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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동네숨겨진이야기(47) 영동와인과 노근리 평화공원
우리동네숨겨진이야기(47) 영동와인과 노근리 평화공원
  • 동양일보
  • 승인 2019.07.04 15: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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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굴다리의 쓰라린 상처, 토굴에서 익어가는 치유와 화해
 
 
와인터벌, 술익는 향기가 나는 듯하다.
와인터벌, 술익는 향기가 나는 듯하다.

 

(동양일보) “나는 지금 별을 맛보았다.” 그게 그렇게도 황홀하고 맛있던가. 그래서 하늘의 은혜를 입고 땅의 기운을 받으며 사람의 정성스러운 손길이 더해질 때 고귀한 맛과 향으로 완성된다고 한 것인가. 낯선 풍경과 달콤한 사랑을 담고, 상처입은 삶을 치유하며 내 인생의 희망이 되는 그 맛, 바로 와인이다.

와인은 태고 적 원시림의 과일나무 웅덩이에서 시작된 인류 최초의 술이다. 그리스 신화에서 제우스의 아들 디오니소스로 등장하는 바커스는 생명과 대지의 풍요를 관장하는 신이었다. 바커스는 사람들에게 포도 재배와 와인 제조방법을 가르친 다음, 와인을 마시며 축제를 벌였다. 이때부터 그는 인간들에게 주신(酒神)으로 추앙받게 되었다.

성경 속의 와인은 또 어떠한가. 노아는 120년에 걸쳐 방주를 완성하고 150일간의 홍수가 끝난 뒤 신께 감사의 제물을 바치기 위해 포도원을 만들고 와인을 빚었다. 예수가 제자들과 함께 모인 최후의 만찬에서 와인을 들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며 이렇게 말했다. “이 빵은 나의 살이요, 이 포도주는 나의 피니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니라.” 그 때문에 와인은 성스러운 신의 선물로 간주되었으며 수도원에서 와인을 생산하는 이유가 되었다.

영동은 대한민국의 와인 주산지이다. 물 좋고 볕 좋으며 땅이 좋다. 이 때문에 포도를 비롯해 과일 재배 최적지로 알려져 있다. 이곳의 모든 과일은 알이 꽉 차고 달며 싱싱하다. 이왕이면 하늘이 내린 술을 빚자며 농민들과 행정기관이 마음을 모았다. 이곳에 폐굴이 많으니 술을 빚고 저장하며 발효시키는데 이만한 곳도 없으리라. 일제 강점기 때 탄약고로 쓰였던 토굴도 있고 6.25 때 피난동굴도 있다. 터널은 연중 13도 안팎의 일정한 온도가 유지되니 와인의 컨디션을 최상으로 유지시킬 수 있다. 영동의 와인이 맛좋은 이유다.

와인코리아는 옛 화곡초등학교 부지에 위치해 있다. 1943년 개교해 6.25의 아픔을 딛고 희망을 일구었던 곳이다. 2002년 폐교되면서 와인을 생산하는 곳으로 변모했다. 토굴이 위치해 있는데다 주변마을에 포도농장이 많기 때문에 안성맞춤이다. 붉게 익어가는 포도송이에 햇살이 머문다. 어디선가 술 익는 내음이 끼쳐온다. 포도송이 아래에서 와인 한 잔과 와인 족욕으로 삶의 여백을 만들고 싶다.


와인코리아 인근에 노근리 평화공원이 있다. 평화로운 산골 마을이 갑자기 살벌한 전선으로 바뀌면서 숱한 양민들이 미 1기병사단 병력의 지시에 따라 이리저리 헤매다가 속절없는 최후를 맞은 곳이다. 1999년 4월 <그대, 우리의 아픔을 아는가>라는 책이 출간되었다. 노근리에서 어린 아들과 딸을 잃은 정은용 씨는 일흔이 넘은 나이에 “지금 세상에 알리지 아니하면 영영 역사 속에 묻혀버릴 것 같아 글을 쓰기 시작했다”고 밝혔다.

