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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길에 서서 / 유영선이 만난 사람 - 박남희 청주신선주 기능보유자
이 길에 서서 / 유영선이 만난 사람 - 박남희 청주신선주 기능보유자
  • 동양일보
  • 승인 2018.11.06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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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년 선비정신 신선주 빚는 까닭, "술은 사람을 이어주는 정"
충청북도 무형문화재 4호로 지정된 박남희 청주신선주 기능보유자가 6녀 준미 이수자에게 신선주 제조의 비법을 전수하고 있다.
박남희 청주신선주 기능보유자

박숭상 18대조에서 전수된 가양주, 청주 대표 '특화 관광상품'으로

귀한 재료 쓰다보니 양조공장 파산 아픔도, 6녀 준미씨 이수자 비법 전수에 '기대'



“강나루 건너서/ 밀밭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해질 무렵 고즈넉한 부모산으로 오르는 길, 목월의 시가 절로 입에 도는 까닭은 이 길에 ‘술빚는’ 현암재(충북무형문화재 4호 청주신선주 연구소)가 있기 때문이리라.

술이란 무엇인가?

인류가 만든 가공음료 가운데 가장 오래 된, 발효에 의한 신비의 음식이 아닌가. 하물며 전통주란 그 지역의 기후와 풍토 등 자연환경과 역사와 전통 등 사회 환경을 고스란히 담으며 발전해온 그 사회의 문화적 산물이자 정서적 산물이. 최고의 맛과 멋을 지닌 문화적인 술. 그러나 그 술이야기를 듣는 일은 의외로 시간이 걸렸다.

충북무형문화재 4호 청주신선주의 기능보유자 박남희 씨(84)의 건강이 좋지 않아서 몇 차례 약속을 미뤄야 했기 때문이다. 박씨가 병원에서 퇴원을 한 후 박씨의 딸이자 이수자인 박준미 씨(51)의 연락을 받고 ‘현암재’를 찾았을 때, 박씨는 다소 초췌해진 모습이긴 했으나 자세를 흩뜨리지 않고 단정하게 앉아있었다.



-‘현암재’가 참 예쁘네요. ‘우리 술 문화공간’이라 이름붙인 것도 잘 어울리고.

“준미가 마련한 집입니다. 얘 덕분에 조상님들 뵐 낯이 생겼지요.”

“너무 조촐한 집이지요. 10년 전에 제가 낡은 한옥 한 채를 사놓았던 것인데, 이 집을 신선주 연구소로 쓰게 될 줄은 몰랐어요. 제가 직접 인테리어를 했는데 부족하지만 아버지가 좋아하시니까 저도 보람을 느낍니다. 이 집의 이름을 현암재라고 붙인 것은 고조부님(박래순)의 호가 ‘현암’이라서 따왔어요. 현암 할아버지는 학자셨는데, 할아버지가 펴내신 ‘현암시문합집’의 말미에 신선주에 대한 기록을 해놓으셨어요.”

곁에서 이수자 박준미 씨가 거들었다.

-신선주를 비롯해서 다른 지방과 달리 충북의 무형문화재 2,3,4호가 모두 술인 이유가 있을까요.

“술은 기본이 물이 좋아야 하는 건데 충북은 물이 참 좋아요. 우리 집 물은 속리산에서 발원된 물로 맛이 순하고 부드럽고 좋아서 동네 사람들이 모두 물을 뜨러 오곤 했어요. 그런데 신선주가 4호가 된 것은 술맛이 뒤져서가 아니라 순전히 서류미비 때문이었어요. 93년엔가 지방문화재를 지정한다고 신청하라는 말을 듣고 서류를 냈는데, 충주 청명주는 바로 지정을 받았는데 신선주는 서류를 돌려받았어요. 술에 대한 전통 제조방법이나 의미보다 재료로 들어가는 약재이름만 잔뜩 써있으니까 심사위원이 ‘이게 십전대보탕이지, 술이냐?’고 했다는 후문을 들었어요. 그래서 다시 서류를 정리해 94년 1월 보은 송로주와 함께 각각 3호, 4호로 지정을 받은 것이지요.”

-고려시대,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수많은 가양주(家釀酒)들이 있었는데 시나브로 사라졌습니다. 신선주는 어떻게 그 맥을 이어 올 수 있었을까요.

