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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길에 서서 / 유영선이 만난 사람 - 박영희 재독 작곡가
이 길에 서서 / 유영선이 만난 사람 - 박영희 재독 작곡가
  • 동양일보
  • 승인 2018.08.28 2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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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은 ‘숨소리’… 작곡은 사람들에 감동주는 ‘소리’를 찾는 일”
윤이상과 ‘쌍벽’ 음악계 거장… 독일서 개최 ‘박영희작곡상’엔 국악기 사용 ‘의무 조항’
유럽에서 더 이름 떨친 청주 출신 예술가… 통합청주시 ‘1호 명예시민증’ 받기도
사진 / 유영선

박영희. 그의 이름을 듣고 한 번에 그를 아는 이는 많지 않다.

박 파안 영희 (Younghi Pagh-Paan)라고 하면 더욱 낯설어 한다. 그런데 여성 작곡가 최초로 스위스 보스빌 세계 작곡제와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유네스코 작곡 콩쿠르에서 1등을 휩쓸고, 현존 작곡가들의 꿈의 무대라 할 수 있는 도나우에싱엔 현대음악제가 초청한 최초의 여성 작곡가. 독일어권에서 여성 최초로 음악대학의 정교수가 되었고, 유럽에서는 이미 최고의 작곡가로 정평을 얻고 있으며, ‘윤이상과 쌍벽을 이루는 작곡가라고 하면 그제서 !’하고 감탄을 한다. 그리고 그가 받은 수많은 상들과 창작곡을 나열하면 모두 입을 다물지 못한다.

박영희 작곡가(73).

그의 이름 앞에 어마어마한이라는 수식어를 붙일 수 있는 것은 그가 이루어낸 업적과 창작한 곡들이 실로 어마어마(엄청나고 굉장)하기때문이다. 그렇게 한국보다 유럽에서 더 유명한 박영희 작곡가가 잠시 청주를 찾았다. 청주는 그가 태어나고 자란 도시, 초중고를 이곳서 다녔다. 통합 청주시민의 노래를 작곡했고(2014.7) 통합 청주시 1호 명예시민증을 받았다. 음악관련 활동을 하는 몇 명과 함께 그를 만났다.

 

-선생님, 건강은 괜찮으신지요.

디스크로 좀 좋지 않아요. 그래서 의사인 조카에게 치료를 받고자 한국에 들어왔는데, 조카 말이 잘 먹고 열심히 운동을 하라네요. 오늘 맛있는 음식 제가 다 먹을 거예요.”(웃음)

-오랜만에 청주에 오셨는데, 청주에 누가 계신지요.

우리 형제가 모두 9남매였는데 모두 청주를 떠나고 없어요. 성장과정에서 후에 작곡가가 될 수 있도록 많은 지원을 해주신 둘째 언니도 청주를 떠나 서울에서 사셨는데 3년 전(2015) 세상을 뜨셨어요. 저는 언니를 항상 생각하며 그리워하며 살고 있어요.”

그가 말하는 언니는 청주여고 상담교사를 지낸 박영숙 선생님이다. 60년대 후반 청주여고를 다닌 여학생들이라면 모두가 기억할 정도로 학생들에게 자상한 언니처럼 멘토 노릇을 해준 분이다.

언니가 없었으면 작곡과로 진학을 하지 못했을 거예요. 10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경제적인 어려움이 닥치자 어머니는 제가 교대를 가기를 원하셨죠. 그런데 작은 언니께서 네가 가고 싶은데로 결정하라고 지원을 해주셔서 서울대 작곡과로 진학한 것이 오늘의 제가 있게 된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습니다.”

-선생님을 그리움의 작곡가라고들 합니다. 오랜 외국생활 중에도 고향인 청주를 잊지 않으셨다고 하셨는데요,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제가 살던 곳은 남문로였어요. 어릴 때부터 라디오를 통해서 음악듣기를 좋아했지요. 저를 음악의 세계로 이끌어 준 분은 아버지였습니다. 아버지는 시를 쓰시고, 국악을 좋아하셔서 집에서 늘 퉁소를 부셨어요. 집앞 길에 앉아 해금을 연주하던 어느 아저씨 기억도 나고, 여섯 살 때인가 아버지를 따라 무심천변 장터에 가서 판소리를 들었던 기억도 납니다. 그런데 제 나이 불과 10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어린 제겐 감당할 수 없는 큰 슬픔이었지요. 아버지께서 저녁식사를 하실 때 제가 노래를 부르곤 하였는데 저는 노래 부를 대상을 잃어버렸어요.”

