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어선 옥천 지용제전국 최고 문학제로, 이젠 시니어모델로 무대에

20대 선망하던 무대 꿈 접은 지 50여년70대 후반에 새로운 길 열어

노년에 더욱 빛나는 몸과 정신은 꿈과 열정과 용기로 무장되면 누구나 가능한 일

사진 / 조철호
사진 / 조철호

 

사람이 태어나 어린이-청소년-청년-장년-노인에 이르는 동안 육신과 정신세계의 변화는 참으로 다채롭다. 그래서 인생을 강물에 비유하기도 한다.

강물은 발원하여 바다에 이르는 동안 산하山河의 온갖 풍상과 맞닥뜨리되 흐름을 멈추지 않는다.

때론 산기슭을 굽이돌거나 바위허리를 휘감거나 갯벌과 백사장을 지나며 맺히고 머물고 맴돌다 다시 길을 찾아 흐름의 숙명에 순명한다. 그렇게 하여 강물은 끝내 바다에 이른다.

숨가쁜 흐름은 멎고 비로소 얻는 고요-.

충북 옥천에 가면 그런 사람 박효근(78. 충북 옥천군 옥천읍 문정리 207)씨가 살고 있다.

 

설밑에, 이제는 시니어 모델이 된 그를 찾았다.

그는 푸릇푸릇 몸에 물이 오르기 시작하는 스무 살에 무대에 서고 싶다는 꿈을 품었었다.

그래서 당시 유치진 선생이 이끌던 남산드라마센터에 들어가 1(당시 2년제)을 연극 공부하다 객지생활을 할 주머니사정도 어려워 군에 입대, 6관구사령부에서 병장으로 제대했다.

60년대, 가난한 시대였다. 많은 젊은이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꿈을 접고 낙향했다.

고향인 충북 옥천에서 30대를 맞았고, 35세에 JC회장이 된다. 이로부터 꼭 10년 뒤인 19877, 선대 JC회장들의 뒤를 이어 옥천문화원장이 되었다.

문화원장이 되자마자 가까이 지내던 한 신문기자가 옥천 출신 정지용(1902~1950)시인을 기리는 일이야말로 옥천문화원이 해야 할 현안사업이라 일러줬다.

정지용이라는 시인의 이름이나 그의 시 향수라거나 그의 생가 터가 옥천읍 하계리 40번지라는 것도 처음으로 들었다. 그 기자는 정지용 선생의 장남인 정구관(당시 59. 1928~2004)씨도 소개해 주었고, “오래지 않아 해금될 것이니 준비해야한다고 귀띔했다.

그런데 그 기자의 예견처럼 다음해인 1988년에 정부는 정지용 시인 등을 해금 했다.

해금과 함께 서울에서는 지용회가 결성되고 첫 지용제를 이 해 515일 개최했다. 이때 박 원장은 이미 옥천=정지용이 각인돼 있던 터라 지용제는 옥천에서 있어져야한다는 주장을 펴 지용회로부터 지용행사는 옥천서 한다는 양해를 받았다.

이에 따라 같은 해 625일 옥천에서 1회 지용제가 개최된다. 그래서 ‘1회 지용제는 한 해 두 번 치러졌다.

그로부터 박 원장은 정지용을 기리는 갖가지 사업을 펼친다. 지용시비가 건립(1989)되고 동상이 건립(1990)되었으며, 지용신인문학상(1995)이 제정되고, 생가가 복원(1996)됐다.

중국연변에서 1회 연변지용제가 시작(1997)되고, 연변 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 지용의 시향수가 수록되기에 이른다. 테너 박인수 교수와 음유가수라 일컫는 이동원이 함께 부른 향수는 국민가요가 됐다.

첫 지용제를 치른 이듬해, 시비를 세우자는 제안이 곳곳에서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남모르게 보아둔 좋은 돌을 기억하고 있었다. 보은 속리산 뒤편 계곡에 있는 작지도 크지도 않은 자연석이었다. 그는 어느 날 밤, 지인 몇과 크레인을 장착한 트럭을 끌고 가 그 돌을 싣고 왔다. 거기에 한국 최고의 서예가 평보 서희환 교수가 쓴 향수를 음각으로 새겨 넣었다. 반달형 화강암 강돌은 예쁜 시비가 되어 현 관성회관 앞에 세워졌다. 지용의 1호 시비가 탄생한 것이다. 뭇 시인들은 대한민국에 있는 시비 중 가장 아름답고 단아한 시비로 이 비를 꼽는다.

