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온 길 30년, 가야 할 멀고 험한 길

안수길 소설가

[동양일보]1. 지역신문의 역할 – 지방자치와 주민의 알 권리.

‘적의敵意 있는 신문 네 개가 있으면 천 개의 총검보다도 두렵다.’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3세(재위 1852~1870)의 말이다. 그는 두 번째 유배지를 탈출, 100일 천하를 누렸던 나폴레옹 1세의 조카였다. 숙부 몰락 후, 망명했던 그는 귀국하여 정계에 투신, 국민투표로 대통령이 됐으나, 여론을 무시하고 ‘나폴레옹 3세’로 황제에 등극했다. 그 후, 의회주의 정치를 원하는 여론과 외교정책 실패에 대한 국민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일으킨 프로이센과의 전쟁에 패하여 영국으로 망명, 사망했다. 권력의 양극점을 오갔던 파란만장한 생애 중에서, 그가 넘기 어려웠던 장벽이 국민 여론이었고, 가장 두려워한 것이 신문이었다.

통치자들의 의식 속에 자리 잡은 신문의 존재는, 정적의 도전이나 충신의 간언 못지않게 두렵고 무거운 것이다. 따라서 국민을 대신해서 권력을 견제, 감시하고 여론을 제시하는 신문의 역할은 엄중하다. 독재자들이 언론을 경계하고 탄압하려 하는 것은, 그만큼 언론의 영향력이 크기 때문이고, 언론인을 ‘무관의 제왕’이라 일컫는 까닭도 역시 그 역할의 엄중성 때문이다.

전제주의 군국주의 공산주의, 명칭이야 어떻든 권력을 독점, 국민을 순치馴致, 조종하는 독재정치는 점차 사라져가고, 국민이 권력의 주체인 민주정치가 대세다. 이제 통치자는 국민 위에 군림하는 지배자가 아니라, 3권분립에 따라 위임받은 권력을 수행하는 지도자로 바뀌었다.

중앙정부로부터 특정의 행정 권한을 위임받아 지역주민에 의한, 지역 실정에 맞는 행정을 펼치도록 하는 지방자치단체에도 3권분립의 원칙은 적용된다. 광역/기초를 막론하고 주민 의사를 대변할 지방의회가 있지만, 주민의 눈과 귀와 입을 대신할 지역 언론의 역할 또한 필수다.

혹자는 중앙신문이 숱한데, 지방신문이 왜 필요 한가라고 하지만, 이는 지역 행정에 참여할 주민의 권리를 포기하는 것과 같다. 지역신문은 주민의 권리 대행자요, 민의와 행정의 조화를 위한 소통창구인 동시에, 지역문화 창달의 견인차다. 자치를 빙자한 행정의 독주, 오류를 막고 명실상부한 자치행정, 지역특성에 맞는 합리행정, 주민복지를 위한 위민행정의 달성을 위해서는, 중앙신문과 같은 비판과 조장의 양날의 칼을 가진 지방신문의 역할은 막중하고, 주민의 자긍심을 높이는 동시에 갈등을 해소하고 단합을 이끄는 중재 역할 역시 큰 것이다.

‘신문 없는 정부, 정부 없는 신문 중 그 어느 쪽을 택하겠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서슴지 않고 후자를 택할 것이다.’라는 제퍼슨(미국 정치가‘의 말은 비단 중앙정부, 중앙신문 만을 두고 한 것이 아니다.



2. 이 땅의 푸른 깃발 – 이 시대 지키는 자존심

동양일보는 충청지역의 지방신문 중 후발주자에 속한다. 선발지방지 충청일보(46,03), 대전일보(50.11) 등의 70여 년 역사에 비해, 동양일보 역사 30년은 아직 일천한 편이기 때문이다.

1991년 12월 29일 창간호 발행 이후, 30년간 지령 8천 호가 넘었고, 발행 부수 1만 4천여 부로, 선발 지방지를 따라잡거나 혹은 추월했다. 충청인의 자존심을 지킨다는 중책을 자임한 후, 길지 않은 사력社歷에도 불구하고, 전국 선발 지방지들에 못지않는 성장을 해 온 것이다.