“신선주는 원래 술이라기보다는 약처럼 만들어 먹었다고 보는 게 맞습니다. 집안 어른들로부터 전해져 온 이야기에 의하면 충청도 도사(都事)를 지낸 박숭상이라는 어른이 낙향한 후부터 이 술을 빚었다고 합니다. 취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건강을 위해서 좋은 약재들로 술을 담아 반주(飯酒)로 드셨다고 하는데, 그러다보니 좋은 전통으로 집안 대대로 이어져 내려온 것이지요. 저는 장손이라서 할아버지로부터 직접 술 빚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러면 기능보유자께서는 신선주(神仙酒)의 역사가 얼마나 된다고 보시나요.

“우리가 함양 박씨인데, 그 어른으로부터 따져본다면 제가 18대가 되고 약 400여 년의 역사가 되는 것 같네요.”

-신선주의 이름에도 유래가 있는지요.

“누가 이름을 붙였는지는 모르겠는데요, 할아버지로부터 들었습니다만, 신라시대에 고운 최치원(孤雲 崔致遠)이 이 마을 앞의 신선봉에 정자를 짓고 이 술을 즐겨 마셨다고 합니다.”

“어느 학자분께서 말씀해주시길, ‘우암 송시열의 송자대전에 후운정(後雲亭)이라는 정자가 나오는데 청주의 검단산(檢丹山) 아래에 있는 정자로, 화양동에서 30리 떨어진 곳이고 최고운(崔孤雲)이 왕래한 곳으로 전해 온다며 후운정이 있던 곳이 저희 마을’이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선비들이 많이 찾았고 그분들이 시를 쓰면서 술을 즐겼다고 합니다. 아마 그때부터 신선주라고 불려온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수자 준미 씨가 조심스럽게 보충해서 답했다.

-이제는 자랑스럽게 전통주들을 빚을 수 있습니다만, 어려웠던 시기가 있었지요.

“말도 말아요. 일본사람들이 침략해온 뒤 술빚는 일은 할 수가 없었어요. 할아버지는 몰래 술을 빚었어요. 저는 할아버지 귀염을 받으면서 어릴 때부터 할아버지가 만드시는 모습을 지켜보았지요. 그래서 그 비법을 전수받을 수 있었습니다.”

일제는 철저하게 우리 술의 말살정책을 펼쳤다. 1876년 강화도조약이 체결된 후, 일본의 양조기술이 도입되면서 일본식 탁주와 청주가 만들어지게 되었고, 일본의 청주는 ‘정종(正宗)’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일제는 1907년 주세령을 집행했고, 이로인해 우리나라 전통주는 말살되기 시작했다. 주세법 시행 이후, 다양하고 다채롭던 우리 전통주(가양주)들은 약주, 탁주(막걸리), 소주로 단순 규격화되면서 본래의 맛과 향기를 잃어버리게 되었다. 해방 후에도 술 제조는 여전히 어려운 시기로 분류된다. 조선총독부 시절의 주세행정의 골격이 그대로 유지된 데다, 1965년 정부가 발표한 ‘양곡관리법’은 식량난 해소를 위해 쌀을 술의 원료로 쓰는 것을 금지했기 때문이다.

-일반 술과는 무엇이 다른지요.

“신선주는 발효 증류주입니다. 소주도 원래는 증류주였지만 현대의 대중소주는 주정(酒精)에 물을 희석해 만들고 있지요. 그리고 흔히 과일주라고 하는 술들은 침출주라고 보면 됩니다.”

-신선주를 만드는 방법이 어려울 것 같습니다만.

“좋은 술을 만들기 위해 제일 중요한 것은 누룩이지요. 요즘 웬만한 술들은 일본에서 들여온 누룩을 씁니다만, 저희는 직접 만들고 있어요. 그리고 좋은 재료와 정성입니다. 고두밥은 찹쌀로 짓는데 투명한 물이 나올때까지 백번 이상을 씻어야 합니다. 생약재는 과거엔 열두가지를 썼지만 지금은 우슬 8냥, 하수오 가루 6냥, 구기자 4냥, 천문동·백문동·생지황·숙지황·인삼·당귀 각 2냥, 육계 1냥 등 10가지를 넣습니다. 고두밥을 짓고 누룩과 약재를 섞어 손으로 치댄 뒤 항아리에 담고 감국화·지골피를 다린 물을 붓고 기다립니다. 술을 만드는 사람에게는 그 시간이 가장 행복한 시간이지요. 30℃에 7일 정도면 발효가 됩니다. 이것을 25℃의 온도에서 7일, 저온에서 다시 7일을 두면 슬이 익습니다. 삼칠일이 지나고 용수를 박으면 맑은 술이 되는데 100일 발효가 끝나야 비로소 감칠맛 나는 약주가 됩니다.”

