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충호 박사

이충호
이충호

 

[동양일보]●폐교 반대 투쟁(2)

조교조를 중심으로 1954년 가을부터 부모의 생활 실태를 조사한 활동은 조교조 ‘부모의 실태조사·연구자료’로 정리되었다.

이에 따라 부모 개개인의 이력을 청취한 기록을 통해 민족 차별에 의한 빈곤한 생활 실태가 분명해졌고, 피차별의 생활을 변경시키지 않는 한 편견도 소멸될 수 없다는 점이 제기되었다.

그와 동시에 “(생활고에 시달리는) 사회적 경제적 조건으로 조선인학교의 폐교가 행해진다면 아이들의 행복은 파괴되고”, 민족교육의 기회가 박탈될 것이라는 점, “일본에 영주하기를 원하는 자는 거의 없고, 모두가 조국이 통일되는 날 귀국하고 싶어 한다”는 것이 확실해 졌다.

이와 같은 부모의 요구가 명확해짐으로써 운동의 방향도 수정되고 ‘폐교 반대’에서 ‘국교가 조정될 때까지 폐교 연기’ 요구로 전환하게 되었다. 국교 조정에 의해서 ‘완전한 외국인’으로 대우받고 조국과의 자유 왕래가 갖추어질 때까지 도립 조선인학교를 존속시켜서 아이들을 조선인으로서 계속 키우고 싶다는 것이 부모의 요구였기 때문이다.

조교조는 이러한 취지에 서서 12월 11일에 “한·일 양국의 국교가 정상화로 되는 시기에 이르기까지 도립 조선인학교 폐교를 연기할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폐교 연기 요청서」를 도교위에 제출하였다.

10월 5일의 폐교 결정을 통고한 이래, 정부의 응원까지 받은 도교위의 태도는 냉혹한 그대로였고, 폐교 반대, 폐교 연기의 요청을 전적으로 거부해 왔다. 다른 한편 일교조 등도 조직 차원에서 결정을 내렸으나 대중운동의 전개에까지는 이르지 못했고, 간부 교섭의 수준에서 항의하는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래도 조선인학교 당사자에게는 이러한 움직임이 커다란 뒷받침이 되어 항의·교섭 능력을 강화해 주었다. 이러한 역관계 가운데 해가 바뀌자 폐교를 전제로 한 후, 일본인 교사와 조선인 교사의 신분 보장의 문제와 각종 학교로 이관 후의 지원과 예산 문제가 중요한 교섭 항목으로 대두되었다.

조교조 및 PTA는 연명으로 2월에 폐교 후의 사태에 대비한 여러 요구를 정리해서 교섭에 나섰다. 그것은 첫 번째로 “아이들의 집단 교육을 계속하기 위해” (1) 1955년도에 원조 예산을 계상 지출할 것을 요구함과 동시에, (2) 각종 학교 이관 후의 조치로서 ① 상급학교 진학 보장, ② 校舍, 부지 등의 계속 사용의 허가, ③ 인가 수속의 신속, ④ 학생 할인, 급식 등 학교 교육법에 따른 아동 학생에게 특전 제도의 적용, ⑤ 빈곤한 아동 학생에게 생활 보호법의 적용, ⑥ 고체련(高體連), 중체련(中體連) 등에 가맹하는 등 일반 학교 학생과의 교류 기회를 균등히 갖는다고 하는 여러 항목을 요구했다.

두 번째 사항으로서는 교직원의 신분을 보장하기 위해 (1) 일본인 교직원 전원에 대한 재선발을 명확히 하고, 본인이 희망하는 지구 내의 학교로 전임시킬 것 (2) 조선인 교직원은 전원 ‘교직원’ 신분으로 직장과 생활을 보장할 것을 요구했다. 당시 이것들은 조선인 교육을 유지하는데 최저한의 요구 항목이었다.

