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충호 박사

[동양일보]●민족교육의 구조(2)

교과과정 안이 재일조선인 청년의 현실과 미래에 맞추어 고안되어 있듯이 교과서도 공화국(북한)의 교과서를 그대로 사용할 수는 없었다. 일본 사회의 조건에 맞추고, 일본에서 자라난 조선의 아이들에게 맞도록 대시 편집해야 했다.

교과서 편집은 (1)왕래의 자유가 없으므로 편집자 자신이 공화국의 실정을 보지 못한 관계로 그 실정을 반영하기 어렵고 (2)학생 구성이 일률적이지 않고(도중에 편입생, 야간학급의 학생 등), 게다가 공화국의 아이들과 심리적인 발육이나 언어 습득이라는 점에서 현저하게 차이가 나므로 재일조선인 아이들에게 맞도록 구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독자적인 어려움을 안고 있었다.

이상과 같이 공화국의 교육정책에 따르면서도 재일조선인의 민족교육은 그 목적, 제도, 커리큘럼, 교과서 등 모든 부분에 걸쳐서 일본 사회의 조건과 거기에서 자란 조선 아이들의 생활적, 심리적 특수성을 고려해서 독자적인 교육 활동을 전개해야 했다. 그러므로 학교 제도도 1965년 당시 공화국에서는 인민학교(4년), 중학교(3년), 기술학교(2년), 고등기술학교(2년), 대학(4년 및 5년)이라는 체계를 취하고, 그중에서도 특히 중등교육 단계는 모두 기술교육 제도로 짜여 세계적으로도 탁월한 노동과 교육의 결합을 제도화시켰지만, 재일의 조선인 학교에서는 그것을 그대로 도입할 수 없고, 일본의 학교 제도에 맞추어서 재구성되었다.

특히 일본학교에 다니던 조선인 학생의 전·입학을 고려해 넣으면 일본의 학교 제도와의 연결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민족교육의 독자적 구조는 교육 경영의 면에도 적용되었다. 민족교육은 조선총련이 전체적으로 지도하고, 직접적으로는 그 교육부가 담당하였다. 또 재일조선인 교직원동맹이 교사의 조직체로 자주 연수에 힘쓰면서 학생지도를 담당하였다. 그러나 그것도 민족교육의 권리가 지켜지고, 돈이 있고, 건물이 있지 않고서는 불가능했다. 이 측면을 담당한 것이 재일조선인 교육회였다.

교육회는 (1)권리 수호 (2)학교 운영·건설·설비 (3)교육 원조비의 관리 (4)장학 사업을 담당하였다. 이들 3개 교육 조직이 협력하여 조선인 학교 운영에 관계하였는데, 이는 교육행정의 자주적인 창의라고 말할 수 있다.

조선인 학교 재정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재정은 (1)공화국에서 보내온 교육 원조비 (2)교육회비(학생의 부모가 냄)와 수업료(중학생 이상) (3)찬조금(일반의 재일조선인의 기부금)으로 이루어졌고, (1)과 (2)를 기본 수입이라 하며, 이것은 각각 30%씩이었다. 나머지 40%가 찬조금이다. 그러므로 조선인 학교 재정의 70%는 재일조선인이 갹출하는 것이다. 일본 정부의 원조는 전혀 없었다.



●한국학교의 상황

조국 분단은 한국전쟁의 체험을 거쳐서 재일조선인 사회 속에서도 점점 반영되었다.

특히 일본 정부는 1950년부터 개시한 한일 교섭 및 조약 체결의 과정에서 재일조선인에게 ‘국적’의 선택을 강요하는 방법으로(단, 조선 국적은 국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기호로 칭하지만) 그 기준을 한층 강하게 했다. 교육의 장면에서도 조선인 학교와는 다른 방침을 취한 한국학교의 경영이 시도되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보아 온 바와 같은 조선인 학교의 발전에 비해서 한국학교의 경우는 1950년대 이후 지금까지 도쿄, 교토, 오사카 3개 지역에 3 학원 수준이었다(나중에 오사카의 건국학교가 전향 하여 4개교).

구라시키(倉敷)․ 다가츠카(寶塚) 등의 지역에서도 설립은 되었지만, 사설학원 형태 이상으로는 발전하지 못했다.

한국학교도 일본에서 각종 학교 인가를 받음과 동시에 각각 60년대 초에는 본국 정부의 인가를 받아, 본국 교육과의 연계를 유지하였다. 단, 이 연결을 긴밀하게 된 것은 뒤에 다시 언급하겠지만, 한일 조약 체결(1965) 이래의 일이다.