왕재王材와 왕대大竹는 싹부터 다르다 했다. 출발부터 자체제작 시설을 완비하고, 편집국의 완전 전산화, 무가지 없는 신문, 최소인원의 합리적 경영을 추구해온 결과요, 80여 창간 사원들이 언론인으로서의 사명을 위해 지공무사至公無私의 전통을 세우고, 후임 사원들이 그 전통을 이어, 독자들의 손에 신뢰로운 신문을 전했기에 가능한 일이다. 동양일보가 확보한 오늘의 위상位相, 현재의 사세社勢는 거대자본이 급조한 화려한 누각이 아니라, 철저한 사전계획과 준비로 왕대의 싹을 틔우고 합리적 경영으로 그 싹을 키워 온 열정의 결과인 것이다.

동양일보 사시社是가 ‘이 땅의 푸른 깃발’이다.

푸른 깃발...., 푸름은 젊음과 희망의 상징이요, 깃발은 전진과 도약의 상징이다.

충청인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희망적인 미래를 제시하고, 민관 일체로 지역발전을 위한 도약의 촉진제가 되고자 하는 것이, 동양일보 창간 이래의 일관된 길이요 경영 방침이다.

어쩌면 제호에 ‘동양’을 붙인 것은, 왕대의 싹을 왕대답게 키워, ‘동양 천지’로 벋어가는 울창한 죽림, 푸른 깃발을 휘날리며 동양 각지로 한국의 소식, 한국의 문화를 퍼 나르는 ‘동양인의 신문’이 되겠다는 원대한 포부를 뜻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원대한 포부의 실현 가능성이, 외부의 시각에도 긍정적일지는 아직 미지수다.

비판과 조장, 양날의 칼은 지닌 언론이 지켜야 할 제1과 제1장의 덕목은 무사공정이다.

이제까지 걸어온 길에, 주민의 눈과 입을 대리하는 지방행정 감시자로, 주민에게 필요한 정보의 전달자로, 그 역할수행에 하자는 없었는지, 외부의 판단 이전에 꾸준한 자체 점검과 반성이 있어야, 푸른 깃발을 들고 전국으로, 동양 각지로 나아갈 발전 동력이 축적될 것이다.

사견과 사익에 얽매이지 않고, 친분과 명분을 초월하고, 부귀나 권력에 구애되지 않고, 냉정한 중립적 판단으로 사안에 대한 비판, 혹은 조장자로서의 역할수행을 제대로 하고 있는가?

주민의 피부에 닿는 정보, 지역 행정시책과 사회 변동상황, 주민 의식개선을 위한 각종 정보의 전달자로서, 발로 뛰고 몸으로 부딪치는, 무관의 제왕다운 기자정신을 발휘하였는가?

지역신문 중, 출발이 늦었음에도 동양일보가 오늘과 같은 발전을 이룬 것은, 경영진과 기자들이 일심동체로 사시구현을 위한, 푸른 깃발의 기수가 되고 언론인의 사명 수행에 진력해 왔다는 증거지만, 어떤 신념이나 행동도 답습하게 되면 관행이 되고, 관행은 정체를, 나아가 도태를 부른다. 만족 또한 마찬가지다. 누군가가 ‘만족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 했다.

이 시대의 자존심, 충청인의 자존심을 지키고자 하는 동양일보의 노력은, 그 노력의 크기만큼 주민의 신뢰와 기대는 커질 것이다. 그런 기대에 부응하려면, 관행 배척과 만족에의 안주를 경계, 난관 앞에서 ‘왜’와 ‘어떻게’를 되뇌면서 극복할 방도를 찾아야 할 것이다. 전장의 기수는 점령한 고지에 안주하지 않는다. 새로운 전장, 그 선두에서 앞으로, 앞으로 달려나간다.



3. 평범한 사람들의 빛남을 위하여 – 시민의 자존감과 주인의식

권력이나 재화, 명예를 가진 사람들은 그들끼리 어울리며 그들만의 관심사에 관해 소통한다. 영향력이 큰 만큼 대중도 보도 매체도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에 주목한다. 가진 만큼, 사회 기여도가 높을 것이므로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들은 외롭지 않다.

그러나 평범한 사람들은 사회 관심 밖으로 밀려난 소외자다. 그들의 삶에 관심을 갖고 시선을 돌리는 이들이 없다. 평범한 사람들, 존재감 없는 소외자들의 처지는 그래서 늘 외롭다.