이 같은 지용을 기리는 갖가지 사업들이 그가 문화원장을 하는 15년간 끊임없이 어기차게 이어지고 이뤄진 일들이다. 그는 누가 뭐라해도 지용을 세상에 알리는데 가장 많은 땀을 흘린 문화원장이 됐다.

그래서 문화원장을 그만둔 2001년 이후 오늘까지도 그는 박 원장으로 불린다.

그는 원래 체육인이었다.

대전고 재학시절 레슬링과 보디빌딩으로 미스터 충남에 선발되기도 했던 그는 1990년 복서 이열우를 WBA,WBC챔피언으로 키워내기도 했다. ‘뽀빠이이상용(77)은 그의 대전고 1년 후배 보디빌더로 지금도 1년에 한 번은 옥천에 들러 서로의 우정을 확인하기도 한다.

그는 이미 30년 전부터 옥천에 골프연습장을 운영해오고 있다. 충북에서 군 단위 골프연습장으로는 처음이었다.

현 옥천공설운동장 옆(금구리)에서 골프장을 만들어 13년간을, 현 옥천읍 문정리 207 마성산 초입에 옥천골프랜드를 개업(2003)한지 17년째 운영하면서 언제나 쉬지 않는 몸만들기는 고등학교 때부터 줄기차게 이어오는 하루 일과가 되었다.

그는 기상하면서 108배를 시작으로 아령과 역기로 1시간 이상 근육을 키우고 집 뒤 마성산을 오른다. 하루 2시간 이상을 운동시간으로 할애한다.

이 같은 노력은 60년간 키 167, 62체중 유지를 가능하게 했다. 그래서 80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근육질의 사나이가 가능했고, 끝내는 꿈에 그리던 무대에 올라 시니어 모델의 새로운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주게 되는 것이다.

 

경부 고속도로가 발밑에, 눈을 들면 옥천시내가 시원하게 내려다보이는 마성산 초입 언덕에 자리한 옥천골프랜드에 들어서니 한낮인데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스윙에 열중하고 있었다.

-이제 박 원장에서 모델 박으로 불러야하는 것 아닌지요.

하하하...요즘 기분이 베리 굿입니다. 오랜 세월 가슴에 한처럼 서려있던 무대에 오르는 꿈80을 바라보는 나이에 이뤄질 줄은 생각지도 못했어요. 인생사 새옹지마라더니, 요즘엔 기분이 좋아 살만합니다.”

-모델이 되고자 마음먹은 직접적인 동기가 있다면.

실은 연극을 하고 싶었어요. 고등학교 졸업하면서 고대 사학과를 지망했는데 떨어졌지요. 그래서 하고 싶었던 연극을 하려고 드라마센터에 들어가기도 했지요. 그 이후 고향에 내려와 평생을 문화와 체육 관련한 일들을 하면서도 마음 한켠엔 늘 무대에 오르고 싶은 간절함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3년전, 60대 중반에 모델로 데뷰하여 런웨이를 멋지게 행진하는 김칠두 씨를 보았어요. 그 때 갑작스럽게 내 심장이 뛰는 거예요.

, 저것이다란 결단이 번개처럼 뇌리를 스쳤지요. 하루도 빠짐없이 몸을 만들어 온 내게, 꼭 맞는 옷을 입었을 때 오는 희열 같은 것이랄까 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모델이 되는 길을 인터넷 등을 통해 찾기 시작했습니다. 지난 해 3, 대전 대덕대 모델학과에서 운영하는 평생학습반 5기 초급반(3개월)을 수료한 것이 시작이지요. 현재 중급반을 마쳤습니다. 올 해는 고급반에 들어가려 합니다. 그 코스를 수료하면 신설될 것으로 알려진 메이저 반 까지 끝내고 싶습니다.”

-모델이 되려면 무엇을 배웁니까.

“‘벽서기부터 배웁니다. 스트레칭은 필수고, 그 다음이 벽에 어깨와 엉덩이와 발뒤꿈치를 붙이고 10분 전후를 서 있는 훈련을 합니다. 생각보다 힘든 훈련입니다. 몸과 자세를 가다듬는 기본인데 한참을 하고 있으면 온몸이 덜덜 떨리고 흩어지려는 자세를 바로잡는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를 체득하게 됩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자세 교정이 제대로 되어야 이미지 메이킹과 워킹, 그리고 무대연기 등을 익히게 됩니다. 그렇게 한 후 작은 패션쇼 무대에서 런웨이 경험을 쌓게 됩니다.”

-지난 해 124일 저녁 대전 BMK웨딩홀에서 열린 대덕대 평생교육원 시니어모델 패션쇼가 첫 데뷔무대인가요.