-어린 나이에 가족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제가 어릴 때부터 자존감이랄까 그런 독한 데가 있었어요. 친구 몇이 저를 위로한다고 찾아왔었는데 어린 마음에도 친구들 앞에서 울면 안된다고 생각했나봐요. 눈물 한방울 보이지 않고 나는 괜찮으니 가라고 그들을 돌려보냈죠. 사범학교에 다니던 언니는 제게 피아노를 배우도록 해줬어요. 그렇지만 사춘기시절은 우울했어요. 삶에 대한 회의도 있었고, 인생이 무엇인가 고민을 했어요. 12살짜리가 일요일마다 용화사를 찾아가 불교공부를 시작했어요. 고교졸업때까지, 법명을 받을 시점까지 다녔으니 꽤 열심히 다닌 셈이죠. 그러나 법명을 받지는 않았습니다.”

-종교를 갖고 계신가요.

“우리 식구들은 1960년대부터 천주교 신자이고 저는 1974년 봄 서울 수유리 성당에서 영세를 받았어요. 행복도, 사랑도, 삶과 죽음과의 관계도 모두 그 안에 맡겼습니다.”

-젊은 나이에 혼자서 낯선 곳으로 떠나면서 두려움이 없으셨나요.

대학 진학을 하면서 처음 집을 떠났을 땐 외로움을 공부로 극복했어요. 어머니께서 걱정하셨던 경제적인 문제도 조금 해결되었어요. 청주에서 장학금을 받았고 서울대에서도 조금 받았어요. 대학원을 마치고 1974년 독일학술교류재단 장학생으로 선발돼 독일로 떠날 때 어머니가 말씀하셨어요. ‘영희야, 하고 싶은 공부 많이 하고 네가 돌아오고 싶을 때 오너라. 어머니 부양해야 한다고 나를 이유로 대지 말아라. 네 공부가 우선이다.’ 그때 어머니가 얼마나 저를 믿고 계신지 알았죠. 힘들 때마다 어머니 말씀을 생각했어요. 어머니와 언니의 사랑이 저를 두려움에서 해방시켰고, 저를 강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독일로 날아가 프라이부르크 국립 음악 대학교에서 작곡, 전통음악 이론을 전공하며 두 학과의 디플롬을 동시에 받고 졸업했다. 유학 학창시절에 그는 이미 유럽 현대 음악학계로부터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선생님의 이름 앞엔 여성최초라는 수식어가 많이 붙는데요, 도나우에싱엔 현대음악제 작곡 위촉초연, 독일어권 음악대학에서 여성 최초로 작곡과 정교수가 되신 것은 대단한 일이죠.

유럽에서는 여성이든 남성이든 음악대학 정교수가 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에요. 독일 스위스 등 독일어권에 음악대학이 25개가 있는데, 교수가 되려면 시험을 봐야 합니다. 1994년 내가 시험을 거쳐 브레멘 국립예술대학교 교수로 선임되자 화제가 되긴 했어요. 하긴 지금도 일부 남성 교수나 작곡가들 사이에는 여성을 폄하하는 시각들이 있는데 그 옛날엔 더 그랬겠지요. 그래도 주임교수를 거쳐 부총장까지 지내고 은퇴를 했으니 첫 여성교수로서 길을 잘 낸 셈이라고나 할까요.”

-선생님의 음악세계에 대해 여쭙고 싶습니다. 선생님은 그동안 사회참여의 곡부터, 인간 본연의 그리움, 모성, () 등 감수성을 그린 곡, 그리고 명상음악과 영성을 바탕으로 한 종교음악까지 다양한 장르를 표현해 오셨는데요.

음악은 듣는 이들에게 위로와 감동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젊은 시절엔 제 내면에 저항의식이 강했던 것 같아요. 1980년 광주 민주화운동에서 영감을 받아 소리를 썼고, 그 곡을 도나우에싱엔에서 발표했지요. 그 뒤 반나치 저항조직인 하얀 장미 단원들의 격문과 편지, 최후 변론 등을 봉화라는 곡으로 표현했어요. 그리고 제 가슴 속에 영원한 고향과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등을 곡으로 쓰기도 했고, 나이가 들면서 종교음악 영성에 온 힘을 쏟고 있어요.어느 곡이든 제 음악의 본류는 인간의 가치에 대한 소중함, 자유와 소통하고자 하는 것에 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 모든 것을 관통하는 것이 한국문화의 뿌리는 아닌지요. 창작하신 곡의 제목에 한글이 많은 것을 보면.

