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국보 제197호)

보물 제700-2호 선림보훈 권말 간기(충주 청룡사).
보물 제700-2호 선림보훈 권말 간기(충주 청룡사).

[동양일보]충북 충주시 소태면 오량동 청계산에 소재한 청룡사지에는 보각국사정혜원융탑과 탑비, 사자석등, 위전비, 석종형부도 등 조선시대의 유적들이 산포되어 있어, 일반적으로 청룡사는 보각국사 때인 조선 초기에 창건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 이전부터 환암 보제선사와 그의 제자인 승준, 만회 등이 청룡사에 주석하면서 불경을 인간(印刊)한 것으로 볼 때 청룡사의 창건은 조선시대가 아니라 고려시대로 올려 봐야할 것이다.

충주 청룡사에서 인간된 불경은 고려시대의 간행물이 3종, 조선시대의 간행물 1종이 알려져 있는데, 먼저 청룡사에서 개판(開板)된 고려 사찰본은 <선림보훈>과 <호법론>, <금강반야경소론찬요조현록>으로 모두 목판본의 불경이다.

보물 제700호로 지정된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의 <설림보훈>은 宣光八年戊午 幻庵跋留板 忠州靑龍寺(선광팔년무오 환암발류판 충주청룡사)라는 간기와 사찰명이 있어, 고려 우왕 4년인 1378년에 청룡사에서 개판한 것임을 알 수 있다.

2017년에는 충주시립박물관에 소장된 동책(同冊)이 보물 제700-2호로 지정되기도 했다. 보물 제702호인 <호법론>은 간기에 사명(寺名)이 명시되어 있지는 않았지만, 이색(李穡)의 발문에 우왕 5년인 1379년 승준과 만회가 환암 보제대선사의 명으로 충주 청룡사에서 개판하였다고 기록했다.

같은 시기인 우왕 5년 청룡사에서 인간된 보물 제720호인 <강반야경소론찬요조현록>의 편찬에도 환암의 제자 만회가 참여하고 있다.

이 불서들은 고려 말〜조선으로 이어지는 불교사상이나 선종의 흐름을 살필 수 있는 귀한 자료들이다. 또한 서책간행과 관련된 사실들이 남아있어 고려 말 지방사찰본의 특징을 살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현재 전래되는 판본 가운데 판각과 인출이 가장 정교한 고려본들 이다.

이러한 불서들을 인간했던 청룡사에는 높은 학덕을 가진 국사와 선사들이 주석하였고, 서책 발문자들의 신분으로 볼 때 왕실과 연계되는 높은 사격(寺格)을 지녔던 사찰임을 알 수 있다.

또한 배불정책이 강화되던 조선시대인 광해군 6년(1614년)에도 청룡사에서 <묘법연화경>이 인간되었는데 이 판본은 현재 동국대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러한 간본으로 볼 때 충주 청룡사 연혁 상한은 최소한 고려 후기로 추정할 수 있으며 조선 광해군조인 17세기 초까지는 법등이 운영되었다고 하겠다.

지금까지 충주 청룡사에서 인간된 불서로 볼 때, 청주 흥덕사가 금속활자의 메카라고 한다면 충주 청룡사는 고려후기〜조선조 중기까지 목판활자의 메카로서 불서간행을 주도했던 선종계열의 위격 높은 도량이라고 하겠다.

청룡사의 정혜원융탑 주인공인 보각국사 혼수는 고려 말에 활약했던 고승으로 충숙왕 7년(1320년) 현재의 경기도 광주인 풍양현에서 출생하였고 충혜왕 2년에 선시에서 1등으로 합격한 인물이다.

공민왕 때는 3번에 걸친 왕사로의 위촉을 거듭 사양하고 금강산과 오대산 등에서 수행하였고, 우왕 때는 승주 송광사에 주석했다가 충주 청룡사의 부속암자인 연회암에 은거했다. 연회암에서 불경 인간에 총력 하던 중 우왕 9년에 국사(國師)로 책봉되었다. 조선 태조 원년인 1392년에 국사가 73세 로 입적하자 태조는 국사에게 ‘정혜원륭’ 이라는 탑명을 내리고 부도 탑을 조성하도록 명했다.

