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 예술사진 지평 연 원로작가… 늘 뒷전에 서 있는 겸양謙讓의 예술인
병마와 싸우면서도 사진과 시작詩作 활동 계속… 시사집詩寫集 발간 준비
‘선생님’이란 남들의 호칭엔 “제자 아닌 동호인일 뿐” 낮은 자세의 손사래

 
 
오고의 사진작가



사진술이 사진예술이되고, 예술의 한 장르가 된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아니다. 사진예술의역사를살펴보면영국의캐머런(1815~1879년)과 에머슨(1856~1936년) 등이 선구자의 반열에 올라 있고, 1902년들어 미국에서도 예술로서의 사진을 추구하는 사진분리파가 생겨남을 볼 수있다. 한국의 경우는 초상사진의 선구자인 서순삼(1899~1973년)이예술사진의영역을구축한것으로전해진다.

충북의경우 1900년 중반부터 명함에 ‘사진작가’를 표기한 낯선(?) 예술인들이나타나기시작했다. 그리고1970년대 들어 작품사진을 찍는 사람들의 활동이 눈에띄기 시작했는데, 그 중심에 오고의吳高義(77·청주시 서원구 모충동 삼호아파트102동1103호) 작가가 있었다. 그는청주 중앙공원 앞에 자신이 경영하는 ‘예그린사진관’에찾아들어현대사진예술-작품사진에관심이있는 사람들과 예술작품으로서의 사진이 되는데 따른 새로운 시도로 서로의 고민을 나눴다. 함께출사도하고 현상 인화를 하며다각적인접근과경험을쌓았다. 말하자면‘예그린사진관’이 현대사진예술연구소 역할을 담당한 아지트였다. 이 아지트는 20년간유지되다주인인오 작가가 70세 때문을 닫았다.

이때 이곳에 자주드나들던전예근·황원순‧공근수‧최복규‧임방순‧조유성‧김명택‧김성만‧김상훈‧정광의등 일군一群의 작가들이 충북의 사단寫壇을구축한원로, 중견 작가들이다.

실험 시리즈1
실험 시리즈1

 

월사금 못내 툭하면 교실서 쫓겨나
오고의 작가는 근래 들어 몇 차례의 병고를 치르면서 거의 사회활동을 하지 않고 있어 궁금해 하는 이들이 많았다. 혹시나 언론에 몸담고 있는 사람은 알까 싶어 내게 오 작가의 근황을 물어 오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그런데 4월 어느 날, 그는 미리 전화를 걸어 조심스럽게 방문의사를 밝히고 찾아 왔다.

오랜 병고로 거동이 불편한 것을 애써 감추며 원고 한 뭉치를 내밀었다.

경제개념이 없는 남편을 만나 평생 고생한 아내에게 전하고 싶어 생애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시사집詩寫集을 만들려하니 발문跋文을 부탁한다는 것이다. 64세 때 전립선암으로 수술한 후 5년 뒤 방사선 부작용으로 합병증을 앓고 넘어져 우측 어깨뼈가 으스러졌고, 그후 허리디스크를 수술하는 등 연이어 병상을 드나들면서도 대학 평생교육원 문예창작과를 다니고 병실에서 쓴 작품 등 100편이 넘는 시와 사진들이었다.

“최근 들어서는 글 한 줄 쓰기조차 힘이 든다”면서 잠시 앉아 있는데도 불편해 했다.

‘오고의’라는 조금은 별난 이름은 1943년 일제치하에서 태어나 ‘다께짱’이던 것을 해방이 되면서 우리말로 개명하다보니 ‘고의’라는 좀 생경한 이름이 됐다.

청주 대성동에서 정미소를 하던 부친 덕에 부유하게 자란 5남4녀 중 넷째아들이었다.

막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6.25 전쟁이 일어났다. 아버지는 북새통에 행방불명이 됐고, ‘정미소집’ 9남매는 순식간에 전쟁고아가 됐다.

청주 중앙초등학교에 들어갔으나 ‘월사금月謝金’을 내지 못해 툭하면 교실에서 쫓겨났다.

갈 곳이 없어 주변 산에 올라가 저녁 되기를 기다렸다 집에 오는 날이 학교 가는 날 보다 더 많았다. 한글과 구구단은 어떻게 깨우쳤는지 모르지만 후에 보니 알고 있었다. 그는 철이 들면서부터는 ‘10살 때의 기억’이 되살아나면 아무리 힘이 들어도 행복하고 만족하고 고마워진다고 했다.