한국학교는 각각 초등부, 중고등부가 있지만(단 京都 한국학교에는 초등부가 없음), 그 재적 학생 수는 초등부 466명, 중등부 372명, 고등부 476명이고, 3교 총계 1314명이었고(1971년 현재) 조선인 학교에 비해 취하자 수는 훨씬 적었다.

한국학교의 애로사항 중 하나는 조선학교와 마찬가지로 각종 학교 자격이기 때문에 일본의 국공 사립의 대학 수험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심지어는 오사카 한국학교 이사의 아들조차 대학 진학을 고려해서 일본학교에 다니고 있다고 한다(‘東洋經濟日報’ 1972년 1월).

이와 같이 한국학교는 보급의 면에서 커다란 한계에 부딪히고 있지만, 교육의 질적인 면에서도 문제를 안고 있었다.

이 학교에서도 ‘민족주체성’의 회복을 목표로 내걸고, 한국어의 학습을 중시하고 있었다. 예를 들면 “일본의 학교를 졸업한 동포들은 ‘국어’라고 하면 일본어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학생들은 그 점에서는 분명한 자각과 주체성을 갖고 있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상황을 볼 수 있지만(‘大阪韓國 高校校長’ 앞의 ‘동양경제일보’), 문제는 그것이 모든 교육과정 가운데서 철저하게 전개하지 못한 점에 있다. 한국인 측의 스스로도 그렇게 지적하기도 했다.

한일조약 조인 직후인 1965년 7월 대한교육연합회(한국 유일의 교직원 단체)의 박명환(朴明煥) 부회장은 교토 한국학교를 시찰하고, “소학교는 일본인 학교에서 졸업했으므로 국어, 역사 교육에 애로가 있었고, 민족 주체 의식의 교육 내용도 불충분한 것이다”고 하는 감상을 술회하였고, 민족교육 측면에서 한국학교의 후진성 보완하기 위해 4가지 개선책을 제안했다(‘신교육’ 1965년 9월호.).

즉 “첫째로 계통적인 학교 정비가 이루어져야 한다. 둘째 교육 내용의 체계적인 기본이 수립되어, 민족 국가관을 확립하는 교육, 바꿔 말하면 민족의 혼을 통해서 국가의 중요성을 올바르게 가르치는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 셋째로는 동포 자녀 교육에 대한 일본 정부의 정책상의 일대 계획이 이루어져, 교육 내용, 교육 제도, 교육 과정, 교육 재정, 교원의 질과 수급 등의 재검토되어야 한다. 넷째로는 동포 자녀 교육은 동포의 손으로라는 동포 자신의 민족적 자각에 따라 학교 건설에 나서는 일대 결속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이와 같은 여러 가지 점을 뒤집어 보면, 민단의 교육 활동의 약점을 지적한 것이었다.

이와 같은 후진성을 시정하기 위해 한국 정부는 1965년 이후 정책적으로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한국학교의 지도 육성, 교육문화센타(한국어 교육의 보급이 주 임무로 하여 18개소 설치)의 확충 강화, 모국 방문의 장려(하계학교를 조직) 등의 방침으로 대사관, 영사관에 장학관을 파견하여 근무하도록 배치하여 그 지도를 맡겼다.

또 3개의 한국학교에도 본국에서 교사가 파견되게 되었다.

이와 같이 강화되는 한국 정부의 직접 지도로, 한국학교는 ‘반공 민주 정신에 투철한 애국 애족’을 설명하고, ‘국민교육헌장’의 규정, “조국 근대화의 기초로서의 인간 교육과 투철한 반공 애국 정신 교육을 적극적으로 실천”(대사관 지도 방침)하는 과제도 떠맡게 되었다. 또 이러한 지도를 받아, 민단 중앙에서도 그 내부에 교육위원회를 두기로 하고(1976년 12월), ‘재일조선인 교육 헌장’을 정했지만(1969년 3월), 이것은 구호에 그친 듯하다.

이리하여 도쿄 한국학교의 경우는 ‘한국인으로서의 자각과 자부심을 갖춘 인간’을 육성하고, 나아가서 ‘재일한국인 사회와 모국 발전에 참여’하는 참여 의식의 앙양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그러나 실천의 현장에서는 국어, 도덕, 역사, 지리의 교과서 본국의 교과서를 그대로 사용하는 것 이외는 다른 여러 교과는 일본의 검정 교과서가 채용되기도 하였다. 학생들의 한국어 습득에 차이가 있어서 1980년대까지는 언어 사용을 일본어와 한국어를 같이 설명하기도 하여 철저한 민족성 교육에는 상당히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이와 같은 실정에 대해서 같은 입장에 있는 재일한국청년동맹에서 다음과 같은 비판이 가해졌다(‘재일조선인의 역사와 현실’ 1970년, 384~385쪽.).

