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일보 박장미 기자)

■학제개혁을 목표로

▷야마가미 “학제를 개혁함에 있어서도 매우 어려움이 컸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에 대한 상세한 내용을 시바다씨께서 지장이 없는 범위 내에서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양친과 상담한 후 조선으로

▷시바다 “‘개혁’이라는 말은 말 자체는 매우 간단한 용어입니다만, 이를 단행하는데 있어서는 여러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어려움이 꽤 많이 따른다는 것이 상식입니다.

조선의 현행 학제를 수립함에 있어서도 저 자신 담당자로서 실로 많은 고충이 있었습니다. 학제 개정 당시 총독과 이미 돌아가신 하라다카시 수상과 미즈노 정무총감의 후원이 컸던 것은 사실이고, 학제개혁을 둘러싸고 여러 가지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이 있습니다. 이에 대해 조금 말해 보겠습니다.

1919년 9월 저는 조선에 학무국장으로 부임해 왔습니다.

이는 앞에서 말한 독립 소동에 의한 인사이동으로 총독은 사이토마코토, 정무총감은 미즈노랜타로씨 였습니다.

부임해 오기 전 저는 오사카부의 내무국장으로 있었는데, 정부로부터 대만으로 가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저는 제 출처진퇴(出處進退)를 결정함에 있어 항상 늙으신 양친의 의견을 들은 후 결정하는 습관이 있었기 때문에 바로 양친과 상담했는데, 대만에는 가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일본에 그대로 있기로 했는데, 얼마 안 있어 이번에는 조선으로 가라는 것이었습니다. 미즈노씨로부터 간청하는 전보가 왔고, 아카이케아츠시군은 저 때문에 일부러 오사카까지 와서 “조선은 지금 당신과 같은 인물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개혁을 필요로 하고 있는 조선 통치를 위해 함께 고생하는 것도 유쾌한 일이 아니겠습니까?”라고 말하며 나를 마치 큰 인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부축이면서 함께 조선에 갈 것을 종용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다시 양친과 이 일을 상담하였는데, “조선이라면 가거라. 가서 큰 활약을 하도록 하라.”고 말씀하시며 저를 격려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총감께 “도대체 저는 무슨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까?” 하고 물었더니 식산국장의 일을 맡을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승낙한 후, 상경해보니 학무국장으로 발령 통보가 나 있었습니다.

젊었을 때 문부성에 근무했던 적이 있기는 하지만, 교육행정에는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주저했습니다만, 개혁을 하려면 숙련자보다 오히려 초보자가 훨씬 더 나을 것이라는 모모선배들의 충고의 말씀도 있었기 때문에 소관 사무는 무엇이든지 관계치 않겠다는 생각으로 부임했습니다. 그 때 아카이케군은 경무국장으로 발령을 받았습니다.”



●단지 3개항

▷시바다 “사이토총독은 제가 부임하자마자 한 마디로 아주 짧게 한 마디 부탁하셨습니다. “시바다군 자네가 맡은 임무는 참으로 막중해. 나는 자질구레한 사항은 말하지 않겠네. 단 3개항만 자네가 지켜 주었으면 해. 이 약속만은 이행해 주게. 이외의 나머지 사항은 자네에게 맡기겠어”하며 당부하신 총독의 3개항이란 △문화정치 △일시동인의 정신으로 교육제도를 수립할 것 △교육기관의 증설이었습니다.

저는 총독께서 당부하신 3개항을 염두에 두면서 바로 교육제도 개선작업에 들어갔습니다.

당시 조선의 교육행정이 얼마나 어렵고 중대한 것인가에 대해 저 또한 충분히 예상하고 뛰어들었던 바였습니다.

중앙정부의 양해를 제대로 얻지 못하여 난처하게 되었을 때에는 절망한 상태에서 눈물이 다 나올 지경이었습니다. 교육개혁에 관한 성안(成案) 후에는 척식국과 법제국과의 절충을 위해 수 없이 도쿄와 조선을 왔다 갔다 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성안(成案) 전에는 법제국에서 꾸중을 들은 적도 있었습니다. 이유는 데라우치 총독 시대의 교육 강령 중 한 항목을 삭제했다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은 “조선 교육은 조선인들을 충량(忠良)한 일본국민으로 육성하는 데, 그 목적을 둔다.”는 말이었습니다. 이 조문을 삭제한데 대해 법제국의 모 참사관이 매우 흥분한 상태에서 화를 내면서 저에게 심한 모욕적인 언사를 퍼부었습니다. 원래 시골 태생인 저는 매우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저는 왜 이러한 문자를 노골적으로 사용해야 하는가에 대해 심한 회의를 품었던 것입니다. 그런 문자를 쓴다고 해서 그대로 되는 것도 아니고, 일본 교육제도에도 수신덕목으로만 등장하고 있는 말을 굳이 문자로 표현하여 오히려 조선인들에게 더 반항심만 키워주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요컨대, 중요한 것은 교육의 방법입니다. 저는 신민에게는 급하면 돌아가라는 식의 교육방법이 오히려 효과적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또한 문자화함으로써 오히려 좋지 않은 점도 있는 법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그 무렵 척식국장에는 가와무라다케지(川村竹治)였고, 법제국에는 전직 장관 구로자키데이죠(黑崎定三)씨와 권은총재(勸銀總裁)인 바바에이치(馬場暎一)씨 외 야마모토(山本遲藏)씨 등이 참사관을 맡고 있었습니다. 바바군 등은 후에 위원에게 부탁하여 완전히 양해해 주셨습니다마는…….