‘평범한 사람들의 빛남을 위하여’

이 색다른 구호는 ‘이 땅의 푸른 깃발’이라는 동양일보의 사시社是 구현을 위한 신문제작 정신이다. 소외자들에게 표현의 기회와 참여의 장을 열어 주고, 어울려 소통하는 기쁨과 함께 자기 존재감을 확인케 하는 신문을 만들겠다는 취지다. 지면의 특성화, 경영의 차별화를 통하여 평범한 주민들의 주인의식을 일깨워, 보다 적극적이고 활기찬 삶을 누리게 하려는 것이다.

동양일보는 특정 분야의 전문지가 아니고, 어느 단체나 특정계층의 대변지도 아니다. 성격상일반 대중, 모든 독자를 대상으로, 모든 정보를 제공하는 종합일간지다. 그런데도 존재감이 희박한 평범한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의 삶에 주목하고 이를 지면에 담아냈다. 이들의 소소한 역할도 지역사회발전에 기여 하는 바가 크다는 것을 소상히 밝혀, 그들이 곧 지역의 주인임을 자각하게 하고 그 가치를 ‘빛나게’ 하는 작업을 30년간 지속해 온 것이다.

지나치기 쉬운 평범한 이웃 사람들의 선행 미담이나 신상 동정을 알려주는 ‘이런 사람 이런 일’의 기사는 관심과 격려를 보내고 기쁨을 함께하는 사랑방 정담처럼 일체감을 높이고, ‘우리는 동호인’ 코너는 회원들의 수양, 수련 활동을 격려, 소양을 쌓고 일체감을 형성케 함으로써, 지역발전에 대한 공감대를 넓히고, 공동으로 대처하는 참여의식을 제고 해 왔다.

공공기관의 일선 업무 담당자들의 헌신적인 봉사상을 소개하거나, 업무 현장의 애로나 보람, 건설적인 의견을 제시하는 ‘이 사람’ ‘차 한 잔’ ‘프리즘’ ‘화제의 인물’ ‘현장에서’ 등의 코너는 음지 헌신자들의 사기를 높이고, 지역발전에 대한 관심을 공유하는 계기를 만들어 왔다.

평범한 삶을 따뜻한 감성으로 풀어내는 ‘동양 에세이’는 필자와의 공감을 통해, 독자의 삶을 성찰하고 ‘일상 속에 잠재된 가치’를 발견, 자기 정체성을 확인하는 동기를 부여해 왔다.

고정 지면을 통해 평범한 사람들의 삶과 그들의 생각을 관심의 대상으로 이끌어냄으로써, 그들의 존재감을 높여 온 것이 내면의 심리 자극을 통해 행동의 변화를 도모한 방책이었다면, 창사 이래, 꾸준히 실행해 온 체육/ 문화예술/ 청소년 등 여러 분야에 걸친 다양한 행사는, 참여자들과 어울려 활동하는 외적 자극을 통해 의식의 변화를 도모한 색다른 방책이었다.

창사 이래 동양일보가 벌여 온 이런 행사는, 선수나 전문가도 아니고 특별한 경력자도 아닌, 평범한 사람 누구나 참가할 수 있는 일종의 ‘개방된 축제’였다. 무리에 함께 어울림으로써 소속감과 참여의 기쁨을 누리고 추억을 만들어 ‘스스로 빛나게’할 자존감을 높이게 한 것이다. 체육관련 분야에 ‘거북이마라톤대회’등 5개 종목, 청소년관련 분야에 ‘만물박사선발대회’등 5개 종목, 문화예술 분야에 ‘시낭송경연대회’등 8개 종목, 그 외의 다양한 행사 중 격년제로 혹은 수시로 개최하는 행사도 있지만, 대부분 매년 정기적으로 개최하는 행사가 대부분이다.

신문 지상에 사연이 소개되거나 글이 실리고 이름이 활자화된다는 것은, 주위의 관심 대상이 되면서 그 존재가 확인되고, 격려 또는 공감이 따른다. 무명과 무관심의 그늘에 묻혔던, ‘누군가’ 그 사람은 ‘소외된 존재’가 아니라는 연대감 확인과 존재감 향상 효과를 낳는다.

어울려 즐기는 행사에 참여하는 것은, 무리 속에서 자신의 취미나 소질에 맞는 역할을 찾고 역량 향상을 꾀하는 좋은 기회다. 건전한 관계 맺기를 목적으로 승부에 집착하지 않고 즐기는 가운데, 개인과 개인 간의 동질성을 확인하거나 팀과 팀 간의 친목을 도모하는 행사는, 참여자들 모두에게 ‘우리는 한마음’이라는 연대감을 심어주고 일체감을 높이는 효과를 낳는다.