첫째는 “한국학교에 있어서 민족교육이 불충분한 것”이다.

즉 “한국학교 출신자의 대부분이 한국어조차도 만족스럽게 습득하지 못하고, 또 민족 주체 의식이 희박하였다. 그것은 교육 방침과 교과의 배분에 문제가 잠재하고 있다. 역사 교육에 관해서는 국어와 더불어 민족교육의 근간을 이루는 것인데, 특히 중요한 근대사 부분이 매우 경시되고 있다. 근대사를 경시하는 민족교육은 있을 수 없고, 견고한 민족의식의 싹틈은 기대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다.

둘째는 “민족학교의 절대 수가 부족하다.” 그것은 “재일동포 지원 때문에 도쿄, 교토, 오사카에는 한국학교가 설립·운영되고 있지만, 각지에 산재한 동포 자녀를 수용하는 데는 아무래도 절대 수에 있어서 부족한 현상을 초래하고 있다”는 까닭이다.

그리하여 당면 과제로서는 “개별적으로 자신의 체험, 아버지, 어머니의 역사를 점검하면서 민족교육의 필요성을 모색하고, 올바른 민족의식과 소양의 양성, 민족적 주체성의 확립을 도모하고, 조직적으로는 그와 같은 장의 제공, 자료의 작성, 민족교육의 탄압에 대한 반대 투쟁을 전개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다.

다시 말하면, 재일조선인의 현실에 뿌리 밖은 민족교육의 발판을 만들 것을 요구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현재 재일조선인의 민족학교는 각각(남한과 북한) 본국의 교육정책에 따라 두 계통으로 나누어졌다.

분명 학교 보급의 확대, 민족교육의 철저한 깊이와 교육 방법의 혁신성 등의 여러 가지 점에서 조선인 학교(조총련계)가 우수하다.

그러나 한반도 통일의 입장에서, 또 그러한 움직임이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쌍방의 학교 교육은 대립하기보다 교류를 심화시키고, 일본인 학교에 다니는 한국인 청년들이 민족화에 책임을 진다는 입장에서 민족적으로 통일할 수 있는 교육의 형성이 요망된다.

또 일본 정부의 한국인 학교에 대한 적대 정책의 칼날이 조선인 학교로 기울어져 오고 있는 상황도 있어서, 오늘날 일본 국민 측은 재일조선인의 민족교육이라고 말하면, 한국학교보다 조선인 학교 운영에 관해서 생각하기가 쉽다.

하지만 여기에 있어서도 한반도 통일이라는 시점에서 재일조선인 교육을 재고하는 자세가 요구된다고 하겠다(일본과 북한과의 관계 악화).



좀 더 부언해 보면, 조선인 학교(조총련계)에 비해 한국학교(민단계) 민족교육에 대한 미비점을 보완해야 한다는 많은 지적이 있었다. 그래서 한국 정부에서는 1970년대에 와서 문교부에 재외동포교육과를 설치하고, 또 서울대학교 부설 재외국민교육원(1992년부터 국제교육진흥원)을 설치하여 민족교육을 지원하게 되었다.

교육부에서는 일본 전국에 한국어, 한국사, 그리고 한국의 문화와 전통을 중심으로 교육하는 한국교육원을 일본에 54개소를 설치하여 교사를 파견하여 그 교육을 담당하게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국제교육진흥원에서는 단기교육과정과 대학 진학을 위한 예비교육과정을 설치하여 재외동포 자녀들의 모국 수학을 하도록 마련했다.

이와 같은 지원을 모두 재일동포들을 위한 민족교육의 시작으로 하여, 점차 글로벌사회에서 각국에 거주하는 동포들이 600만명이 넘게 되어 교육부 재외동포교육과와 국제교육진흥원의 기능이 확산하여 갔다.

이제는 세계에 한국어 보급 차원에서 교육부는 물론이거니와 외교통상부, 문화관광부에서도 지원하고 있다.

한국어 보급 차원에서 1998년 일본을 중심으로 시작한 한국어 능력 시험(3.000명 응시, 필자가 주일본 한국대사관 교육관 근무 시 업무 담당자)이 이제는 세계 각국에서 매년 실시하고 있다.

이러한 한국 정부의 움직임에 부응하여 일본 정부에서도 한국어를 일본의 대학 수능시험과목에 외국어로 선택할 수 있도록 했다(1999년 김대중 대통령 도쿄 방문 시 문부성의 선물, 문부성에서는 처음 과목 명칭을 조선어→한글로 제의했는데, 이를 필자가 담당자로 시험과목 명칭을 한국어로 해야 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여 한국어로 명명하였음).

동양일보TV

저작권자 © 동양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