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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어있는 문화재 베일을 벗기다(4) 사명대사의 길 충북-1
숨어있는 문화재 베일을 벗기다(4) 사명대사의 길 충북-1
  • 동양일보
  • 승인 2020.03.05 2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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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식 충청북도문화재연구원장
신륵사 사명당벽화
신륵사 사명당벽화

 

1.사명대사 벽화
1592년 임진왜란 개전초기에는 조총이라는 신무기로 무장된 왜병들이 경쟁하듯 조선의 국토를 유린하여 20여일 만에 수도 한양이 함락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명나라가 개입하였고 결국 이 전쟁은 조, 명, 일의 국제전 양상으로 확산되는 국면을 맞게 된다. 그러나 이순신의 해상권장악으로 보급로가 차단되고 의승병들의 격렬한 활동으로 왜군들의 기세가 꺾이면서 강화를 조건으로 철수하게 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강화조건으로 내세운 조선팔도 분할과 같은 터무니없는 요구사항을 수용할 수 없었던 조·명은 왜장 고니시 유키나와와 밀약을 맺어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기만하는 허구적 내용의 강화조약을 작성하게 된다. 일본막부에 전달된 이 강화조약이 허구임이 밝혀지면서 일본이 재침입한 것이 정유재란이다. 우리는 일본의 침입을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구분하는데 비하여 일본에서는 문록과 경장의 난 이라고 한다. 이 전란은 조선왕조의 정치체계와 사회경제적 기반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고 그 후유증은 조·명·일 삼국 모두에게 엄청난 여파와 변화를 가져왔다. 반면 일본은 전란 동안 심수관, 이삼평으로 대표되는 수많은 조선도공들을 집중적으로 납치하여 전후 일본 도자기 산업이 크게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에 일본에서는 임진왜란을 도자기 전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본회에서 살피고자하는 사명대사(이하 사명당으로 칭함)는 일본에서는 송운대사로 널리 알려졌고, 그의 유묵들이 큐슈의 구마모토시에 위치한 혼묘지라는 사찰에 소장되었는데 이 절은 조선침략의 선봉장인 가토 기요마사의 원찰이기도 하다. 1594년 4월 울산의 서생포 왜성에서 사명당과 만난 가토 기요마사가 “조선에 어떤 중요한 보물이 있소?” 라고 묻자 사명당은 “우리 조선에서 제일 큰 보물은 당신의 목”이라고 답하여 적장을 놀라게 하였다. 적진에 단신으로 들어가 이렇게 당당하게 훈계한 대목에서 사명당의 배포와 기개가 잘 나타난다고 하겠다.

혼묘지 소장 사명당 친필
혼묘지 소장 사명당 친필

 

사명당은 의승군을 이끌어 평양성탈환을 비롯하여 여러 차례 전투에서 큰 공적을 세웠을 뿐만 아니라, 1604년 선조의 명에 의해 탐적사가 되어 일본에 건너가 3천여 명의 조선인 포로를 귀환시키는 등 뛰어난 외교적 수완을 보였다. 왜란 때 사명당은 스승인 휴정 서산대사에 이어 조선팔도의 승군을 총괄하는 팔도도총섭이 되었다. 사명당이 이루어낸 탐적사의 활동과 역할은 훗날 도쿠가와 이에야스 막부의 간청으로 재개된 “조선통신사”의 선례가 되어 일본과 약 250년 동안 평화적인 문화교류의 시대를 열게 되었다.

필자가 사명당에 관하여 관심을 갖게 된 것은 2006년 10월 동국대학교에서 개최된 “사명대사추모학술대회”에서 사명당벽화에 관하여 발표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이 주제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의외로 충북지역에서 사명당과 관련된 유적이 산재하여 있음을 알게 되었다. 사명당은 생전에 자신을 “오대산인五臺山人”으로 칭 하였고, 주로 활동한 지역이 묘향산과 오대산 등 강원지역에 국한되었던 것으로 인식되어 왔다.

