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으론 ‘보리’를 그리지만 마음으론 ‘고마움’을 그립니다”

박영대 화백

날카로운 독수리 조각상이 놓여있는 중앙계단에는 빨간 카펫이 깔려있다. 밟고 올라가기가 부담스럽지만 이 계단을 지나 13층으로 오르면 갑자기 정면에 조명을 받은 두 점의 그림이 나타난다. 눈이 부시다. 청맥(靑麥)과 황맥(黃麥)-. 바로 오늘의 송계 박영대(松溪 朴永大·80)화백을 있게 한 보리그림이다. 잠시 숨을 돌리며 그림 앞에 서면 봄의 약동과 푸른 바람, 뜨거운 여름 햇빛, 거센 비바람들이 생명의 율동이 되어 온전히 가슴으로 전해져 온다.

올해로 화가 외길 인생 80년이 되는 그의 이야기를 듣고자 천안시 백석대학교내에 위치한 보리생명미술관을 찾았다. 그는 2017년부터 이 학교 석좌교수로 있다.



-대학이 한 개인작가를 위해 전시관을 마련했다니 놀랍습니다. 박 선생님의 작품세계 변화를 한 눈에 볼 수 있으니까 의미도 있고요.”

“제가 복이 많은 사람입니다. 이 나이 되어 뒤돌아보니 저의 노력보다 고마운 사람들의 마음과 인연으로 여기까지 온 것 같습니다. 목요일마다 이곳을 오는데 올 때마다 새로워요. 작업실도 크고 전시관이 넓어서 큰 작품들을 맘껏 걸 수 있어서 행복합니다.”

-모두 몇 점이나 되는지요.

“150여 점쯤 대학에 기증했는데, 한 번에 다 걸 수 없으니까 주제별로 돌려가며 전시를 하고 있어요. 전시관이 학내에 있지만, 소문이 났는지 국내외에서 많은 분들이 찾아오시네요.”

-올해 산수(傘壽)가 되셨습니다. 그림은 언제부터 그리셨나요.

“초등학교 때 담임선생님이 칭찬해 주신 게 평생 제 길이 되었네요. 청주상고 미술교사로 근무하다가 40세 되던 해 사표를 던지고 무작정 서울로 갔어요. 그 세월이 그새 40년이 되었네요.”

-직장을 떠난다는 것이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텐데 계기가 있었나요?

“한(恨)이 있었어요. 보리그림으로 제 이름이 화단에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할 무렵, 어느 작가가 자기가 보리그림의 원조라며 시비를 걸기 시작했어요. 여기저기 대놓고 말을 하더니 미술잡지에 제 작품 평을 써준 사람에게까지 누굴 시켜서 항의를 했다는 거예요. 그런데 지역에서도 섭섭한 일이 생겼어요. 청주의 모 갤러리에서 그 작가의 그림을 초대해 전시하며 보리그림의 원조라고 홍보를 한 거예요. 그러니 제가 어떻겠어요. 속이 뒤집어지지, 억울하지. 청주에 있으면 내 삶이 그대로 묻힐 것 같았어요. 고향에서 이렇게 대접을 받느니 떠나자. 서울로 가자. 서울로 가서 당당히 실력으로 인정받자. 그래서 사표를 냈어요. 그때가 제 나이 마흔. 결정이 쉽진 않았지요. 누가 오라는 것도 아니고, 미래가 보장된 것도 아니고, 앞으로 어떻게 먹고 살아야할지, 아이들은 어떻게 가르쳐야할지, 그러나 그런 걱정보다는 제 안에서 끓어오르는 열정을 가라앉히기가 더 어려웠어요.”

-원조논란은 해결되셨어요?

“오래된 얘기죠. 그게 그렇더라고요. 제가 말하지 않더라도 자연스럽게 알려지게 되었어요. 최열 평론가가 가나아트 잡지에 그 작가의 평을 쓰면서 박영대 화백의 보리그림을 베꼈다고 쓴 거예요. 그게 미술계를 확 뒤집어놓았지요. 지금은 그 사건으로 제가 더 성장할 수 있었다고 웃습니다. 저는 정규대학을 나오지 않았어요. 고등학교 졸업 후 독학으로 교육학과에 합격돼서 교사가 된 것이죠. 그런데 옆에 앉았던 여선생님이 서울로 대학원을 다니는 거예요. 부러워하니까 ‘늦지 않았어요. 박 선생님도 공부하세요. 서울가보니까 모두 직장생활하면서 공부를 해요’라며 정규과정이 아니더라도 연구과정이 있다고 알려주었어요. 그래서 홍익대 대학원에 입학을 했지요. 새로운 것을 배운다기보다 자극을 받기 위해서였어요. 당시 청주에는 홍익대 동문들이 꽤 있어서 그들끼리 모임을 하였는데, 저는 정규과정이 아니라고 넣어주지 않았어요. 외로웠죠. 아마 학교를 그만두고 뛰쳐나가게 된 데는 그런 것도 한 요인이 되었을 거예요.”