-대단한 과정입니다. 박 선생님께서도 술을 잘 드시는 지요.

“젊을 땐 많이 마셨습니다. 할아버지가 쓰신 책에 ‘신선주를 마시면 변비제거에 좋고 백발 등에 효능이 있으며, 또한 술을 마신 후에 쉽게 깨고 머리가 맑아져 마시기에 매우 좋다’고 하셨듯 신선주는 마시고 나면 그 효능을 몸으로 느끼거든요. 신선주는 약용주예요.”

-한때 신선주의 맥이 끊길 위기에 처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다행히 따님이 생업을 접고 이 일에 달려들어 400년의 역사가 다시 이어지게 됐는데요. 무슨 일이 있으셨던 것인가요.

“온 가족에게 너무 아픈 상처라서 생각하고 싶지 않은 일입니다. 94년 신선주를 무형문화재로 지정받은 뒤 사업으로 도전하고 싶은 욕심이 났어요. 마침 주변 분들이 응원하기도 하고, 공무원 중에도 신선주를 대중화해보라고 권하는 분이 있어서 미원 계원리 신선봉 아래에 양조공장을 지었습니다. 수공으로만 조금씩 만들던 신선주를 대량으로 생산할 채비를 갖춘 것이지요. 그런데 막상 공장이 가동된 뒤 판로가 막막한 거예요. 홍보도 문제였지만, 판매를 위해선 그렇게 비싼 재료로 술을 만들면 안된다는 것을 생각지 못한 것이지요. 전재산을 다 털어넣었는데, 공장은 안돌아가지,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어요. 양조장과 전답 임야 등 부동산을 강제경매 당한 후 고향을 떠나 청주로 이사를 왔습니다. 그리곤 그 충격으로 술을 만드는 일을 접었습니다.”

-그런 아픔이 있었군요. 그런데 어떻게 다시 술을 만들게 되었는지, 이번엔 이수자께서 대답해 주시지요.

“저는 어렸을 때부터 술 빚는 아버지를 보고 자랐습니다. 아버지가 직업인으로 연초제조창을 다니시고, 조합장으로 마을 일을 보시며 사셔도 제게 아버지는 늘 ‘술빚는 아버지’였습니다. 그런데 사업이 잘못되면서 술과 인연을 끊으신 아버지를 보면서 마음이 아팠습니다. 매년 예술의전당 마당이나 각종 큰 행사장에서 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들의 공개시연이 열리는데, 아버지는 그곳에 가지 않으셨습니다. 저는 그것이 너무 안타까워서 엄마가 돌아가시기 2년 전 아버지를 모시고 그곳에 가보았어요. 그런데 아버지가 근처를 못가시는 거예요. 너무 힘들어서. 그때 아버지 표정을 보았습니다. 저는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제가 술빚는 법을 배워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께 정확한 방법을 알려달라고 했습니다. 그리곤 형제들 몰래 제 아파트에서 술을 빚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2남7녀중 6번째입니다만, 형제들은 애써 술에 관심을 갖지 않으려 했고, 술만드는 일은 아버지에게서 끝내자고 했습니다. 그렇게 몰래 술을 빚다가 5년 만에 그만 형제들에게 들키고 말았어요.”

-그래서 공개적으로 술을 빚을 수 있게 되었군요.

“형제들은 부모가 가신 힘든 길을 따라가려하냐며 저를 말렸어요. 하지만 아버지가 기뻐하시는 것을 보고 마음을 굳게 먹었습니다. 그 무렵 아버지가 활동을 않으시니까 신선주를 무형문화재에서 해제해야한다는 의견이 있었나 봐요. 그런데 제가 술을 만든다는 소식을 듣고, 관계자분들이 제 아파트로 찾아왔어요. 그래서 인정받게 된 것이죠. 벌써 제가 술을 빚기 시작한지 10년이 다 되어가네요. 이제 내년 5월이면 전수자가 됩니다. 아버지는 조상님 뵙기에 떳떳하다고 좋아하십니다.”

-전수자의 길까지 오게 된 것을 축하합니다. 이제 아버지 뒤를 이어서 신선주의 미래를 만들어나갈 사람으로서 꿈은 무엇인지요.