노근리평화공원 조형물.
노근리평화공원 조형물.

 

노근리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1950년 7월 25일 전후한 시점에서 영동 일대는 대전을 점령하고 남하를 시도하는 인민군과 패주하는 미군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전선이 가까워지자 대전에서 김천 방면으로 통하는 도로변에 위치한 영동읍 임계리와 주곡리 주민들은 근처 산속으로 피란을 갔다. 그때 미군이 들어왔다. 미군은 피란을 시켜준다면서 모두들 산에서 내려오라고 했다. 주민들과 외지의 피란민까지 대략 7백여 명. 해거름 무렵에 출발한 피란민 행렬은 미군의 재촉에도 속도를 내지 못했다. 보리쌀 자루와 솥, 이불보따리를 짊어졌고 노인과 어린아이들이 함께 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얼마 가지 못해 밤이 되었다. 미군은 피란을 중지시켰다. 도로 밑의 강변으로 내몬 뒤 모두 엎드리라고 명령했다. 고개를 들면 총을 쏠 것이라고 엄포를 놓았다. 그날 밤 가까운 곳에서 인민군과 교전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총알이 날아가고 포격소리도 요란했다.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면서 악몽처럼 밤을 지샜다.

다음날 아침 미군의 명령에 따라 피란민 행렬이 4킬로미터 가량 나아가 노근리 근처에 다다랐을 때였다. 미군들은 탱크로 도로를 차단하고 정지 명령을 내린 다음, 피란 짐들을 앞쪽에서부터 검사하기 시작했다. 피란민들의 짐 검사를 끝낸 미군들은 어딘가에 무전기로 연락을 하더니 사라져버렸다. 그러자 곧 미군 폭격기가 날아와 피란민을 향해 폭탄을 떨어뜨렸다. 미군 폭격기는 20여 분간 폭격과 함께 기총소사를 했다. 현장은 삽시간에 아비규환 상태가 되었다. 철로는 엿가락처럼 휘었고 여기저기서 사람과 소가 쓰러졌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폭격을 피해 철로 밑에 있는 수로용 굴로 모여들었다. 폭격이 멈추자 미군 3~4명이 다시 나타났다. 그들은 “이제 진짜 안전한 곳으로 피란시켜 주겠으니 모두 나오라”고 말했다. 미군은 피란민들을 바로 1백여 미터 떨어진 쌍굴다리로 몰아넣었다. 쌍굴다리 밑에 약 4백여 명의 피란민들이 발 디딜 틈도 없이 꽉 들어찼다. 그런 상태에서 미군은 굴다리가 내려다보이는 양쪽 야산에 기관총을 설치하고는 무차별 사격을 가했다. 시체가 쌓이기 시작했다. 지옥이 따로 없었다.

노근리 사건은 오랫동안 역사의 그늘에 묻혀 있었다. 그런데 이 사건이 햇빛 아래 역사 속으로 드러나게 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것은 정은용이었다. 당시 경찰관으로 가족들을 두고 피난을 떠났던 정은용 씨는 나중에야 이 사건의 진상을 알게 됐다. 그는 1960년 10월 27일 노근리 사건을 상세히 기록해 미합중국 정부 앞으로 손해배상청구서를 보냈다. 그 후 1994년 봄 다시 사건의 진상을 정리한 실록소설 <그대, 우리 아픔을 아는가>를 펴냈다. 노근리 사건을 세상 밖을 나오게 하는데 큰 역할을 하게 되었다.

노근리 평화공원 주변에 포도밭이 싱그럽다. 와인이 익어가고 있다. 누구를 원망하려는 것이 아니다. 역사의 진실을 가슴에 새기자는 것이다.



■ 글·변광섭 문화기획자, 에세이스트

■ 사진·송봉화 한국우리문화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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