-외로움이 그림으로 승화되었나 보네요.

“서울은 낯설었지만 편했어요. 아는 사람도 없고 오로지 그림과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었으니까요. 종일 그림을 그리고 일주일에 한 번씩 서점에 가서 책을 보고 인사동에서 열리는 좋은 전시와 학술대회에 빠짐없이 가보고 학술원, 예술원 회원들, 대학교수들과 만나 열심히 이야기 듣고, 틈틈이 영어학원도 다니고 일본어공부도 했죠. 그랬더니 서울간지 2년 만에 인사동 전시관에서 초대전을 열어주데요. 일종의 데뷔전이었죠. 120호짜리 작품들을 걸었는데 그 전시관에서 모두 팔아주었어요. 그리고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어요. 그렇게 17~8년간을 고독과 싸우며 지내다보니 공부가 취미가 됐어요. 전시 때문에 일본을 가도 서점이나 고서점 순례는 빼먹지 않으니까요. 그때 익힌 일본어는 요즘 요긴하게 써먹고 있고요.”

-보리얘기를 나눠야겠습니다. 어떻게 보리라는 소재에 일생을 걸게 되셨는지요.

“보리를 처음 그린 것은 73년도였어요. 홍익대 대학원에서 박생광 조복순 두 분을 은사로 모셨는데, 이분들은 다른 화가들이 먹으로 산수를 그리던 시기에 채색화를 고집하던 분들이셨어요. 이 분들의 영향으로 채색화에 눈을 떴어요. 그때 푸른 보리가 떠올랐어요. 보리는 모두가 가난했던 시절, 백성들의 생명을 살리던 소중한 곡식이었죠. 알곡 하나하나가 생명을 지닌 씨앗이자, 희망이자, 고향의 뿌리같은 것이었습니다. 저는 풋풋한 연둣빛 보리를 그리기 시작했어요. 그것이 아마 사람들 눈에 신선하게 보였나봐요. 남들은 전통적인 소재인 동물이나 새를 주로 그리는데 저는 푸른빛 풀을 그리니까. 그 보리로 75년 국전에 첫입선을 했어요. 이어 78년도 백양회 공모전에서 최고상과 한국미술대상전 국전, 동아미술대전, 중앙미술대전(국립현대미술관)에 입상하면서 보리작가라는 별칭을 얻게 되었지요.”

-‘보리’와 ‘박영대’라는 이름이 한 몸이 되었어요. 그래서 일부에서는 화백님이 ‘보리’라는 소재에 함몰되는 것이 아닌가하는 우려도 있었죠.

“물론예요. 보리그림이 유명해지면서 ‘박영대’ 하면 ‘보리’로 각인이 됐으니까요. 사람들은 보리와 나를 꽁꽁 묶어놨어요. 보리가 아닌 다른 소재의 그림을 그리면 내 그림이 아니라고 했어요. 보리와 저는 운명적으로 만났지만, 점차 고민을 하기 시작했어요. 사실 세밀한 사실화는 제 취향이 아니거든요. 붓놀림을 푹푹푹 대담하고 자유분방하게 하는 것이 제 취향인데 청맥이나 황맥 같은 작품은 사실화에 가깝게 그리려다 보니 세밀하고 집약적인 노력이 필요한 그림들이었죠. 저는 그것에 만족할 수 없었어요. 저를 아끼는 선배들도 ‘이제 보리 졸업하고 새로운 것을 그려라’ 라고 충고를 했고요. 떨쳐야 되겠다. 보리를 넘어야겠다. 그래서 그린 것이 맷방석시리즈였어요. ‘흙’시리즈도 그렸죠. 그리고 계속해서 ‘향(鄕)’ ‘생명’ ‘나무’ ‘율(律)’ ‘묵흔(墨痕)’ ‘보리-생명’ ‘태소(太素)’시리즈 등 새로운 작품들을 그리고 있습니다.”

-전시관에 전시된 작품만 보더라도 많은 변화가 보입니다. 추상으로 갈수록 강렬한 힘이 느껴져요. 저는 개인적으로 보리의 생명의 파장을 나타낸 ‘율(律)’시리즈에서 강한 에너지를 감지했습니다. 또 최근에 천착하고 계시는 ‘태소’시리즈도 깊은 울림이 느껴집니다.