2월부터 3월 중순에 걸쳐 조교조 및 PTA 도교연(都敎連)·일교조·혁신의원단 등의 응원을 받으면서 교섭을 거듭했지만, 최후까지 난항이었다. 그리고 첫째 내용에 대해서 말하면, 도립학교에서 재적하고 있는 아동 학생만을 대상으로 5년간 1억 2천만 엔의 교육비 원조를 지출하고, 각종 학교로서 조선인학교 인가, 그 경영체로서 학교법인 도쿄조선학원의 설립을 인가하는 것은 인정하였다. 그러나 각종 학교라는 법규상의 위치를 기계적으로 적용해 상급학교 진학의 길을 막았고, 빈곤한 아동 학생들에게 교육 부조 비를 중단하고, 일반 학교와의 교류를 금지하고, 학생 할인이나 급식 등의 보조제도를 폐지하는 것으로 해 버렸다.

두 번째 사상에 대해서는 조선인 교직원을 전원 해고하고, 일본인 교직원은 2명을 제외하고 일본인 학교로 전근시키기로 했다. 단 조교조의 지도자였던 2명의 일본인 교사는 都敎連이 都敎委에 의해서 1년간 병가 휴직으로 처리된 후에 해고당했다. 일본인 교사 중에서도 희생자가 나온 것이다.

이와 같은 교섭의 결말을 거쳐 1955년 3월 31일 도립조선인학교는 고난에 찬 5년의 역사를 끝냈다. 이 역사에 관해서 한 재일조선인 역사가는 “도립조선인학교는 공립학교의 대표적이었지만, 이 시기는 조선인의 민주주의 교육에 탄압·간섭의 시기였고, 조선인의 교육에서는 마이너스의 시기였다. 그리고 또한 어떠한 탄압도 우리들의 민주 민족교육을 말살하는 것은 할 수 없는 것을 증명했다”고 규정하고 있다.(朴慶植, ‘민족교육’ <전후 교원 이야기Ⅱ> 1960년)



민족교육 발전의 새로운 단계



● 조선총련의 창립­재일조선인 운동의 전환

1955년 5월 재일조선인 총연합회가 창립되고, 재일조선인 운동의 노선이 전환되어 재일조선인의 생활과 활동에 근본적인 전기를 맞이하였다. 이때 이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의 재외 공민인 것의 자각과 그것에 기초한 행동을 취하는 것이 재일조선인의 생활과 활동 전체에 걸쳐 기본원칙으로 간주하여 행동해 갔다. 그것과 동시에 조선총련의 창립은 민족교육 재발전의 진로를 확산하는 것으로 되었다. 탄압 하에서 신음했던 조선인학교를 다양하게 개조하고, 정비·충실함과 동시에 그 교육의 목적·방법·운동을 공화국 공민의 육성에 적합한 자로 변혁해 나갈 원동력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것은 “재일조선인 민족교육의 질적 전환에 한 획을 긋는 것”이었다.(<민족교육> 편집부 논문 ‘중등교육 실시 20주년을 맞이한 민주주의적 민족교육’. 1966년)

그 민족교육의 존재 양상은 그 모태가 되는 재일조선인 운동의 성격이 변화됨에 따라 함께 변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일본의 혁명운동과 재일조선인 운동은 일본이 민주주의화가 되지 않으면, 재일조선인의 해방도 없다는 현실적 비판에 기초하였다. 즉, 성급히 재일조선인 운동을 일본이 혁명운동 일부로 규정하고, 재일조선인의 대권력 투쟁에 직접 동원하는 운동론을 권장해 왔다. 그것은 운동에 의한 일본 민중의 입장을 재일조선인의 입장으로 삼으라고 강제한 것이었다. 이에 따라 공히 이념적으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공민이라는 방침을 내걸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현실의 운동 형태를 합리화하기 위해서는 “일본 국내의 소수 민족이다”고 성격 규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에서 이론상의 혼란과 잘못이 생겨났다. 일본이 패전한 후 10년간은 혁명운동의 전위조차 재일조선인 운동의 형태에 대해서는 정확한 논리를 제기할 수 없었다. 타민족 지배 사상에 감염된 흔적이 그러한 면에서도 남아 있었다.

