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충호 박사

[동양일보]●1966년 4월 외국인 학교 법안을 둘러싼 대결의 시작

일본은 1966년 4월 제51회 통상국회에서 ‘66년도 예산 심의’가 종료됨과 동시에 정부·자민당은 외국인 학교 제도 창설의 구상을 분명히 했다.

문부성과 자민당은 한일조약을 교육적인 측면에서의 ‘뒤처리’로 규정하고(나다오(灘尾)문부대신, 1967년), 그 문제점의 조정을 서둘렀다. 그러나 그것이 자민당 문교 조사회 외국인 학교 소위원회(위원장 아라키(荒木萬壽夫 전 문부대신)의 ‘최종요강’으로 정리되고, 동월 8일, 자민당 문교부회·동 조사회 합동회의와 정부·여당 연락 회의에서 승인되었다.

다음 날 9일 자 신문은 이것을 조선인 학교 단속하는 정책으로 일제히 보도하고, 아울러 필연적으로 야당의 반발과 국회에서 논쟁이 일어날 것이라는 전망을 전했다. 여기에 정치적 과제로 외국인 학교 문제가 공적으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그 ‘요강’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학교 교육법을 개정하고, 외국인 학교 제도를 창설한다.

△재일 외국인 자녀를 대상으로 수업 연한 1년 이상, 정령(政令)에 정한 규모 이상의 조직 적 교육을 한 시설을 외국인 학교로 한다.

△외국인 학교에서의 교육은 우리나라(일본)와 제 외국과의 이해 및 우호 관계 증진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고, 우리나라의 이익과 안전을 해치는 것은 안 된다.

△감독청은 문부성으로 한다. 문부대신은 외국인 학교의 설치·폐지 및 설비 자의 변경에 대해서 인가권을 갖는다.

△외국인 학교가 인가 조건에 합치되지 않는 경우, 설비·수업 등의 변경·명령·수업 등의 중지 명령, 학교의 폐쇄 명령을 내릴 수가 있다. 또 문부대신은 수업 내용에 대해서 보고할 것을 요구하고, 현장 점검을 할 수 있다.

△외국인 학교는 교장·교원의 임면, 교과서·학칙을 문부대신에게 신고해야 한다.

△이미 설립된 학교가 새로운 제도로 이행할 때 수반되는 인가 신청의 사무 및 신청의 권고는 도도부현(都道府縣) 지사에게 위임한다.

△수업료, 아동·학생의 징계에 관한 규정을 마련한다.

△외국인 학교만을 목적으로 하는 법인의 설립을 인정한다. 또 신고 의무 위반에 대해서도 벌칙을 정한다. 학교 경비는 설치자가 부담한다.

△이 제도의 시행은 법률 공포로부터 6개월 후로 한다. 이미 설립된 학교는 시행 후 1년간은 종전대로 한다.



‘요강’을 법률로써 외국인 학교를 규제하는 것을 분명히 한 후(제1항), ‘국익’개념을 도입하여 ‘반일교육’을 단속하는 기준으로 삼을 것을 표명하고(제3항), 이를 위해 외국인 학교 문부대신이 감독하는 간섭하는 법을 제시하고 있다(제2항 및 제4항 이하). 이는 조선인 학교 규제를 목표로 삼은 것이 분명했다.

이 ‘요강’의 정신과 세목이 법문화되어, ‘학교 교육법 일부 개정 법안’(1966년, 1967년), ‘외국인 학교 법안’(1968년)으로서 국회에 제출되었다. 즉 이 ‘요강’은 이후 3년에 걸쳐서 논의될 외국인학교 창설 안의 본체에 해당하는 셈이다.

‘요강’과 그 법안화가 전해지자, 이에 대한 항의·반대운동이 일제히 분출했다. 특히 ‘국익’ 조항에서 노골적인 재일 조선인의 교육침략 재현을 간파하고 여기에 비판이 집중되었다. 우선 당사자인 조선인 측은 엄하게 이것을 규탄했다. 조선총련 성명(‘일본 정부는 재일조선인 공민의 민족교육을 보장해야 한다’ 4월 9일)에 이어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 외무성 성명(4월 16일)이 나오고,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 사설(‘동화교육을 강요하려는 범죄행위’ 4월 16일)이 발표되어, 북한이 거국적으로 ‘격렬한 규탄’(외무성 성명)을 하기에 이른 것이다.

조선인 측은 외국인 학교 제도 창설 안을 ‘반일교육’이라는 구실 하에 재일조선인 공민의 학교를 마음대로 폐쇄하고, 그 민주주의적 민족교육의 권리를 말살할 것을 목적으로 한 것이라고 규정하고, 이것을 ‘국제법과 국제관례에 대한 공공연한 위반 행위’로 비난하였다.(외무성 성명)

더 나아가 이처럼 동화교육을 강제하는 것은 과거 언어와 역사와 문화를 박탈한 ‘저주받을 역사를 현재에 다시 반복하려고 하는 것」으로 식민지 교육의 역사를 상기시키고, 그 굴욕의 역사 때문에라도 조선 인민은 「일본 정부의 책동을 결코 허용하지 않을 것’임을 고하였다.(‘노동신문’ 사설)

가해자는 역사를 망각하고, 피해자는 역사를 잊지 않는다. 독립민족의 존엄에 뒷받침되어서 재일조선인은 민족교육를 받는 ‘신성한 기본적 권리’를 스스로 지키기 위해, 이후 매일같이 정부에 대해서 항의 활동을 추진해 갔다.