중 고교를 다닐 땐 영어를 배웠지요. 독일 와서는 독일어를 써야했죠. 그런데 음악 이론과 악보 공부를 하려니까 이탈리아어와 프랑스어도 필요한 거예요. 이렇게 몇 개 나라의 언어를 배우면서 나는 누구인가? 내 언어는 무엇인가?’ 생각하면서 우리 언어가 중요해졌어요. 그래서 큰 한글 사전을 하나 샀지요. 사전을 보면서 한글이 정말 아름다운 언어라는 걸 다시 확인했어요. 그래서 대부분의 곡에 한글로 제목을 달아 왔어요.”

-‘소리’, ‘마디’, ‘’, ‘고운 님’, ‘만남’, ‘마음’, ‘타령’, ‘지신굿’, ‘빛의 열매등 제목만 들어도 정이 갑니다.

한국어와 한국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컸어요. 공부하면 할수록 우리 것이 얼마나 아름답고 소중한지 새삼 느끼게 되었지요. 그래서 저는 내 곡을 듣는 이들이 어떻게든 한 번은 한글을 만나고, 한국어를 듣게 하려고 했어요.”

2016년 그의 이름을 붙인 2개의 작곡상이 제정되었다. 하나는 주독 한국문화원이 제정한 국제박영희작곡상이고, 다른 하나는 한국작곡가협회가 제정한 파안 생명나무 작곡가프로젝트와 작곡상이다. 여성 작곡가 이름을 사용하여 작곡상을 지정하는 일은 음악사에서도 유래하지 않은 일. 세계 음악계에서 화제가 됐다. 3회째인 올 대회는 1028일 공모마감으로 선택가능 국악기는 피리, 대금, 해금, 장고, 가야금, 거문고, 아쟁이 공지되었다.

-독일에서 개최하는 국제박영희작곡상이 공모조건도 화제였었죠. 전세계 40세 이하의 젊은 작곡가들을 대상으로 한 것도 신선하지만, 국악기와 서양악기가 어울려 연주할 수 있는 현대음악 양식의 작품을 공모로 뽑는다는 규정이 외국 작곡가들에겐 매우 낯선 도전일 것 같은데요.

이름을 내건다는게 부끄럽지만 책임감도 커지네요. 1회 작곡상의 주제가 조화와 융합이었어요. 융합이란 익숙함과 낯섦의 어울림이라고 할 수 있죠. 물론 외국인들에겐 낯선 악기인 한국 국악기를 1개 이상 사용하라는 규정이 쉽지는 않을 거예요. 일단 한국악기를 이해하고 그 소리를 알아야 곡을 쓸 수 있기 때문이지요. 어떤 악기들이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악기로 남을 수 있을 것인가는 바로 작곡가들이 결정하는 문제입니다. 어쩌면 이것이 바로 국제박영희작곡상을 제정한 정체성이기도 하고요.”

-곡을 연주하려면 반드시 한국의 악기가 있어야 하니 국악기의 생명력을 잇는 일이군요. 정말 감사한 일입니다. 그런데 선생님, 파안이라는 이름이 좀 궁금했습니다.

파안(琶案)을 제게 써준 사람은 도올 김용옥 선생입니다. ‘책상 위의 비파또는 생각할 , 비파. 작곡가로서 좋은 뜻이지요. 파안의 의미도 좋고 하여 1978년부터 박-파안(Pagh-Paan)이라고 쓰기 시작했어요.”

-평생을 창작생활로, 그리고 후진을 양성하는 일에 바치셨는데 보람이거나 아쉬운 점이 있으신지요.

음악은 사람들의 숨소리예요. 현대음악의 작곡은 그 현재의 소리를 반영하는 일이고요. 저는 현대를 사는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으면 하는 기대로 소리를 찾는 작업을 해왔어요. 그러나 창작 생활 못지않게 보람있던 일은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이었어요. 브레멘 국립예술대학에서 현대음악 아틀리에를 운영하며 학생들과 자유롭게 토론하고, 좋은 음악을 만들고, 연주할 수 있었던 것이 행복했어요. 요즘 한국에도 재능있는 젊은 작곡가들이 많이 있는데, 그들을 세계적인 작곡가로 키우려면 창작생활에 전념할 수 있도록 사회적인 뒷받침이 필요한데 그런 점이 안타까워요. 독일이나 유럽은 저작권 제도가 잘 되어 있어서 작곡가들이 작곡에만 전념할 수 있거든요.”