공학문제에 대해서는 모씨(某氏)에게 특정한 점을 들어 맹렬히 반대했는데, 뭐라고 설득해도 듣지 않아 10명의 법제국, 척식국의 참사관들이 보는 앞에서 논의하게 되었습니다. 머리도 나쁜데다가 시골 태생인 저였지만, 의견이 서로 다르다는 것은 시인해도, 양보는 결국 할 수 없다고 말하며 끝까지 버티었습니다. 그랬더니 모씨는 조선 여행을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오는 길에 조선의 총독·통감과 회견한 결과 상사들은 모두 모씨 자신의 의견에 동의했는데, 자네가 끝까지 반대하며 버티는 이유는 뭐냐며 저를 추궁하는 것이었어요. 이 말에는 제가 너무 화가 치밀던군요. 총독 총감을 자신들의 애보는 심부름꾼 정도로 알고 있는 것인가? 바보 취급을 당하는 것도 정도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되어 직접 사이토총독과 총감에게 “만약 각하께서 개혁안을 결정하는데, 모씨의 의견에 동의하신다면 저는 즉각 사직할 결심입니다. 총독은 ”절대로 그 같은 사실은 없다. 자네가 하고자 하는 대로 주장하라.“는 전갈을 보내 주셨습니다. 하라다카시 수상의 흉변(兇變) 후(1921.11.4에 도쿄 역에서 오츠카(大塚)역원인 나카오카료이치(中岡良一)씨에 의해 피살당함), 얼마 안 있어 총독부의 주장이 그대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는데, 그 때 일을 지금도 저는 생생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여 새 학제가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사이토(齋藤)총독의 호담(豪膽)

▷시바다 “잠깐 이야기가 되돌아갑니다만, 조선에 부임해 올 당시 부산에는 이미 아주 좋지 못한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 있었습니다. 기차 안에서 신문기자들이 나에게 자주 “경성에 도착하게 되면 곧 바로 큰 일이 일어날지도 모릅니다. 경성까지 만의 목숨이라고 생각하고 기도나 잘 하시오.”하는 불길한 말을 하면서 저를 조롱하는 것이었어요.

그 기차 안에는 총독도 정무총감도 함께 타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기차 안에서 총독은 시종 여유 만만한 태도로 빙글빙글 웃으시기만 하는 것이었어요. 남대문 역에 도착해서 총독이 탄 마차의 마부의 말을 채찍질 해 가려는 순간 무서운 대 폭음이 들려왔습니다. 그 순간 부근에 같이 있던 많은 사람들이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졌습니다. 역 앞 광장은 돌연 아 수라장으로 변했던 것입니다. 총독 일행을 환영하러 나온 많은 인파들 중에서 일시에 3,40명의 부상자가 나오게 된 것입니다. 그 중에는 아주 큰 부상을 입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단 한 발의 폭탄이 폭발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피해는 아주 컸던 것입니다.

그 때 총독의 태도는 실로 훌륭했습니다. 총독은 그 혼란한 와중에서도 태연히 마차를 진행케 했고, 전혀 요동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이를 본 우리들은 ″역시 대단한 인물이구나!″ 하고 경탄했을 뿐만 아니라, 감탄하여 기쁨의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습니다.

다음은 미즈노씨의 소문에 관한 것인데, 그건 새빨간 거짓말이었지요. 총독은 관사에 들어가자마자 삼페인을 터뜨리며 “비가 와야 땅이 굳는 법이야”하고 말씀하시면서 정무총감을 보며, 밝게 웃으셨습니다. 기차 속에서 나를 빈번히 놀렸던 아사히(朝日)신문의 기자 다치바나(立花)씨는 이 소동으로 큰 부상을 입었는데, 얼마 안 되어 사망했고, 일일(日日)신문 기자 야마구치씨가 오른 팔이 골절되는 등의 중상을 입게 되었는데 참으로 가련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가족을 비롯하여 가정부에 이르기까지 9명 모두가 불행 중 다행히도 전부 무사했습니다.

