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충호 박사

[동양일보]▷7월 19일자에서 계속

●민족교육의 발전(2)

학교 만들기 20년간의 상황을 통계로 나타내면 다음 <표>와 같다(일본교육학회편, <재일조선인과 그 교육> 자료집Ⅱ, 1972년.).



이와 같이 재일조선인의 민족교육의 제도적 중핵인 조선인 각급 학교는 해를 거듭하면서 충실을 더해서 갔고, 1950년대 후반에 취해진 다음 3개의 조치는 그와 같은 발전을 더욱 확고하게 뒷받침하였다.

첫째는 조선대학교 창설과 그에 의한 민주주의적 민족교육의 체계적 완성이고, 둘째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부터 교육 원조비를 보내기 시작한 것이고, 셋째는 공화국으로 귀국사업이 실현된 것이다.

교육 원조비는 민족교육의 물질적, 정신적 토대를 확실하게 굳힌 역할을 다했고, 귀국의 실현은 재일조선인 청소년들의 마음속에 조국의 모습을 정착시키고, 동시에 민족교육의 구석구석까지 조국의 숨결을 보급함과 동시에 당시 일본학교에 재학하는 조선인 학생들에게도 민족교육을 받는 의욕을 불러일으킨 유력한 원동력으로 되었다.

조선대학교는 초등․중등의 민족교육 발전의 필연적인 결과로서 1956년 4월에 창설된 고등교육 기관이지만, 그 창설의 이유에 대해서 이렇게 진술하고 있다(조선대학교, ‘조선대학교의 인가에 대하여’ 1967년 9월.).

하나는 “조선 고급학교가 각종 학교인 것을 이유로 일본의 문부성 당국이 조선 고교 졸업생들이 일본 대학에 진학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재일조선인은 자기들의 대학을 설립하지 않으면 고등학교 이상의 교육은 받을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교육의 기회균등의 원칙과 학문 연구의 자유를 실현하기 위해 조선대학교의 설립이 절실하게 요망되었다.”

또 하나의 이유는 “140여 개의 조선인학교의 교원을 자력으로 양성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었다.” 즉 조선인학교에서는 일본어도 물론 정규과목으로 가르치고 있지만, 모든 과목을 모국어로 가르쳤고, 조선어를 비롯하여 조선의 역사․지리․음악․민속 무용 등의 수업이 중심으로 되어 있으므로 일본의 대학만 졸업한 것으로는 조선인학교의 교원이 되는 것은 어려운 것이다. 이 때문에 조선인학교의 교원은 조선대학교에서 양성하는 수밖에 없다.” 이러한 두 가지 이유에서 창설된 조선대학교는 1956년 4월에는 2년제 대학으로 발족하였다가 1958년에는 4년제 대학으로 되고, 1959년에는 현재의 위치인 오히라마치(小平町)로 이전하여 학교 건물의 시설 등을 충실히 갖추고, 1965년부터는 2년제 사범 과를 병설하기에 이르렀다. 현재 문학부, 역사․지리학부, 정치경제학부, 이학부, 공학부 이외에 2년제의 사범교육부가 있고, 학생 전원이 기숙사제로 집단 교육을 중시하고 있다. 조선대학교의 창설로 소학교부터 대학까지의 일관된 학교제도를 갖추게 되었고, 민족교육은 제도상 새로운 발전 단계에 도달했다.

조선대학교는 “일본에서 민주주의적 민족교육의 최고학부로서 진정한 과학적 이념에 기초한 학문의 연구와 교수를 통해서 전문지식을 탐구하고, 민주적 도덕 품성을 함양하며 고상한 애국주의의 사상으로 교양된 유능한 인재를 육성함으로써 제일 조선 동포의 인권 옹호와 부강한 조국 건설에 공헌한다”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조선대학 학칙 제 1조). 그 바탕에서 조선대학생은 일본에서 나고 자란 자들로 모국어의 습득과 조국의 역사, 과학, 문화 등의 학습에 힘을 쏟고, 조선인이라는 자각과 긍지를 깊이 몸에 배어 가게 하는 것과 동시에 전문지식을 학습하고, 노동에 대한 존경심을 기르고, 애국주의와 집단주의를 통일한 새로운 형태의 인텔리겐치아로 스스로 성장시켜 간다.

기숙사(1961~62)와 강당․도서관(1962~64)을 교직원․학생들이 자력으로 건설한 것은 그 전형적인 표현인 것이다. 이 건설 노동의 과정에서 한편으로는 “함께 노동하는 가운데, 노동에 대한 인식이 바뀌었다. 노동이야말로 모든 행복의 원천이고, 기쁨이 있다고 하는 생각하게 되었다”(이학부 3년생)는 것과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분명히 일은 고달파, 피곤해, 하지만 참으로 즐거웠다. 일본의 고등학교 출신인 내는 국어 시험을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되었으므로 별도로 공부 시간을 만들어 내는 데 고심했다. 좋은 환경은 게으른 자가 되기 쉽지만, 어려운 가운데서 공부하려고 하는 자세를 갖지 않을 수 없다. 이런 환경에서는 오히려 공부가 더 잘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역사 지리 학부 1년)라고 하는 상황이 생겼다('신세대' 1964년 7월.). 이것은 일본 사회라는 조건에서 노동과 교육을 결합하는 최고도의 형태일 것이다. 이렇게 해서 노동을 사랑하고, 애국주의와 집단주의 사상의 기초를 세우고 전문지식을 체득한 청년 인텔리겐치아가 양성되고, 또 한 이들 청년의 다수가 민족교육의 교사로서 활약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민족교육의 발전을 조국과 굳게 연결해 더욱더 박차를 가하게 된 것은 1957년 4월부터 조국에서 보내온 교육 보조 및 장학금으로 인해서였다.

이것은 말할 것도 없이 조선 인민의 노동 성과의 일부이고, 조국의 인민들로부터 재외 교포 자녀들에게 대한 따뜻한 선물이었다. 이는 1972년 12월까지 계속되어 47회, 총액 129억 원의 거액에 달하고 있다(1972년 12월 현재).

김일성 수상은 1955년 8월 재일조선인의 조국 방문자들에게 민족교육에 필요한 비용과 장학금을 보내고, 동시에 조국으로 진학을 희망하는 학생들을 받아들인다고 약속하였다. 그러나 일본 정부가 한국 정부와의 관계 악화를 구실로 그 실현을 방해했기 때문에, 겨우 2년 후인 1957년 4월부터 실시되었다. 김일성 수상은 “재일동포 자녀가 모두 일본에서 태어나 조국의 말과 생활 풍습을 알지 못하고, 특히 일본의 반동 지배층이 재일동포를 일본인에게 ‘동화’시키고자 집요하게 책동하고 있는 조건에서 재일조선인 청년에 대한 교육 사업은 단순한 교육 사업이 아니고, ‘민족을 되찾는 사업’으로 중요한 민족적 과제라고 가르치고”, “재일동포 자녀에게 반드시 민주주의적 민족교육을 하여, 그들을 사회주의 조국의 훌륭한 일꾼으로 육성해 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거듭 강조하였다(白峯, '金日成傳 Ⅲ' 1970, p.407.).

이러한 관점에서 김일성 수상은 계속 노력하여 “우리는 재일조선공민의 권리를 옹호하고, 생활조건을 보장하기 위해 계속 노력하고, 그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 교육 원조비와 장학금을 계속 보낼 것이다. 일본에 사는 조선 공민의 자녀를 교육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이다”고 그 방침을 제시하고 있다( 조선총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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