-작곡생활이 50년이신데 창작하신 곡이 몇 곡인지 여쭤 봐도 될까요.

그럭저럭 80곡 쯤 되는 것 같네요.”

-앞으로 어떤 일을 하고 싶으신지요.

젊은 시절엔 시간과 싸울 정도로 치열하게 살았지만, 요즘은 나를 내려놓고 마음을 비우는 일에 익숙해지고 있습니다. 물론 여전히 곡을 쓰고 있어요. 또 저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과 만나 이야기도 나누고.”

그는 스승인 클라우스 후버와 결혼, 음악가족으로 살았으나 후버 작곡가가 작년에 고인이 된뒤 브레멘에서 혼자 지내고 있다.

-여전히 단아하신 모습이 보기 좋습니다. 이젠 자주 오셨으면 좋겠습니다.

조카에게 치료도 받을 겸 한국에 자주 오려고 해요. 오늘 만난 후배님들처럼 보고 싶은 사람들도 많아졌어요.”

마치 노랫소리처럼 잔잔하고 포근하고 정감있는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문득 그가 먼 독일이 아닌 우리 동네, 아니 남문로1181번지에서 오랜 세월 함께 살아온 이웃집 큰언니처럼 정겹게 느껴졌다.

이 글이 게재될 때 쯤이면 그는 독일의 작고 평화로운 음악도시, ‘브레멘 동물음악대의 무대였던 예술가들의 이상사회, 세계적인 예술가들을 키워낸 브레멘으로 돌아가 감동의 소리들을 모으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그에게 음악적 영감을 준 고향 청주를 기억하며.

글·동양일보 상임이사·동화작가

음악관련자들이 청주를 방문한 박영희 작곡가와 만났다. 왼쪽부터 박미경(성악가·청주하우스콘서트공동대표), 필자, 신지수(작곡가), 박영희 작곡가, 신만식(작곡가), 김향숙(청주하우스콘서트공동대표), 권오성(청주하우스콘서트공동대표).
음악관련자들이 청주를 방문한 박영희 작곡가와 만났다. 왼쪽부터 박미경(성악가·청주하우스콘서트공동대표), 필자, 신지수(작곡가), 박영희 작곡가, 신만식(작곡가), 김향숙(청주하우스콘서트공동대표), 권오성(청주하우스콘서트공동대표).

 

 


재독 작곡가 박영희

* 1945년 청주시 상당구 남문로1181에서 출생

* 청주중앙초, 청주여중, 청주여고, 서울대 작곡과 동대학원 졸업

* 1974년 독일 프라이부르크 음대

* 1978년 스위스 보스빌 제5회 세계 작곡제 1(창작곡 만남’)

* 1979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유네스코 작곡콩쿠르 1

* 1980년 도나우엔싱엔 현대음악제 초연(오케스트라 곡 소리’)

* 1991년 오스트리아 그라츠 음악·공연예술 대학교 초빙교수

* 1992년 독일 칼스루에 음악대학교 초빙교수

* 1994~2011년 독일 브레멘 예술대학교 작곡과 주임교수, 부총장

* 1995년 독일 하이델베르크 여성예술인상(동양인 최초 수상)

* 2009년 독일 베를린 예술원 회원

* 2011년 브레멘시 예술 및 학술 공로수상

* 2016년 제1회 국제 박영희 작곡상 제정(주 독일 한국대사관, 한국문화원)

* 2017년 제1회 파안 생명나무작곡가 작곡상(한국작곡가협회)

* 세계현대음악명예의전당 파울 자허 재단에 친필악보 영구 보관

* 수상 : 난파음악상(1979), ‘자랑스러운 서울대인수상(2006), 대한민국문화훈장(2007), KBS 해외동포상(2008), 한양대학교 백남상(2013), 1호 명예통합청주시민(2014), 유럽교회음악상(2015), 대원음악상(2017), 독일작곡가협회 FEM-Nadel(2018)

* 작곡 : 관현악곡, 국악관현악곡, 실내악, 독주곡, 성악곡, 합창곡, 오페라 등 80여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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