10살이었을 때, 주변엔 아무도 없었고 먹을 것이 하나도 없어 하루를 굶었고 이튿날도 굶었고 내리 사흘을 굶었단다. 그런데 아무 것도 들리지 않고 눈앞은 안개 속처럼 뿌옇기만 했고 어떤 행동도 할 수가 없었단다. 그저 아득하기만 했는데 어떻게 기운을 차리게 됐는지 의식이 돌아와 눈을 뜨니 이웃 아줌마의 얼굴이 보였단다. 굶어 죽는다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를 처음 알았단다.

졸업하는 날도 몰라 가지 못했다. 그런데 오랜 뒤에 졸업자 명단에 이름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최종학력에 그래도 ‘국 졸’이라 떳떳하게(?) 적어 넣을 수 있다.


영업사진사에서 예술사진 작가로
10살을 넘어서면서 찹쌀떡 장사나 아이스케키 장사로 하루 한 끼 이상은 먹을 수 있었다. 그러다 14세가 되던 해에 아는 분의 천거로 ‘밥은 먹여주겠다’는 럭키사진관에 들어간다.

그리고 20년간 그 곳에서 ‘오 기사’가 되고 31세에 독립해 청주시 사직동에 ‘상당사진관’을 차려 독립한다. 그로부터 4년 뒤 청주 중앙공원 앞에 ‘예그린사진관’을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 그는 영업사진사에서 예술사진을 하는 작가가 되었고, 열심히 문학공부도 하여 소년시절의 꿈이었던 시인으로 등단도 했다. 29세 때 결혼한 부인 박영숙(72) 여사와의 사이에 아들(승훈·47·조선호텔 미술부)과 딸(승영·45·경기도 일산 거주)과 손주들을 둔 남부럽지 않은 할아버지가 되었다.

그러나 그 같은 가족사보다 ‘사진작가 오고의’로 널리 알려져 있는 그는 전국적으로 붐이 일고 있던 예술사진에 심취해 생업이었던 사진관 운영은 뒷전이었다. 뜻을 같이하는 작가들과 전국의 산하를 누볐고 남들도 모르게 대학 영상학과의 야간강의를 들으려 하루 걸러 서울을 오르내렸다.

그는 사진예술에 대한 이론적인 공부에 열심이었다. 그 같은 노력 덕분에 지역의 동호인들에게 사진예술에 대한 어제와 오늘과 내일에 관한 학문적인 이론을 전해 눈과 귀를 열게 하는 중심인물이 되었다.

실험 시리즈2
실험 시리즈2

 

카메라 메고 졸업앨범 찍던 ‘오 기사’
내가 오고의 형을 처음 만난 것은 고등학교시절이니 어느새 60년이 가깝다.

카메라를 메고 졸업 앨범에 넣고자 학교 행사사진을 찍으러 자주 오는 ‘오 기사’(교사들은 ‘오군’이라 불렀다)를 보면 우리는 그의 목에 걸린 카메라를 부럽고 호기심에 찬 눈으로 지켜보았다. 교실에 갇혀 꼼짝을 못하는 우리들에게 보라는 듯 멋진 포즈로 이런 저런 장면을 찍는 오 기사의 자유로운 일거수일투족이 못내 부러웠다. (그러나, 그때 ‘오 기사’는 교복을 입고 학교에 다니는 비슷한 또래의 우리가 얼마나 부러웠을 것인가를 이제 사 새삼 깨닫게 되지만…)

내가 신문기자로 밤낮 없이 뛰어다닐 때 우리는 행사장에서 자주 마주치게 됐는데 이미 잘 아는 처지여서 인사를 건넸고, 그 이후 내가 40대 젊은 나이로 충북예총 회장일 때 이미 한국의 중견 사진작가로 작품사진을 하러 전국 곳곳을 누비고 크고 작은 전시회에 내놓는 작품마다 수작秀作이어서 많은 이들의 눈길을 잡고 있었음을 곁에서 보아왔다.

후에 안 일이지만, 충북지역에서 사진작가 지망생들에게 길을 터 준 1인자가 바로 오고의 형이었다는 사실이 충북사단寫壇의 정평이다. 그리고 그에게서 사진을 배웠다는 많은 사람들-대한민국사진대전에서 대상을 수상한 민현석 작가며, 한국생태사진작가로 80대 할머니임에도 현역으로 인도네시아에 머물며 작품제작에 몰입하고 있는 조유성 작가, 청주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는 장광동 작가, 괴산사단을 일군 김춘수 작가, 음성사단을 일궈놓은 박옥희·박종주 작가 등 오고의 작가를 ‘선생님’이라 모시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그는 “그들이 제자냐?”고 물으면 대답은 “아니다”라고 단호하게 답한다. 그의 설명은 간단하다. “우리는 사제지간師弟之間이 아니라, 함께 사진을 공부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학문이든 예술이든 자칭 선생님이네 스승이네 하며 자신을 대가연大家然하며 우쭐대는 소인배들이 넘치는 세상에, 배운 이들은 ‘선생님’이라는데 정작 본인은 아니라며 손사래를 치는 이 기이한(?) 주인공이 바로 오고의 작가인 것이다. 그의 학력은 ‘국졸’인데 겸양지덕은 가히 ‘박사급’이다.

