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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통치비화
조선통치비화
  • 박장미
  • 승인 2018.09.30 20:5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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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호의 '미인승무도' 일부. 1922년 조선총독부가 주최한 1회 조선미술전람회 동양화 부문에서 특선에 해당하는 4등에 올랐다.
 

(동양일보 박장미 기자)

■조선어 보급과 미술전시회

●총독부의 미술전람회

▷야마가미 “조선총독부 미술전람회는 1922년에 시작했고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어 해를 거듭할수록 더욱 성행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이 전람회도 미즈노 각하께서 발의하셔서 시작된 것이라고 들었는데 각하께서 이러한 시도를 하시게 된 동기는 무엇이었습니까? 조선통치와도 관계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는데 자세히 말씀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미즈노 “대단한 동기라고 할 것까지는 없습니다. 소요(3.1운동을 말함.) 후 조선인의 인심이 어딘지 모르게 거칠어져 있어 이를 완화하는 한 방법으로 미술사상을 양성하기 위해 조선총독부 미술전람회를 창설하기로 했습니다. 이는 문부성 전람회, 즉 소위 문전(文殿), 제전(帝殿)과 같은 성질의 모임으로 관설(官設) 미술전람회인데 1921년 말경부터 그 준비에 착수해 다음해 1922년에 1회 전람회를 개최하게 됐습니다. 그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매년 전람회는 계속고, 조선 미술계의 향상·발달에 커다란 공헌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이 일을 계획했던 것은 다음과 같은 동기에서 시작했습니다.

조선인은 원래 천성적으로 정치에 매우 관심이 많고, 매우 비판을 즐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즉흥적인 정치담을 좋아하며 그 이외에는 달리 특별한 취미도 여유도 없는 백성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제가 조선에 있을 때 일찍이 고등보통학교를 참관한 적이 있었는데, 그 때 거기서 4학년 학생에게 “너의 장래가 무엇이니?”라고 질문했더니 전 학급 학생 거의 모두가 법과나 정치과에 들어가 법률, 정치, 경제와 같은 분야를 공부하고 싶다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만큼 조선인은 정치에 관심이 많은 국민입니다.

그런데 언젠가 조선 청년 화가들이 주최하는 서화 전람회에 들려볼 기회가 있어 가봤더니 서예 수준도 상당해 그 기교가 뛰어났고, 그림도 상당히 훌륭하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그래서 이 방면을 장려하는데 다소나마 힘을 기울인다면 미술가로서 훌륭한 인재도 배출될 것이고 또 조선인의 무취미한 정치론을 이런 방면으로 전향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조선에 의과, 법과, 전문학교 이외에 미술학교나 음악학교 등을 설립해 그 방향으로 인심을 쏠리게 하여 소위 취미교육 정서교육을 실시하려고 계획했습니다. 그러나 예산 관계 상 이를 실현시키지는 못했습니다. 미술 전람회를 개설하는 것은 그 자체가 그다지 경비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우선 제 1차적인 착수 방법으로 미술 전람회를 개최해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1921년 가을 조선인들 중에서는 이원재, 박수효 등의 명사를 모셨고, 또 화가들 중에서는 김규진(金奎鎭), 이도영(李道塋)라는 사람을 뽑았고, 일본인들 중에서는 미술방면에 관계있는 사람들을 위원으로 하고 총독부 참사관인 와다이치로(和田一郞)씨를 주임으로 하여 조선미술전람회를 열자는 것에 의견이 모였습니다. 드디어 다음해 1922년 봄, 1 회 전람회를 열게 됐습니다. 조선에서는 최초의 시도였습니다만 응모자는 상당수에 이르렀고 입선한 사람도 상당히 많이 나왔습니다.

관설(官設) 미술 전람회가 개설되자 조선인 화가들은 매우 고무됐고 청년화가가 속속 배출되기 시작했습니다. 과거 조선에서는 화가라 하면, 사회에서 천대의 대상으로, 거의 대부분이 간판을 쓰거나 선전상회의 직업인과 똑같이 생각하여 사화 관념 상 그다지 중시하지 않았었으나 이 전람회를 개설함으로써 조선 미술계의 실태가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짐과 동시에 관계자들의 관심을 불러 일으켜 이로 인해 화가 자신들의 품위도 높아졌습니다. 또한 화가들의 작품에 대한 가치도 매우 높아졌습니다.

이같이 미술을 장려함으로써 직접적으로는 관계자의 기량 및 품위 향상을 촉진함과 동시에 일반 조선인들의 미술에 대한 관심을 높여 고상한 취미를 가질 수 있게 하였던 바, 이는 어떤 의미에서는 문화통치의 가장 좋은 모범적인 방법의 하나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현재 상태에서 조선 화가의 실력은 일본 화가의 실력에 비교하면 뒤떨어지는 점이 너무 많아 엄청난 대작을 기대할 수는 없다 할지라도 앞으로 적절히 장려하고 서로 어울리게 한다면 점차 이 방면에서 성공하는 자들이 많이 배출될 것으로 생각됩니다.