이러한 일본의 혁명운동의 일환으로 재일조선인 운동을 위치 지운 잘못이 한국전쟁 시기에 특히 집중적으로 나타났다. 공산당의 半 비합법화와 재일조선 통일민주전선의 시기였다. 재일조선인은 일본의 혁명운동 최전선에 서서, 탄압을 받고 수많은 희생자를 냈다. 그것은 메이데이 사건을 시작으로 당시의 ‘치안’ 관계의 여러 가지 재판에 재일조선인이 ‘피고’로서 다수 가담하고 있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1955년까지의 일본의 혁명운동과 재일조선인 운동은 재일조선인을 ‘외국 공민’으로 확정하고, 그것에 조응(照應)한 논리와 운동을 갖추지 못했던 점에서 잘못을 범하고 있었다.

따라서 재일조선인 교육 운동의 면에서도 이와 같은 혼란과 잘못이 반영되지 못했다. 교육 방침에 있어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교육 노선에 따른다고 명시하고, 실제적으로도 공화국 공민의 육성을 목표로 하는 교육 노력을 거듭하면서도 그것을 지키는 운동론으로서는 조선인학교 옹호를 위한 투쟁을 일본의 국민 교육의 민주화 운동 일부분으로 간주하여, 조선의 건설·발전을 운동의 일환으로 파악하는 시점은 미약했다. 이론적으로 “국내 소수 민족의 교육 문화의 옹호”로 규정한 것이고, 그것은 특히 일본 측의 견해로 일반화했다. 도립 조선인학교를 둘러싼 투쟁의 경우도 동화교육 체제하에 역경 속에서 민족적 노력을 계속 인정한 것도 후에 “학교를 지키는 투쟁에 힘을 쏟기 위한 정치적 편견이 농후했다. 그것은 또 民戰의 잘못된 방침에서 일본의 재군비 반대, 일본의 민주화를 위한 교육이었다. 그런 까닭에 모국어의 학력 저하는 현상이 두드러졌고, 애국주의의 교육에서도 부족한 바가 많았다”고 반성하게 되었다.(박경식, ‘민족교육’, <전후 교원 이야기(Ⅱ)> 1960년)

재일조선인은 “일본 국내 정치에 대해 이러니저러니 말참견을 하여 일본인에게 미음을 샀다. 민족교육을 지키기 위한 심한 싸움은 조선인이 마치 일본에 혁명이라도 일으킬 듯한 나쁜 인상을 심어 주었다”고 스스로 운동의 존재 방식을 되짚어 보기 시작하였다.(李東準, ‘일본에 있는 조선인 아이들’ 1961년.)

공비(公費)에 의한 조선인 교육 보장의 요구에 대해서도, 일본 국민의 운동으로서 그것을 일본 정부에 대항한다고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재일조선인이 직접으로 나선 것은 내정간섭으로 재해석하게 되었다. 조국과 연결한 외국 공민으로서의 운동의 목적과 방법을 탐구하기 시작했다. 이 움직임에 자극하여 명확한 방침을 나타내 주었던 것은 1954년 8월 및 1955년 2월에 발표한 북한 외상(外相)인 남일(南日)의 성명이었다.

