 : 김영이
  • 동양일보 '이땅의 푸른 깃발'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18 동양일보 '이땅의 푸른 깃발'. All rights reserved. mail to dynews@dynews.co.kr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