동양일보 고정 지면에 이름을 올리거나 각종 행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다만 평범한 사람일 뿐이지만. 그래도 그들의 존재와 삶, 그들의 의견과 역할은 사회의 버팀목이 될 만큼 소중하므로, 당연히 빛나야 할 사람들이다. 이들을 위한 동양일보의 노력에 동참하는 단체나 자원봉사자들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가치 있는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시/군별 ‘동양일보독자권익위원회’를 구성하고, 이들의 의견을 신문제작과정에 반영하는 것 역시, 평범한 사람들의 의사를 존중하고 참여의식을 높이고자 하는 가치 있는 일이다.



4. 가야 할 길 – 미디어 홍수시대, 신문의 역할

정보의 홍수시대, 미디어 홍수시대라 한다. 라디오 텔레비전 신문 잡지가 정보전달 역할을 도맡던 시대는 지난지 오래고, 거의 무한대 기능을 가진 컴퓨터와 지구촌 전체를 덮고 있는 SNS 전파망 덕분에, 휴대용 전화기 하나로 온갖 정보를 소화할 수 있게 됐다.

경제향상, 교육수준과 국민의식수준 향상, 정보량의 증가.... 이런 상황이라면, 정보수요자 증가는 당연하고, 따라서 신문 독자도 증가일로여야 할 텐데, 상황은 그렇지가 않은 것이다. 신속한 다량의 정보가 떠도는 SNS가, 불랙홀처럼 수요자를 빨아들이기 때문이다. 일부 유투버의 자의적 판단으로 과장 왜곡되거나, 출처불명에 사실무근인 불량정보가 혼란을 초래하지만, 삶의 질 향상을 위해서가 아닌, 당장의 흥밋거리를 찾는 사람들이 여기에 빨려드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생활 전반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능케한 SNS의 다양한 역할 중에서, 불량정보를 제공하는 부분은 수요자들의 자각으로 점차 정화되거나 외면받게 되고, 출처가 분명하고 정확한 정보에 수요자들의 신뢰가 쌓이게 될 것이다. 정보전달 방법과 속도를 획기적으로 변화시킨 텔레비전의 등장 초기에도 신문의 위축 우려는 없지 않았다. 그러나 정보의 성격에 대한 차별성, 정보접촉 시간과 공간의 제한성 때문에 그 우려는 기우가 되었다.

SNS에 떠도는 불량정보의 홍수로 인한 신문의 위축(?) 우려도, 결국은 기우가 될 것이다. 물론 무관의 제왕인 언론인 스스로의 노력으로, 정보수요자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낭비성 흥밋거리를 제공하는 일부 유투버들의 불량정보가 자연소멸 되도록 해야 한다는 전제가 따른다.

그 전제는 곧, 전력투구로 부당한 권력과 싸우며 부정부패를 파헤치고, 정의로운 사람들을 보호하며 국민의식을 바로 세울 수 있는 정확한 정보, 신뢰로운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다.

화려한 왕관을 쓴 제왕의 무기가 ‘통치권’이라면, 그 통치권을 감시하고 때로는 싸워야 하는 ‘무관의 제왕’에게 주어진 무기는 ‘언론권’이다. 국가 사회의 안녕을 지키고 국민의 권익 보호를 위해 주어진 무기다. 정의롭고 올바른 정보, 정확한 정보, 유익한 정보를 취재, 수요자들에게 공급하는 것은, 곧 전장에서 적과 싸워 이긴 병사가 국민에게 승전보를 전하는 것과 같다. 이러한 중대한 역할을 불량정보 매체들이 수행 가능할까? 불문가지이나 대비는 필요하다.

불량정보의 유해성을 알리고, 올바른 판단력을 갖도록 하는, 그 역할도 무관의 제왕에게 주어진 권리요 의무고, 종이신문의 위축 우려가 기우라는 것을 확인,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O.H. 솔즈버거(미국의 언론인)는 ‘신문의 가장 중요한 평가기준은 그것의 크기가 아니라 그것의 정신- 즉, 뉴스를 완전히, 정확히, 그리고 공정히 보도하려는 책임감이다.’라고 했다. 이를 위해, 기자들은 언제나 전란과 재난, 독재와 부정, 국민의 애환이 교차하는 사건 사고, 그 현장에 있었다. 때로는 탄압과 회유, 때로는 고통과 희생을 무릎쓰고 헌신 함으로써 국민의 알 권리와 참정권을 지키고, 나아가 건강한 민주사회 발전을 가능케 했다.