“신선주를 통해서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나가고 싶어요. 아버지도 실패하셨지만, 어차피 신선주로 돈을 벌기는 어려울 것 같고, 그럴 바에야 즐기는 일을 찾고자 해요. 몇 달전 전재산을 털어서 산성마을에 땅을 마련하고 이곳에 양조장과 전시장을 짓고 있어요. 아마 내년 봄쯤 오픈이 될 것 같은데요. 사랑방 문화공간으로 청주시민들에게 유익한 커뮤니티 공간이 되길 기대하고 있습니다. 마침 입소문을 타고 자발적으로 모인 신선주 보존회 회원들이 꽤 많네요, 이들 중에는 화가 도예가 등 작가들도 여러분 계십니다. 이 공간을 활용해 작가들은 전시공간으로 활용하고, 발효 식문화연구소를 운영하면서 많은 분들과 소통하면 신선주가 하나의 문화매개체가 되지 않을까요.”

-좋은 소식도 들리던데요. 청주시가 신선주를 청주의 대표적인 관광상품으로 특화하기로 했다지요.

“네. 청주시 공모사업으로 앞으로 5년간 총17억여 원을 투입하게 됩니다. 10억여 원은 공모사업으로 국·도비를 확보하고, 나머지는 시비와 기능이수자의 자부담으로 충당해야 하는데, 고마운 것은 농업회사법인 설립과 주류제조면허 취득을 위한 행정지원도 해준답니다. 또 인지도 향상을 위해 우리 술 품평회에 출품하거나 시 대표축제에도 시음·판촉 및 홍보를 지원해준다고 하네요. 내년 2월에는 호주에서 열리는 행사에 청주시를 대표하는 음식으로 참여도 하게 될 것 같습니다.”

-이제 전수자가 되면 해야할 일이 더 많아질 것 같은데요.

“내년 가을쯤이면 전수교육관이 건립될 것 같습니다. 그러면 하고 싶었던 일을 더 적극적으로 펼칠 수 있을 것 같아요. 사실 하고 싶은 일은 너무 많습니다. 조상들의 철학과 선비정신이 담긴 400년 전통의 술을 현대적으로 재창조하여 열린 양조장으로 만들고, 교육청과 협의해서 학생들에게 발효체험 교육도 하고 싶고, 신선주 지키미들에게 기술을 전수해주며 식문화를 연구하고, 또 젊은 쉐프들과 꼴라보를 통해 호텔에도 진출해 보고 싶고, 막걸리 소믈리에 교육과 전통발효를 활용한 취·창업 아카데미로 경력단절여성과 청년들에게도 일자리 도움을 주고 싶습니다. 아직 이름을 밝힐 수는 없지만, 서울 모호텔에서 신선주 납품문의도 있습니다. 이런 일들을 감당하기 위해서 새로 대학에 입학을 했어요. 식품공학과 학생으로요.”

꿈을 꾸듯 그의 눈빛이 반짝였다. 아버지는 이수자 딸이 대견한지 “준미가 어릴 때부터 영리했어요.”라며 미소를 짓는다. 청주신선주 기능보유자 박남희 씨, 그리고 인테리어 건축사업가라는 잘나가는 직업을 팽개치고 힘들고 어려운 전통술 이수자로 뛰어든 박준미 씨, 그들에게 술은 무엇일까.

“술은 함께 나누는 음식이자 정(情)인 것 같아요.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정. 사람냄새가 나는 삶, 느림의 문화같은 것이라고나 할까요.”

부녀의 배웅을 받으며 현암재를 나서려는데 그들에게서 잘 익은 술냄새가 났다. 찔레꽃처럼 배꽃처럼 장미처럼 향기로운.


박남희 씨 약력
*1935년 청주시 미원면 계원리 45에서 출생
*미원 금관초, 강경상업고 졸업
*조부 함양 박씨 현암 박래순으로부터 신선주 비법 전수(18대 400여년 전통)
*1994.1.7. 충청북도 무형문화재 4호 지정. 기능보유자
*신선주 공장 창업했다가 폐업
*6녀 준미 이수자에게 비법 전수
*청주시 흥덕구 비하동에 신선주연구소 ‘현암재’ 건립
*청주시 상당구 낭성면 산성마을에 양조장 겸 복합문화공간 건축 중
*무형문화재 전수교육관 건립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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