4월11일 동양일보가 주최한 ‘생태사진작가 조유성 곤충 사진 초대전’ 개관식장에서도 그러했다. 사진작가가 대부분인 200명이나 되는 하객들이 모여 모두 원형 한지 테이프 커팅을 하는데도 뒷전에서 이를 조용히 지켜보다가 바람처럼 사라졌다. 주인공인 조유성(84) 작가가 식이 끝나기가 바쁘게 찾아 나섰지만 그의 모습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식이 진행되는 동안 먼발치에 계신 것을 보았는데 금세 사라지셨다”는 조 작가는 “내가 40여 년 전 사진을 시작할 때 가장 큰 도움을 준 분이었다”고 회상했다.

그가 주고 간 시집 원고를 펼쳐 보았다.

이미 그의 시는 시적인 기교나 형식 따위에 얽매이지 않기로 작정한 듯하다.

살아온 삶의 양태樣態처럼 시행詩行은 진솔하고 꾸밈이 없다. 삶에 대한 애착이나 누군가에 대한 그리움의 샘물을 끊임없이 길어 올리며 자아를 살피는 심안을 닦는 모습도 여러 편에서 감지된다. 병상에서 지나온 길을 돌아다보며 아직은 아쉬운 심사를 정직하게 토로하기도 한다. 죽음을 앞두고 있는 뭇 생명들의 절실함도 직설적으로 토로한다.



온화한 품속입니다
명주실 한 타래로도 잴 수 없는 깊이
넉넉합니다

조금만 더 머물고 싶습니다
욕심 과하다고 탓하지 마시고
이제야 삶의 진한 맛을 알아 가고 있습니다


어젯밤 된서리는 꼿꼿한 자존심마저
구부려 놓았습니다.
당신이 주관하는 시간 위에
비굴한 추파를 던집니다

생의 연장을 위하여

                       -‘햇살’ 전문




그리고 인간이어서 심약하지만 이승을 벗어나면 들어서게 되는 저 세상에 대한 호기심과 궁금증은 여전하다. 인생 후반에 접어들면서 이어지던 병고의 아픔이 사라졌으면 하는 간절함도 숨기지 않는다.



두려움 반 설렘 반으로 노크를 한다.
한 조각 남은 양심마저 버리고
꽃 보러 왔다.


덥석 안아다 한 아름
촉감이 아기 볼이다
왜 찾아오는지 알 수가 없다
심장까지 파고드는 향기 때문인가
늘 새롭게 피어있는 꽃 때문인가


식물도감에서도 찾을 수 없는
천상의 꽃
그곳에는 늘 피어있다
꽃길을 거닐다 보면 참을 수 없던 아픔도
춤추던 맥박도 평온을 찾는다.

현대 의학으로도 풀리지 않는 그 이유를 모르겠다

                     -‘연구 중’ 전문



그의 생애에 렌즈 대면 ‘인간 오고의’ 만나
그러나 이 같은 시를 통해 그를 보는 것 보다는 그의 77년 생애에 렌즈를 대면 더욱 확실하고 또렷한 ‘인간 오고의’를 만날 수 있게 된다.

충북 지역에 사진예술의 새 지평을 열고도 생색 한 번 내지 않는 사람 오고의를, 전 생애를 통해 늘 감사와 고마운 사람들만 기억하고자 하는 사람 오고의를, 가난했어도 비굴하지 않았고 누구를 원망해 보지 않았던 사람 오고의를 우리는 오래 기억해야 한다. 그리하여 ‘학력은 국졸國卒이지만, 겸양謙讓과사진엔 박사博士급인 오고의 작가의 시사집 ‘빙점의 영혼이여’ 출간을 손꼽아 기다리게 한다.


■ 동양일보 회장·시인


■ 오고의吳高義 사진작가는…
* 1943년 청주생
* 1964년 개인사진전
* 1967년 개인사진전
* 1996년 <문학공간> 시 ‘새벽길’로 등단
* 1997년 사진집 <세월은 담을 넘어> 출간
* 1999년 도민대상수상(예술부문)
* 전 한국사진작협회충북지부장
* 전 예그린 대표
* 충청북도사진대전 초대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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