“태소는 한국화가 갖는 한계를 벗어나 보자는 의도에서 시작했어요. 작업실에서 수없이 실험을 하며 그리다보면 그림들이 산더미처럼 쌓이는데 이것들을 버릴 수도 없고, 그렇다고 똑같은 주제를 반복할 수도 없고. 그러다가 문득 이 작품들을 씨앗으로 삼아 또다른 작품을 만들어보면 어떨까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그리는 보리가 형상이 생기기 이전, 보리라는 형태가 생기기 이전, 태초의 원류가 있었을 것 아닌가, 엑기스(진액)가 있었을 것 아닌가라는 생각에 그림을 구기고, 찢고, 다시 부치면서 콜라주와 같은 혼합기법으로 작업을 해봤어요. 그리고 아크릴, 한국화 안료 등 여러 재료들을 바르다보니 서양화처럼 입체가 생기면서 새로운 작품이 탄생되었어요. 태소는 언뜻 보면 서양화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서양화와는 다른, 한지가 주는 농담(濃淡)이 그림에 배어나지요. 이 그림을 유럽 전시회에 제출했는데 재료가 주는 느낌이 달라보였는지 현지인들이 많은 관심을 보였어요. 최근엔 100호짜리 태소를 100여점 이상 그렸네요.”

-91년 일본 동경전에서 나무시리즈로 대상을 수상도 하셨지만, 일본 작가들과 관계도 남다르신 것 같던데요.

“40년 전 학교를 그만두고 나올 때 한 선배가 주관한 한일전시회에 참여하게 됐어요. 몇 년 참여해 보니 한국측 작가들의 수준이 낮은 것 같아 부끄러웠어요. 이제 그만 갈까 하다가 일본작가 오구라 유이치 씨와 필담을 나누며 이렇게 하면 안된다. 한국에 좋은 작가가 많다. 제대로 된 현대미술 한일전을 해보자 제안을 했지요. 오구라 유이치 씨가 좋다, 같이 하자고 동의를 해서 제가 기획한 대로 한일전을 열게 되었어요. 제가 먼저 일본작가들을 초청했지요. 그게 95년도 일이었어요. 서울서 전시하고 그 다음 해엔 동경 긴자에서 전시하고 지금도 하고 있어요. 24회 쯤 될거예요. 매년 양국에서 50명씩 100명 이상 참여하다보니 한일전은 한국에서도 모르는 사람이 없고 긴자에서도 유명해요. 그렇게 11년 동안 회장을 하다가 지금은 후배에게 넘겨줬어요. 한일전 덕에 저는 일본에서 좋은 분들을 사귀게 되었어요. 몇 분을 소개한다면 스즈키 마사히로 화가. 지금은 세상을 떴는데 이 친구가 큰 도움을 줬어요. 긴자의 유명화랑을 소개해서 무료로 초대 전시회를 열게 해줬지요. 시라오 유지 회장. 이 분은 2005년에 만났는데 지금 90이 넘으셨어요. 일불 현대 작가전이라는 이름난 국제 신미술관 단체를 움직이는 리더로 매년 일본 국립 동경도립미술관에서 행사를 여는데 그 분 덕에 저도 전시를 하게 됐어요.”

-군마현(群馬) 다테바야시(館林市)와도 인연이 있으시다고요.

“3년 전 싸롱블랑전시에서 조각과 그림을 하는 시모가와 마사루 씨를 만났어요. 나보다 6살 작은 74세인 이 친구가 제 작품을 보고 다테바야시장을 소개했어요. 그리고 천왕의 장인인 쇼다 씨를 소개해 줬어요. 쇼다 씨는 120년째 된 일청(日淸) 제분회사를 운영하는데 보리로 간장, 맥주, 과자를 만드는 회사였어요. 국제헌법재판소장, 외교관을 지냈는데 천왕과 사돈이 되면서 누가 될까봐 사표를 냈다고 했어요. 쇼다 씨에게 화집을 선물했더니 2시간 동안 꼼꼼히 보는 거예요. 얼마나 고마운지. 마사루 씨 덕분에 요미우리 신문이 만드는 월간 생활문화정보지에 1년 동안 제 작품을 표지화로 내기로 했고요. 그리고 이번 6월에 동경미술대 교수 5명과 한국 작가 5명이 합동으로 동경에서 전시를 하고, 9월엔 백석대에서 전시를 할 계획이었는데 코로나로 모두 미뤄지게 되었네요. 그런데 정말로 잊지못할 분은 재일동포 화가 송영옥 선생님이에요. 송 선생님은 제주 출신으로 식민지 시절 오사카에서 미술학교를 마치고 작가활동을 하신 원로 화가로 재일동포 화가들로부터 존경을 받으신 분인데 이 분이 저를 동경전에 이끌어주셨죠. 99년에 돌아가셔서 이젠 뵐 수 없지만, 광주시립 하정웅미술관과 영암군립 하정웅미술관엘 가면 이 분의 작품을 볼 수 있어요.”

-송영옥 화백은 분단시대 아픔을 그렸던 분이죠. 3년 전 탄생 100주년 회고전이 광주에서 열렸던 것으로 알고 있어요. 화백님도 국내외 전시활동은 여전하시죠.