신문이, 기자들이 그 책임을 스스로 포기하지 않는 한, 불량정보 매체가 신문의 역할을 잠식한다는 것은 공연한 기우가 될 것이고, 이는 지방지와 전국지의 차이가 있을 리 없다.



5. 오래된 농담 – 신문기사와 처방전

40여 년 전 어느 날, 필자는 충청일보에 보도된, 짧은 1단 기사를 보고 고개를 갸웃했었다.

‘괴산군 ㅇㅇ학교(교장, ㅇㅇㅇ)에 화재’. 20여 행의 기사 끝에 적힌 취재기자 이름은 ‘ㅁㅁㅁ’. 취재원인 학교장과 취재기자는 부자父子간이었다. 아들의 이름으로 아버지의 관리과실 책임을 공개, 보도한 것이다. 고개를 갸웃거리던 필자는, 기사를 쓴 기자는 한 아버지의 아들로서가 아닌, 공정해야 할 언론인의 처지에서 결단을 내린 것일 거라고, 그 의지를 선의로 기억했다. 그 기억은 어느 선비의 서화書畫에 찍힌 낙관落款처럼 필자의 뇌리에 아직도 선명하다.

얼마 후, ㅁ 기자와 약사인 그의 형, 기억나지 않는 또 한 사람과 필자, 너덧 명이 동석한 자리에서 장난기가 솟은 필자가, 화재 기사를 상기시킨 뒤, ㅁ 기자에게 농담을 건넸다.

“그 건 불효막심한 일 아니요?”

역설적 농담에 당자는 어이가 없었던지 잠시 침묵인데, 기자의 형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건 그려.”

진의가 아니더라도 필자의 농담에 동의를 한 셈인데, 침묵하던 ㅁ 기자가 즉시 반응을 했다.

“약사들은 같은 감기환자가 오면 친한 환자와 낯선 환자한테 다른 처방약을 줍니까?”

“그 건 안 되지. 증상이 같으면 처방도 같아야지.”

“약 처방에 환자를 차별해서 안 된다면 신문기사에도 차별이 있어서는 안 되지요.”

농담의 발설자인 필자도, 거기 동의를 한 형도 유구무언의 처지가 됐었다.

‘대인춘풍 지기추상待人春風 持己秋霜’이라 했다. 남을 대접할 때는 봄바람처럼 부드럽게, 자기 소신을 지키는 데는 가을 서리처럼 매섭게 하라는 뜻이란다. ㅁ 기자의 논리를 반박하려면 이런 경구는 물론 ’대의멸친‘이니 ’읍참마속‘이니 하는 고사성어도 헛소리로 격하시키고, 언론인에게 신념을 요구하거나 공정을 요구하지도 말고, 허술한 정보도 탓하지 말아야 할 판이었다. 그때, 그 기사를 쓴 장본인이요, 오래된 농담의 상대였던 ㅁ 기자가 동양일보 창간의 주역이었고, 30여 년, 그 무거운 등짐을 지고 온 경영책임자, 현재의 조철호 회장이다.

짤막한 1단 기사를 오래 기억할 사람도, 취재원과 취재기자가 부자간인 걸 아는 사람도 많지 않겠지만, 그 기사를 통해, 언론인의 추상秋霜 같은 결단을 읽어낸 사람은 더욱 드물 것이다. 기자 시절의 신념이 그러했다면, 경영책임자가 된 지금이라고 변했을 리는 없을 거고, 서릿발 같은 신념은 하강기류로, 젊은 기자들의 뜨거운 열정은 상승기류로, 상호순환하는 가운데 ‘푸른 깃발’의 기수들은 가야 할 길이 멀고 험하더라도, 거침없이 앞으로 달려나갈 것이다.

또한 ‘평범한 사람들의 빛남을 위하여’ 푸른 깃발을 앞세운 동양일보의 기사, 거기 담긴 정확성과 공정성 역시 탄탄한 신뢰를 다져나갈 것이다. <*>

安 秀 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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