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준식 충청북도문화재연구원 원장

백제 창왕명석조사리감
석감 배면
석감 측면
석감 전면

[동양일보]제천시 백운면 평동리 107번지 박달재 아래에 경은사라는 고찰이 자리하고 있다. 사찰 진입로에는 박달재휴양림이 있고 뒤편으로 리솜 리조트라는 휴양시설이 운영되고 있어 근래에 와서 많이 알려진 사찰이다. 경은사가 위치한 곳은 고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제천-충주-신림-원주-장호원-음성-죽산(안성)으로 이어지는 중요 교통로상의 분기점이 되었던 곳이다. 사찰입구에 있는 탑봉에는 고려시대에 전탑(塼塔)을 세워 교통의 이정표 역할을 했으나 붕괴되었고, 그 자리에는 경은사 주지 수경정암스님이 화강암재의 삼층석탑을 신조 건립하여 멀리서도 경은사의 경관이 조망되고 있다. 탑봉에서 수습된 벽돌들은 경은사에 보관되어 있는데, 이 벽돌의 외측면에 연화문을 압인한 것으로 볼 때 벽돌의 사용처는 전탑을 구성했던 부재임이 분명하다고 하겠다. 현재까지 충북지역에서 전탑이나 전탑건축에 사용된 부재들이 발견된 것은 경은사의 전탑이 첫 사례로 알려지고 있다.

경은사에는 높이 30cm의 작은 목조불상이 봉안되어 왔는데 2007년 불상의 복장에서 조상기가 확인되면서 이 불상의 존명이 문수보살이고 1636년에 조성되었음이 밝혀져 충북도 유형문화재 제294호로 지정되었다. 이 문수보살상의 조사과정에서 오랫동안 경은사에 수장되어 있었으나 알려지지 않았던 석조불감을 확인 하였다. 석제로 만들어진 불감이라는 희소성에 더해 석감의 뒷면과 측면에 이를 조성한 절대연대와 조성주체를 알리는 명문이 있어 크게 주목되었다.

불감이란 나무나 돌, 금속류 등으로 가옥형의 구조를 만들고 그 속에 불상을 봉안한 것으로, 전면에는 문을 달아 개폐장치를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대체로 목조불감이 성행하였다. 불감은 일반적인 건축물에 비해 아주 작은 규모로 만들기 때문에 금당의 주존불로 봉안하기 보다는 이동이 용이하여 호신불의 기능이 컸다고 하겠다.

경은사 입구의 탑봉에 있었던 전탑의 문양전돌과 현재 경내의 문수전 앞에 위치한 삼층석탑의 양식적인 면을 고려할 때 경은사는 늦어도 고려 후기 이전에는 창사되었다고 추정된다.

경은사 석감은 1985년 대웅전 뒤편의 배수로 공사 때 백자대접 여러 점과 금속제의 불기류와 납 구슬 등과 함께 발견되었다. 납 구슬은 5점이 출토되었는데 모두 직경 7cm, 무게 1.8kg 정도이며 동일한 형태의 같은 중량으로 주조되었다. 이러한 납 구슬은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건물이나 탑을 세우기 전에 액운을 막고 건물과 탑의 안전과 영속을 기원하는 의미에서 땅속에 매납하는 풍습이 있었는데 이 납 구슬도 지신(地神)에게 받친 지진구일 가능성이 있다. 이렇게 지진구로 사용된 납 구슬은 충청북도의 사찰과 사지조사에서 처음으로 확인된 자료이다.

석감의 재질은 옅은 붉은색의 납석이며, 전체 높이 20cm, 폭 12cm, 너비 9cm이다. 전면 중앙에 감실을 만들고 하단부는 비좌와 같은 형태로 되어 있어 안정감 있게 세워진다. 석실 내부에도 전각의 흔적이 있으나 마멸이 심하여 내용은 알 수 없고, 감실 전면에 문비시설을 했던 장치가 보이지 않으므로 이 석감은 처음부터 개방형으로 제작되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감실 내부에는 발견 당시부터 아무것도 없이 비어 있었다고 한다.

석감의 조성 당시에는 전‧후‧좌‧우면에 모두 각자 하였던 것으로 추정되나 현재는 배면과 우측면에만 명문이 남아있다.

배면에는 해서체의 종서로 康熙五十年 辛卯年 六月 日 坦明比丘 造成石室 奉獻天王 이라는 4행 22자의 명문이 음각되었고, 우측면에도 동일한 명문이 있는데 말미에 東方持國天王前 이라 하여 석감의 봉납대상을 밝히고 있다.

조성석실이라는 문구로 볼 때 제작당시에는 이 석감을 석실로 인식하였으며 강희 50년인 1711년(숙종 37) 6월에 사천왕의 한 분인 동방지국천왕에게 공양하기 위해 탄명스님이 조성한 것으로 이해된다.

2007년 학술조사 이전까지는 경은사에서 목조문수보살상과 석감은 비불로 전해 내려와 일반에게 공개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석감과 명문에 관하여 중요성을 인지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사찰의 중창주로 탄명비구를 명시하여 사력을 밝히고 있어 주목된다.

석감의 조성자인 탄명은 1703년 경기도 죽산(안성) 칠장사에서 나한전을 신축하였으며, 무너져있던 철당간을 다시 세우는 등 칠장사의 중창에 진력하였다. 한편 칠장사 대웅전에 보관된 영산회상도(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39호) 역시 탄명이 조성하였는데, 영산회상도를 보관한 괘불함의 측면에 강희사십구년 경인오월 탄명비구가 모친의 병환 쾌유를 기원하고자 조성했다는 발원문이 묵서되어 있다. 칠장사의 영산회상도는 경은사 석감이 제작되기 꼭 1년 전인 1710년(숙종 36)에 조성되었는데, 칠장사의 중창기록과 경은사 석감의 명문으로 볼 때 탄명비구는 양 사찰의 불사에 중심적인 단월이 되어 참여했음을 알 수 있다. 현재로서는 이 석감이 칠장사에서 탄명에 의해 조성된 후 경은사로 옮겨진 것인지, 아니면 탄명이 경은사에 주석한 후에 경은사에서 제작한 것 인지는 알 수 없다.

이후에도 탄명은 전남 해남군에 위치한 대흥사(대둔사)의 사적비 건립에 각공으로 참여한 기록이 있으며, 대흥사 소장 괘불의 묵기에도 이 사찰의 말사인 명적암과 한산전 건립에도 시주질로 참여했음이 기록되어있다. 이러한 활동으로 볼 때 탄명비구는 1700년대 초기에 경기와 충청지방 그리고 전라도 일대에서 활약한 고승이자 화승 이였음을 알 수 있다.

앞에서 살핀 대로 경은사 소장의 강희명 석감은 비록 불탑에 봉안된 사리장엄구는 아니더라도 부여 능산리사지에서 출토된 창왕명석조사리감(국보 제288호)과 기본적으로 형태가 유사할 뿐만 아니라, 조성연대와 봉헌대상, 공양자가 분명한 석조사리기라는 면에서 학술적인 가치가 매우 높다고 하겠다. 경은사의 석감은 조선 숙종연간에 제작되었지만 그 연원을 567년에 조성된 백제의 창왕명 석조사리감에서 찾아야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아치형의 석조사리기는 창왕명석조사리감이 유일하다고 알려져 왔는데 “강희오십년명석감”이라는 새로운 석조사리기의 출현은 향후 우리나라 불교미술사와 사리기 연구에 매우 중요한 성보문화재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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