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충주 고구려비 (국보 제205호) ①

충주 고구려비

[동양일보]1. 발견경위

충북 충주시 중앙탑면 용전리의 입석마을에는 국보 제205호인 충주 고구려비가 위치한다.

이 비는 고구려 장수왕 때 고구려의 남진으로 파생된 신라와의 관계를 재설정하고 서약한 내용을 기록한 금석문으로 현존하는 우리나라의 유일한 고구려 석비이다.

지금까지 고구려비는 3기가 알려져 있는데 우리에게 익숙한 광개토대왕비와, 2012년 길림성의 압록강 인근의 마선향에서 발견되어 현재 집안박물관에 보관된 집안 고구려비가 있다.

충주 고구려비를 제외한 2기는 중국영토 내에 위치한다. 그렇다면 충주 고구려비는 어떤 사연으로 한반도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는 충주 땅에 세워졌을까? 비문에 의하면 신라는 고구려의 동생의 나라 또는 오랑캐로 지칭되는 등 굴욕적인 내용이 적시되었는데 신라의 입장에서 어째서 이 비석을 훼손하지 않고 그대로 두었을까? 비가 건립된 후 약 천오백여년의 세월이 지난 20세기에 와서 홀연히 그 모습을 드러냈을까?

충주 고구려비의 출현은 요즘에 유행하는 트로트 “니가 왜 거기서 나와”를 연상케 할 만큼 충격적인 발견이지만 충주 고구려비는 절대로 우연하게 발견된 것은 아니다.

1978년 가을에 충주에는 문화재 애호인들의 모임인 예성동호회가 발족되었다. 회원들은 그동안 <중원의 향기>, <중원의 향토기> 등 충주의 역사를 책자로 발간하기도 하였고, 충주를 중심으로 인근지역에 대한 열정적인 답사활동에 의해 앙성면 봉황리에서 삼국시대에 조성된 마애불상군(보물 제1401호)과 단양 영춘면에서 비마라사지의 발견 등 많은 문화재들이 찾아지고 세간에 알려지는 성과를 갖게 되었다.

그런데 예성동호회 발족에 앞선 1978년 1월 단양의 적성면에서 단국대학교박물관에 의해 신라 진흥왕대의 ‘적성비’가 발견되면서 답사를 위주로 활동했던 예성동호회원들은 충주지역에도 신라의 고비(古碑)가 분명히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진흥왕이 단양을 점유하면서 적성비를 세웠는데, 충주지역의 역사·지리·생산적 환경의 중요성을 감안하여 일찍이 충주에 “국원소경”을 설치했던 진흥왕이 충주에도 순수비 형태의 비석을 세웠을 가능성이 있을 것 이라는 기대감과 추론을 갖게 되었다.

예성동호회원들의 이러한 기대와 노력은, 현재의 충주시립박물관이 위치한 논바닥에 옛 비석이 매몰되어 있다는 노인들의 말을 듣고 수없이 파보기도 하였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는 말이 있듯이 당시에는 문화재보호법 등을 알지도 못한 용맹함? 때문이었던 것 같다. 또 어느 분이 금가면의 산속에 대각간명(大角干銘)의 비석이 있다고 하여 금가면 하담리 일대의 태고산록을 무수히 헤집고 다니기도 하였다. 당시 예성동호회의 커다란 과제는 신라의 고비를 찾는데 있었다고 하겠다.

1979년 2월 24일 중앙탑 주변을 답사 한 후, 인근의 입석마을에 있는 입석을 조사하자는 의견이 모아졌다. 입석의 존재는 기왕에 알려져 있었으나 회원 한분이 이 입석은 당시 중원군문화원 이동호원장의 조상으로 경상감사를 역임한 분에게 조선 숙종이 하사한 사패지지에 관한 경계석 이라는 구체적인 주장을 하였다.

우리는 이 입석이 사패지의 표석이던 경계석이던 간에 일단 조사를 해보자하여 입석마을에 도착했다. 돌기둥 형태의 입석은 전체적으로 이끼와 청태 등이 두텁게 덮여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던 중 입석의 여러 부분에서 글자가 확인되어 이것이 단순한 입석이 아니라 석비였음을 알게 되었다. 지금의 전면 하단부에서 ‘국토, 토내(國土, 土內)’와 4면인 측면상단에서 ‘안성(安城)’이라는 글자를 확인했다.

특히 안성(安城)으로 보이는 글자를 보고 필자는 “경기도 안성이 왜 여기에 나오지? 안성까지가 이동호 선생네 땅이었나?”라며 중얼거린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비문에서 ‘安城’으로 읽었던 것은 훗날 고모루성으로 밝혀졌지만… 입석이 아닌 비석을 조사하면서 손가락으로 자획을 확인하는 과정의 사진은 1979년 말에 발간된 <예성문화> 창간호에 게재되었다.

그 후 이 석비에 대한 회원들의 궁금증은 청주대학교박물관장인 김영진 교수에게 자문을 받기로 하여 연락을 취하였다. 3월 초순경 충주에 온 김교수와 만나서 입석마을로 가는 도중에 회원 중 한사람이 입석조사에 앞서, 신니면에 소재한 견학리 토성을 먼저 답사하고, 돌아오는 길에 이 비를 조사하자고 하여 일행은 신니면으로 향했다.

견학리 토성에서 반월형석도와 석검, 석부 등을 수습하여 한껏 들뜬 마음으로 내려오는 길에 마을에서 전통혼례식이 진행되고 있었다. 동네 분들은 초면인 우리를 혼례집으로 이끌었고, 일행은 후덕한 시골마을의 인심에 녹아들어 탁주를 마시며 덕담을 나누는 동안 시간이 흘렀고, 일행이 타고 온 차량 소유자가 약속시간 때문에 시내로 간다고 하여 비석의 조사는 다음 기회로 미뤘다.

그러나 그 “다음의 기회”는 영원히 오지 않았다.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당초의 계획대로 진행하였다면 고구려비 학술조사는 청주대학교박물관이 주관했을 개연성도 있다고 생각된다. 이 일 이후에 필자는 유물에 대한 선입감이 어떠한 결과를 초래하고, ‘다음에 보자’는 게으름이 어떠한 방향으로 전환되는지 뒤늦은 깨달음으로 남았다.(선입견이 고구려비를 판독하는데 많은 어려움으로 적용된 것은 다음 호에서 밝히고자 한다.)

이 돌기둥이 종래에 알려져 왔던 백비 또는 입석이 아니라 석비(石碑)로 확인된 것은 1979년 2월 24일 오후 2시께였다. 그러나 이때는 비석의 진정한 가치와 중요성을 알지 못했고, 훗날 ‘고구려비’로 탄생 되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했다.

2부에서 계속됩니다

장준식 충청북도문화재연구원장
장준식 충청북도문화재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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