南日 성명(1954년 8월 30일)은 일본 정부의 잇따른 재일조선인 박해에 항의하면서, “일본에 사는 조선인은 북한(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공민으로서의 정당한 권리를 가진 것”을 분명히 하고, 그 “정당한 권리를 지키는 것은 북한 정부가 언제 어떻게 될 때도 변하지 않는 정책이다”는 입장을 표명하였다. 그리고 일본 정부에 대해 “민주주의적인 민족교육 등 일체의 정당한 권리를 보장”하도록 요구하였다. 이 성명에 의해서 새삼 재일조선인이 북한(공화국)의 재외 공민인 것이 명확히 제시되었고, 이 문제가 일본 국내 문제라고 말하기보다는 국제 문제인 것으로 성격이 나타났다. 재일조선인 박해는 “외국인의 법적 지위에 대해서 현재 국제법에 따라서 인정되고 있는 원칙과 습관에 대한 난폭한 위반”이기 때문이다. 계속되는 성명(1955년 2월 26일)을 통해서 당시의 하토야마(鳩山) 수상의 호소에 응답해서 朝日 국교 정상화의 용의가 있음을 분명히 하였다. 이는 일본 국민을 대표하는 정부임을 인정하고, 따라서 재일조선인 운동이 내정 불간섭의 원칙에 따라서 추진되어야 할 것을 시사한 것이었다. 이들 두 개의 南日성명은 재일조선인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공민이라는 인식을 기본으로 해야 함을 명확히 했고, 지금까지의 일본 혁명운동 및 재일조선인 운동이 범한 오류를 바로잡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처럼 조국으로부터의 성명을 받아들여, 종래의 운동 형태를 비판한 토론이 1954년 말부터 1955년 봄에 걸쳐서 일본 공산당 및 민전(民戰)의 내부에서 추진되었다. 그리고 그 결정적인 전기를 마련한 것은 民戰 제19회 중앙위원회(1955년 3월)에서 행해진 한덕수의 연설 ‘재일조선인 운동의 전환에 대해서’였다. 이것을 기회로 재일조선인 운동은 일본 혁명운동의 일환이라는 위치에서 벗어나 조선 공민의 민족적 권리 옹호와 자주적인 그러나 조국과 연결한 운동으로 전환하게 된다, 이에 따라 일본이 혁명운동과 함께 보조를 맞추어 가던 길에서 벗어나, 民戰을 해소하고, 재일조선인 총연합회의 창립으로 나아간 것이다. 이는 재일조선인 운동에서 조선인의 입장과 주체를 확립된 것을 의미했다. 이에 의해서 일본의 혁명운동 측도 재일조선인을 ‘국내 소수 민족’으로 보는 관점에서 벗어나 ‘외국 공민’으로 규정하게 되었다.

조총련의 창립은 재일조선인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공민의 입장에 서서, 그것을 기본으로 하여 행동하는 태도를 표명한 것이었다. 조총련은 스스로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시책에 따라서 전 조선 인민 최대의 숙원인 조국의 평화통일·독립과 재일동포의 정당한 권리를 지키기 위해 재일동포의 유일한 결집 단체이다”고 규정하였다. 따라서 스스로의 위치를 전 조선 민중의 운동·과제의 일환으로 규정함으로써 “조총련 산하 각 단체는 외국의 어떠한 정치단체에도 가입해서는 안 되며, 또한 외국의 정치적 분쟁에 가담해서도 안 된다”고 하여 종래의 일본 혁명운동과의 관계도 시정하였다( 「조선총련 활동 방침」 1955년 5월.). 이렇게 해서 조총련은 독자의 민족적 과제를 추구해 나가게 되었다. 이 내용은 결성 대회에 의한 「선언」으로 집약되어 있는데 그 부분을 여기에 옮겨 둔다.



앞으로 우리는 재일 60만 전 동포를 빛내 주는 우리 조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와 경애하는 수령 김일성 원수의 주위에 한층 더 굳게 결집하고, 우리 조국의 평화통일․독립을 달성하기 위해 미국 제국주의의 조선 침략과 매국노 이승만 일당에 반대해서 당연히 싸울 것이다.

우리는 재일 60만 동포의 단결과 통일을 강하게 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공민으로서 민주주의적 제 권리와 민주 민족교육을 지키고, 정당한 생활권을 보장하고, 재일동포 사이에서 상호 원조의 미풍을 강하게 할 것이다.

우리는 또 조국의 평화적 공존에 관한 외교정책을 충실히 지키고, 일본 국민과의 국제주의적 친선․단결을 한층 더 강화함으로써 조․일 양국 간의 관계를 정상화하고, 세계 평화를 굳세게 하는 사업에 힘을 다할 것을 엄숙히 선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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