본회에서는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사명당과 충북의 연고 및 유적을 살펴봄으로 우리지역에서 사명당의 행장을 새롭게 조망해 보고자 한다.

신륵사는 제천시 덕산면 월악리 803번지에 위치한 대한불교조계종 법주사의 말사이다. 신륵사에는 보물 제1296호인 삼층석탑과 극락전(충북도 유형문화재 제132호)이 월악산 남록에 자리하여 신라시대 이래 지금까지 법등이 이어진 고찰이며 고즈넉한 산사이다.

2004년 충청대학교박물관은 제천시의 의뢰로 신륵사 극락전 내외부에 시화된 단청과 벽화를 정밀조사 하여 모두 136점의 벽화와 150매의 단청문양을 확인 하였다. 이들 벽화와 단청문양은 2009년 충북도유형문화재 제301호로 지정되었다. 문화재지정에 있어서 건물 등이 지정되면 그에 따르는 부재들은 별도로 지정하지 않는데 비하여 신륵사의 벽화와 단청은 극락전과는 달리 별개의 지정을 받을 만큼 뛰어난 예술적 가치와 문화재적인 가치가 높게 평가되고 있다.(충북에서 지정된 유일한 단청 및 벽화 문화재이고, 전국적으로 따져도 단청 자체가 문화재로 지정된 사례는 울산의 신흥사 구 대웅전 단청반자 외에는 존재하지 않아 희귀성이 있다 하겠다.) 전기한 학술조사에서 극락전 우측외벽 상단에서 사명대사행일본지도(泗溟大師行日本地圖)라는 화제(畫題)가 또렷한 벽화를 확인하였다.

당시 조사단에서는 그림의 내용과 화제에 의거하여 사명당이 일본에 상륙하는 장면을 그린 것으로 발표하였다. 이와 유사한 자료가 1604년에 제작된 사명당의 일본상륙행렬도를 그린 8폭병풍(경남도 유형문화재 제274호)이 밀양 표충사에 소장되어 있지만 벽화로는 신륵사의 것이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것이다. 발표가 나가자 많은 언론에서 톱뉴스로 보도하였다. 이것은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충청도의 이름 모를 산사에서 임란의 영웅으로 오랫동안 우리민족에게 각인되어 왔던 사명당이 벽화를 통해 우리 곁으로 성큼 다가왔기 때문 일 것이다.

신륵사전경
신륵사전경

그렇다면 사명당과 신륵사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신륵사 사명당벽화에 등장하는 인물은 대략 98명이고 말은 13필이 보이고 있으며 벽화 상단의 좌측에 읍성으로 추정되는 성곽이 휘장과 더불어 보이고 있다. 이 성곽이 어느 성을 표현한 것 인지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벽화가 위치한 신륵사에서 멀지 않은 충주는 왜란 이후 재게 된 통신사의 경유지로 반드시 거치게 되는 곳으로 조선 초기부터 관찰부를 두어 인근의 제천, 단양, 영춘, 청풍, 연풍, 음성의 7개 군현의 행정을 관할하였기 때문에 벽화에 보이는 성곽은 통신사의 중요 경유지인 충주읍성일 개연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사명당이 1604년 왕명을 받아 탐적사로 일본을 향하는 노정에서 지은 단양전사야회(丹陽傳舍夜懷)라는 시에서 “단양성벽의 높은 곳에 올라 고독한 마음으로 하늘의 별을 보며”..... 라는 시를 남기고 있어 사명당의 일본행로 과정에서 단양의 읍성에 머물렀음이 확실하다. 또한 사명당의 詩에 유죽령(踰竹嶺)이 있음을 볼 때, 사명당의 남행은 한양을 출발하여 충주까지는 남한강의 수로를 이용하고 월악산의 동창에서 하선 후 단양의 죽령로를 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신륵사는 충주에서 단양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이 노정에서 사명당이 신륵사에 들렸을 개연성이 충분하기 때문에 그의 행적이 후대에 벽화로 조성되었다고 이해된다. 따라서 벽화에 보이는 성곽은 단양성일 가능성이 높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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