“작년까지는 국내전시를 많이 했어요. 가나인사아트센터에서도 매년하고 있고요. 그런데 근래들어 외국일이 계속해서 연결되고 있어요. 작년엔 한국대표로 비엔나에서 열리는 오스트리아 컨템퍼러리 국제아트페어전에 6점을 가지고 갔었는데 4일간의 전시에 3만 명의 관객이 찾아와서 놀랐어요. 발디딜 곳이 없을 정도로 몰려드는 관객이 부러웠어요.”

-하루 몇 시간이나 붓을 잡으시는지요.

“밥먹고 잠자는 시간 외에는 그림을 그립니다. 8시간도 그리고 12시간도 그립니다. 젊을 때보다 더 열심히 해요. 나이가 들고 보니, 팔기위해, 전시하기 위해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살면 얼마나 살까, 붓 잡을 힘이 있을 때, 움직일 수 있을 때 최선을 다해 그리자 생각합니다. 이제 헤맬 시간도 실험할 시간도 없어요. 돈을 바라거나 명예를 더 찾을 필요도 없지요. 엊그제 장종현 총장님(백석대 설립자·목사)을 만났는데 ‘예수님은 삯을 바라고 일하지 마라’ 하셨다고 말씀하시더군요. 그 말에 감동이 돼서 다시 열심히 그리고 있습니다.”

-종교는.

“기독교입니다.”

-건강관리는 어떻게 하세요.

“따로 운동은 하지 않고, 그림 그리다가 힘들면 두팔 후려치기를 하면서 몸풀기 운동을 합니다.”

-더 하시고 싶은 말씀은.

“나는 살면서 손을 꼽을 수 없을 정도로 좋은 분들을 많이 만났어요. 전업작가로 나선 후 가정경제가 어려울 때 나를 지지하며 묵묵히 따라준 아내와 아이들, 전국의 화랑을 돌며 전시를 할 때 작품을 사주고 후원해준 독지가들, 기사를 써주고 알려준 언론인들과 평론가들, 화가들, 일본의 친구들, 그리고 제게 이런 좋은 공간을 만들어준 백석대학교의 장종현 총장, 문현미 부총장(시인), 김재홍 교수(시인)와 학예팀들. 말하다보니 모두 고마운 사람밖엔 없네요. 살아있다는 것,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것, 한때 저를 질시하던 분들까지도 제겐 고마움이에요. 그래서 세상에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또다른 작품으로 만나뵙기를 기대하겠습니다.


박영대 약력
1942년 청주 출생
백석대학교 석좌교수
청주시 서원구 남들로 25번길1 송계미술연구소

주요 개인전
2018 갤러리 초대전 (가나인사아트센터, 서울)
2017 갤러리 초대전 (가나인사아트센터, 서울), 현대미술 한일전 (동경, 일본)
2016 개인전 (가나아트센터, 서울/청주예술의전당, 청주)
2013 미술관 초대전 (대청호미술관, 청주)

2010 Shimon갤러리 개인전 (동경, 일본)
2005 갤러리 초대전 (경기도 박물관, 용인)
1996 갤러리 초대전 (로고스갤러리, 런던, 영국)
1993 미주 한국일보사 초대전 (LA, 미국)
1981 한국화랑 초대전 (뉴욕, 미국) 외 50여회

주요 국제전
2018 아트페어 초대전 “Vienna Contemporary(비엔나 컨템퍼러리)" (빈, 오스트리아)
2016 사이타마현립미술관 초대전 (사이타마, 일본), 현대미술 한일전 (동경, 일본)
2011 사롱드브랑 대상 수상 (오모리빌 아트리움, 동경, 일본)
2010 상하이 엑스포전 (상하이, 중국)
2009 그랑팔레전 (파리, 프랑스), Tokyo-TEN 그랑프리 수상작가 특별전 (동경도미술관, 동경, 일본) 외 다수

수상
2011 사롱드브랑 대상 수상 (오모리빌 아트리움, 동경, 일본)
1991 Tokyo-TEN 그랑프리 수상 (동경도미술관, 동경, 일본)
1978 백양회 공모전「麥波」최고상 수상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외 다수

작품소장처
대영박물관(런던,영국), 로고스갤러리 (런던, 영국), 캐롤갤러리(뉴욕, 미국), 일본KBS청주, 경기도미술관, 한국은행, 신미술관, 남포미술관, 공군사관학교, CJB청주방송, 메타바이오매드, 백석대학교, 청주대학교, 대청호미술관, 성남아트센터, 충북도청, 충북대병원

ICA 국제 현대미술 협회장, 씨올미술협회, 오늘회, 국전작가회, 세계미술협회, 현대미술한일협회 회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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