독립소동 후 일 년 정도까지는 경성 내의 외국인 경영 학교 학생들이 종종 독립소동을 일으켜 시끄럽게 구는 게 일쑤였습니다. 독립소동 이래 조선 교육계에서는 미국 세력이 매우 강해졌기 때문에 미션스쿨에 다니는 많은 학생들은 자신들을 치외법권에 속한 인물들처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처음 총독부는 이들에 대해 어디까지나 교육적·지도적 태도로 임했는데, 소동 후 1년이 경과한 후, 많은 학교가 총독부의 방침을 그대로 지켜 주었습니다만, 몇 학교만은 여전히 만세 소동을 일으켜 소란을 피웠기 때문에 결국 도저히 참아낼 수 없을 정도에까지 이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사이토 총독이 도쿄에 가 계시는 동안이긴 했지만, 미즈노 정무총감의 승인을 얻어, 경성에 있는 외국인학교 교장 2명을 면직했고, 이러한 취지를 도쿄에 계시는 총독에게 전보로 알렸습니다. 전보가 도착하기 전에 총독은 도쿄에서 미국인 선교사로부터 해직에 대한 강력한 항의를 받으셨고, 이로 인해 이 문제를 다시 고려해 볼 것을 요청해 오셨습니다. 그러나, 이미 평양에서는 한 사람을 면직하기로 결정이 되었기 때문에 매우 일이 난처하게 되었습니다. 거기다가 외무성에서는 미국의 배일감정 격화를 몹시 두려워하고 있었던 관계로 일이 더욱 어려워졌습니다. 그러나, 혁신적인 시정을 위해서는 단호한 신념을 가지고 일을 진행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총감의 허락을 받아 면직할 사람을 명시한 후 총독에게 승낙해 주실 것을 요청하자(물론 비장한 각오를 한 상태에서), 총독은 부임 당시 내게 말한 3개항을 되살리는 의미에서 자네가 말 한대로 해도 좋다고 지극히 명쾌하게 승낙을 해 주셨습니다. 이 때문에 결국 총독부는 데라우치 장군 때부터 골치를 썩이며 처리할 수 없었던 외국인 학교의 교장을 세 사람이나 교체할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요컨대 사이토 총독은 양보해서는 안 될 경우에는 목숨을 걸고라도 양보하지 않았지만, 양보해야 할 경우에는 아주 깨끗이 양보하는 것이 주특기였습니다.

배일 공포에 직면해 있으면서도 억압해야 할 경우는 확연히 억압할 줄 아는 정치 도량을 이처럼 명쾌하게 보여 주셨다는 것은 담당자였던 나에게도 매우 다행한 일이었습니다.”



●재미있는 철학

▷시바다 “지금이니까 이런 말을 할 수가 있지요. 조선 근무 3년 후부터 저는 노모의 희망도 있었기 때문에 언제 일본으로 돌아갈 기회가 올까 엄밀히 엿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여름 저녁 무렵, 저는 총독과 인천 부두에서 배를 노저으며 더위를 식히면서 환담할 기회를 가질 수가 있었습니다. 그 때 총독이 위스키를 마시면서 문득 내 얼굴을 쳐다보시더니 갑작스럽게 생각났다는 듯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시바다군, 총독이라는 직책은 5년 하면 많이 하는 거야. 5년 이상은 아무래도 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해. 도대체 어떤 사람이라도 오래 집권하면 자신이 한 일에 연연하게 되는 법이지. 그러나 그런 생각은 자신도 모르게 국가에 좋지 못한 누를 끼치게 되는 거야. 5년이 가장 적합해. 5년 정도라 생각하면 앞으로 2년밖에 남지 않았어”하며 총독이 웃으시는 거예요.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선수를 빼앗겼구나 하고 생각했고, 도저히 아무 말도 붙일 수가 없었어요. 그러자 총독은 다시 말을 이어 “해군대신, 해군차관 모두 8년씩 하면서 진급했지만, 지금 생각해 봐도 썩 좋은 일은 아니었어.”라고 하시면서 또 웃으셨습니다. 분명히 총독 자신의 신상에 관한 말씀을 하신 것이었지만, 그 말속에는 저의 일본으로 돌아가려는 마음을 간파하신 후 이를 막고자 하시는 의도가 숨어 있는 것으로 생각되었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볼 줄 아는 심통력(心通力)은, 그리고 자기 철학을 뜻밖의 장소에서 보여 주는 총독각하에게 저는 놀라움과 존경을 금치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직후 미즈노 정무총감의 내무대신 취임을 계기로 조선을 떠나 일본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학제 개혁에 관한 더 자세한 사항은 마츠무라씨의 말을 듣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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