지금 입장에서 생각해 볼 때 이 시도는 결코 결실 없는 무의미한 일이 아니었다고 굳게 믿으며, 저는 지금과 같은 대성공을 기쁘게 여기고 있는 바입니다.”

조선미술전람회 도록 1924~1938
조선미술전람회 도록 1924~1938

 


-조선미술전람회(朝鮮美術展覽會)는

일제강점기에 개최된 미술 공모전으로 선전(鮮展)이라고도 불렸다.

3.1 운동 이후 문화통치 정책의 일환으로 조선총독부가 추진한 이 사업은 진 1922년 5월부터 1944년까지 매년 공모전 형식으로 진행됐다.

초기에는 1918년 안중식, 조석진, 김규진, 오세창 등이 결성한 서화협회와 대립하는 성격이 강했다. 서화협회는 민족주의 성향을 가진 민간 주도 단체였지만 조선미술전람회는 관제 행사의 성격이 강했기 때문.

조선미술전람회는 일본 문부성 주최의 전람회인 문전(文展) 또는 제국미술원전을 본뜬 형식으로 진행됐으며 동양화와 서양화, 조각 부문 외에 서예 부문이 추가됐다.

조선미술전람회가 많은 미술가를 배출하기는 했지만 한국 근대 미술이 일본화에 물들게 됐다는 지적도 받는다.



■지방제도의 획기적 개정



●보수·진보 양측의 개정론

▷야마가미 “조선에서 지방제도를 실시한 것은 상당히 획기적인 시정(施政)이었고 매우 중요한 치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또한 미즈노 각하의 발의에 의해 단행된 것이었다고 들었는데, 이에 대해 별 지장이 없는 범위 내에서 그 당시와 실시 후의 상황 및 효과에 대해서 말씀을 들었으면 합니다.”



▷마츠무라 “신정이 단행되자 곧 지방제도의 획기적인 개정이 있었습니다. 1919년 8월 조선총독부 관제개혁이 있었을 때 당시 하라다카시 내각총리대신은 조선에서의 지방제도를 사정이 허락하는 한 점진적으로 시행하고 싶다는 그의 희망을 술회했습니다. 사이토 마코토 조선총독이 조선 통치의 대명을 받았을 때도 지방 민력의 함양 및 민풍의 작흥(作興)은 지방단체의 힘에 맡기는 것이 편리한 만큼 장래에는 적당한 시기를 보아 지방자치제를 시행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하루라도 빨리 이에 대한 조사 연구에 착수하라는 뜻을 밝힌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를 위해 지방제도의 권위자이신 미즈노 랜타로 정무총감이 주무국장을 독려하여 조사 입안케 했습니다. 그 결과 이듬해인 1920년 7월 27일 지방제도에 관한 령을 발표했으며, 같은해 10월 1일 시행 제령 12호, 15호로 새 지방제도가 실현됐습니다.

예부터 조선에도 지방에 향청, 향약 등의 제도가 있었기 때문에 인보상조(人保相助)사상의 배양 및 지방자치의 근원에 기여한 바 크지만 조선시대의 비정(秕政)이 제대로의 육성을 가로막아 종국에는 크게 결실을 맺지 못하고 말았던 것입니다(조광조가 향약을 통해 그 실시를 시도했으나, 기묘사화로 인해 실패한 것).

총독정치가 처음 시작되었을 때는 이들 구한국의 제도를 참작하여 당시의 민도 및 민정에 적합한 지방제도를 제정했습니다만 현재의 입장에서 볼 때는 중앙집권주의와 관치주의를 본체로 하고 있어 민의 창달을 위한 기관의 구성 및 기증에서 극히 유치한 상태를 벗어날 수가 없게 됐습니다. 즉 관리인 도지사, 부윤(府尹), 군수, 도사(島司), 면장 등의 자문기관으로서 도·군 및 섬 등지에 참사, 부에 협의회 그리고 지정면에 상담역 등을 배치하게 되어 있어 그 권한이 극히 미약했을 뿐 아니라, 이들 직책 모두 사명감을 가질 수 있도록 권한을 부여하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습니다. 그 이후 10년의 세월이 경과했고 그 10년간 문화의 진전이나 민도의 향상이 현저할 뿐 아니라 시세의 변화가 급격하여 당초에는 유효적절한 지방제도였다 할지라도 현 시점에서는 피치자(被治者)가 치자(治者)와 같이 사무에 참여하여 일을 담당할 수 있도록 하는 훈련 상황이 상당히 선진적이어야 할 것이 요구됩니다. 때문에 여러 나라의 예를 보아도, 그리고 일본의 지방제도의 발전과정을 보더라도, 민지(民智)와 민도(民度)의 발달정도에 따라 순리적이고도 이상적이며, 완전한 자치제도를 실시해 나가야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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