탑비는 당대 최고의 문장가인 양촌 권근이 찬하고 승려인 천택이 봉서하였으며 국사의 문도인 희진 등이 건립을 주도했다.

이 부도탑은 언제 도괴되었는지 알지 못한 채 오랫동안 방치되었으나 1976년 당시 중원군청 공보실장 김예식이 주도하여 복원하였고, 3년 뒤인 1979년 5월 조선시대의 부도 중 유일하게 국보로 지정되었다.

도괴되어 처참한 모습으로 있던 부도재들이 한 공무원의 사명감과 헌신적 노력에 의해 국보로 탄생(?) 한 대표적인 사례라고 하겠다.

당시 조사보고에 의하면 지대석 아래와 탑신석의 윗면에 사리공이 있었는데 그 내부에 장치되었을 사리장엄구는 이미 멸실 되었다고 한다.

엄밀히 말해서 지대석 아래의 사리공으로 표현한 것은 묘실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청룡사지 보각국사 부도탑의 현재 모습.
청룡사지 보각국사 부도탑의 현재 모습.

청룡사지 보각국사탑은 기단부와 탑신부, 상륜부가 파손되거나 마멸되지 않고 거의 온전하게 남아있다.

기단부는 8각을 이루는 지대석과 하대석, 중대석, 상대석으로 구성되었다. 하대석은 8각의 받침석이 높게 되었고 그 위에는 16엽의 복련이 둘러져있다.

중대석도 8각을 이루지만 모죽임 기법을 적용하여 거의 원형에 가까운 형태이다. 중대석 각 면에는 안상을 조각하고 그 안에 사자와 용을 번갈아 가면서 조각했다. 상대석은 하대석과 대칭을 이루는 16엽의 앙련으로 이루어졌다.

부도탑 보주 태극문.
부도탑 보주 태극문.

탑신부는 탑신석과 옥개석으로 구성되어있다. 탑신석은 8각을 이루 고 있지만 모 죽임 기법을 적용하여 거의 구형(球形)에 가깝다. 탑신석의 각 면에는 무기를 들고 있는 신장상이 새겨져 있다. 각 면의 모서리에는 둥근기둥이 모각되어 있는데, 용이 몸을 틀어 기둥을 감싸고 있어 생동감을 느끼게 한다. 옥개석은 목조건물의 지붕과 같은 형태이며 아래에는 사래, 주도, 첨자가 정교하게 표현되었다. 낙수 면은 경사가 급한 편인데 추녀는 높게 치켜져 있다.

상륜부에는 앙화, 복발, 보주가 차례로 얹혀 있다. 특히 보주의 사방에 태극문이 선각되어 있는데, 충주박물관 소장 유물 중 고려 충렬왕 때 충주읍성의 개축 시에 사용된 신방석 중심에도 이와 유사한 태극문이 선각되어 있어 눈길을 끈다.

1978년 9월 이 신방석이 발견되면서 충주지역의 향토사연구단체인 예성문화연구회가 발족되는 계기가 되었는데 예성회의 활동사항은 본지의 충주고구려 편에 상술했다.

과거 도괴된 부도.
과거 도괴된 부도.

보각국사 부도탑은 탑신이 구형에 가깝고 화려한 목조건축물을 번안한 듯 장엄되어 있다는 점이 가장 큰 양식적 특징인데, 거의 같은 시기에 조성되었던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 석종이나 양주 회암사지 부도에서도 같은 양식이 보인다.

신륵사 보제존자 석종과 회암사지 부도는 고려 말~조선 초에 활약했던 나옹(懶翁)과 무학(無學)의 부도 탑으로, 왕실에서 발원하여 조성된 석조미술품이다.

청룡사 보각국사탑 역시 조선전기 왕실 발원의 석조미술품으로써 조선 전기의 석조부도를 대표하는 걸작으로 꼽을 수 있다.

장준식 충청북도문화재연구원장
장준식 충청북도문화재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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