그런 셈이지요. 1기에서 6기까지의 수강생 60명이 무대에 올랐는데 이 패션쇼의 추진위원장이 되어 김태봉 총장과 성차용 평생교육원장, 임주완 학과장과 90년대 슈퍼모델 김민옥 교수의 절대적인 후원이 첫 선을 보인 행사를 빛나게 해 주었습니다. 무대에 오른 중노년기의 우리 모두는 초등학교시절 학예발표회에 나갔을 때의 설레임과 가슴 벅찼던 행복감을 다시 맛보았습니다.”

-어떤 패션을 선보였는지요.

평상복과 청바지, 예복을 갈아입으며 무대에 올라 행진을 합니다. 무대 뒤에서 모델 60명이 옷을 갈아입느라 법석을 떨고, 옷매무새를 매만지고 무대에 오르면 함성과 박수소리와 카메라 플래쉬 불빛에 눈이 부시면서 일 거수 일 투족에 온갖 신경이 곤두섭니다. 전신을 싸고도는 흥분과 전율은 뭐라 표현할 수 없는 야릇한 행복감을 안겨다 줍니다. 아마도 무대인들은 이런 짜릿함 때문에 평생 열정을 바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시니어모델이 되려면 어떤 규정이 있는지요.

시니어 모델의 연령군50대부터 70대 후반까지로 건강한 남녀면 일단 자격이 됩니다.

남 앞에 서서 자기의 모습을 당당하고 멋지게 보이려는 꿈과 열정과 용기만 있으면 노년기의 가장 아름다운 도전이 아닐까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몸을 만들고, 멋과 낭만을 아는 정신으로 무장되어야합니다. 지난해의 시니어패션쇼 출연진 중 내가 가장 나이가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그 누구 못지않은 에너지로 행사를 주도 했습니다. 인생은 유한하고 노년기는 갈수록 길어집니다. 인생의 황혼기에 주름살만을 탓하는 무기력에서 벗어나려면 부단한 활동이 따라야 합니다. 그래야만 당당한 자신과 자신을 보는 타인들의 신뢰를 유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지막 전하고 싶은 말은.

나의 젊은 시절은 정지용 시인을 알리는 일에 몰두했습니다. 한때는 정치입문도 꿈꾸며 군수 출마도 해 보았으나 내게 맞는 길이 아니었습니다. 고향에서 많은 선후배들의 아낌으로 이만큼 살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릅니다. 70년이 넘게 살아보니 이제까지의 삶 보다 앞으로의 삶이 어떤 양태로 방향을 잡아야할지가 대략은 그려집니다.

내가 새로운 모델 인생을 살고자하는 것은 돈을 벌고자함이 아닙니다. 속없는 건달처럼 희희낙락 남은여생을 소모하고자 함도 아닙니다. 내게 건강하고 남 앞에 서는 용기와 용모가 있다면, 그 같은 나의 것들이 남들에게 필요하게 된다거나 기쁨을 주게 된다면 기꺼이 건네주겠다는 생각입니다. 요즘 흔히 하는 말로 하자면 인생 후반부에는 시니어 모델로서 할 수 있는 한 재능기부를 모두 하고 싶습니다. 겉과 속이 빛나는 노년이 되어 나이를 뛰어넘는 본때를 보여주고 싶습니다. 건강하고 멋지게 10, 20년을 이렇게 살고자합니다. 격려해 주십시오.”

 

그는 1974년 결혼한 아내 (권금자 .75)와 장녀(선영. 45. 대전거주)차녀(선주.42. 인천거주)3(선경. 40.대전거주)가 있는데, 평생을 아내가 집안일과 골프연습장 관리를 도맡아 해주고 있어 고맙고 미안하다 했다.

-새 해 더 멋진 모습 보여 주길 기대합니다.

동양일보 회장. 시인.

 

 

박효근朴孝根씨는

*19421129일 충북 옥천군 옥천읍 서대리 서당골서 출생
*옥천 삼양초-옥천중-대전고(1961)
*옥천JC 회장(1977)-옥천체육회 전무(1981)
*옥천문화원장(1987~2001)
*1지용제개최(1988)
*지용기념사업회장(1994)
*1회 연변지용제 개최(1997)
*충북문화원연합회장(1998)
*충북 마스코트(캐릭터)공모 최우수상(고드미,바르미)수상(1999)
전국 캐릭터 선호도 1위 입상
*대덕대 평생교육원 주최 1회 시니어모델 패션쇼 추진위원장(2019)

*주소:충북 옥천군 옥천읍 문정리 207 옥천골프랜드 043)733-9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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