다른 한편 일본 국민 측도 앞에서 언급한 민교간(民敎懇)의 긴급 집회를 거쳐, 4월에 들어서, 먼저 지식인·교육관계자를 중심으로 법안화에 대한 반대의 의지를 잇달아 공공연하게 표시하였다. 대학이나 사회단체에 관계된 지식인들이 모임을 갖고 독립민족의 자주권을 다시 침범해서는 안된다는 입장에서 민족교육의 위기와 그 권리 옹호의 정당성을 호소하였다(우에하라(上原專祿) 외 50명-4월 4일, 법률가 단체-4월 4일, 오사카대학 제14대 학장, 교사 111명-4월 6일, 부인 단체-4월 8일). 또 일교조(日敎組)도 법안 반대활동과 각 지역에 민교간(民敎懇)을 조직하여 그 중심적 역할을 수행할 것을 조합원들에게 요구하는 내용의 지시를 내리고(4월 5일), 행동에 나섰다.

이런 차제에 ‘요강’이 발표되자 정당, 노동조합, 대중 단체 등도 일제히 반대의 태도를 분명히 밝히고, 정부에 이것을 제의함과 동시에 널리 정치적으로 긴급한 과제로써 행동하는 조직을 만들기에 이르렀다. 4월 12일에는 77개 단체가 결집해야 ‘재일조선인의 민주주의적 민족교육을 지키는 긴급 중앙 대표자 회의’를 열고, 공동성명을 결정, 정부·국회에 대해서 대중운동의 막을 열었다.

이들 일본 국민 측의 반대 논리는 거의 공통된 골격을 갖추고 있었다. 앞의 공동성명을 예로 들어보면, 첫째 외국인 학교 제도 안을 ‘한일조약의 구체적인 실시의 하나’로 파악하고, 그 폐기를 한일회담 반대 투쟁의 연장 선상에서 ‘민주 세력 전체의 투쟁’ 과제라고 규정했다.

둘째로 국익론에 의한 민족교육 압살(壓殺)의 논리를 비난하며, ‘소위 거기에서 말하는 국익이나 반일교육은 사토(佐藤)내각 및 자민당의 이익에 반한다고 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셋째로 일본 국민의 시각에서 보면, 조선인 학교 교육은 ‘조·일 친선의 교육’이라며 정부에 반론을 제기하였고, 이 사안은 조·일 친선을 만들어 낼 것인지 파괴할 것 인지와 관련된다고 주장하였다.

넷째로 외국인학교제도 안은 ‘재일조선인의 자주적 교육이란 기본적·민주적인 민족 권리를 유린하는 것’이고, 그것은 ‘세계 인권선언에도 국제관례에도 반한다’고 하여 정부가 도리어 거슬렀고 바로 그로 인하여 ‘한일 양 민족 관계에 골이 점점 더 깊어지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결론으로써 ‘재일조선인의 민족교육 권리를 보장하는 것’을 보다 긴요한 사항으로 확인하고, 정부·자민당에는 법안의 폐기를 요구함과 동시에 ‘평화 민주 모든 세력이 이에 투쟁할 결의’를 나타냈다.

이처럼 국제적·국내적인 반대 운동이 일어났고, 그 운동에 점차 국익=반일교육론 대 민족교육 권리 옹호론으로 대결 점을 집약시켜 가는 형태로 외국인 학교 제도 안은 당시의 정치 과제로 급속히 부상되었다. 매스컴도 이것에 커다란 관심을 두고 보도했다.

그러나 당시 신문의 논조는 반대운동과는 다른 의견을 발표해 왔다.

‘주권’국으로 당연한 법안이고, 단지 운영의 방법이 문제라는 사설을 싣고, 기본적인 입장(주권과 국익의 명목)으로는 정부 지지의 견해에 서고 있었던 것이다(‘아사히신문’ 4월 10일 자 사설, ‘마이니치신문’ 12일 자 사설, ‘요미우리신문’ 13일 자 사설, ‘주이치신문(中日新聞)’ 동상, ‘고베신문’ 14일 자 사설 등.).

일 예로 ‘아사히신문’ 사설을 인용하면, ‘외국인이 그 자신이 사는 나라에서 자제 교육을 위한 학교를 설립하는 데는 그 나라의 주권 규제를 받는 것은 당연하므로’, 외국인 학교 제도는 필요한 규정이라고 한 후에 ‘정부 당국이 말하는 반일교육의 규제가 북한계 학교에 대해 구체적으로 어떻게 적용되는가에 따라 불필요한 마찰을 초래할 우려도 없지 않다’고 말하고, ‘반일교육’이라는 명목하에 간섭을 심화시킬 수도 있음을 경고하는 태도를 보이었다.

모든 사설이 과거의 한일관계사를 염두에 두고, 조선인 학교 교육이 어디까지가 ‘민족교육’이고, 어디에서부터 ‘반일교육’이 되는지의 선을 긋는 데 고심하고 이것을 문제의 중심점이라고 지적하였다. 결국은 정부와 조선인 학교의 쌍방에 ‘양식(良識)’을 기대하는 정도에 그쳤다. 단 보도 면에서는 조선인 학교 소개를 적극적으로 소개하고, 사실에 근거하여 ‘반일’적인 것으로 볼 수 없는 모습을 전하였기 때문에 조선인 학교에 대한 여론의 관심을 넓히고, 이해를 바로 잡는데 공헌한 바가 컸다.

문부성은 반대 여론에 등을 돌리고, 4월 중에 ‘요강’의 법문화를 추진하고, 각종 학교 제도를 개편한다는 방침을 취하여 이를 ‘학교 교육법-일부 개정 법안’으로 정리했다. 이것은 학교 교육법 제83조의 각종학교제도를 분해하고, 새롭게 ‘전수학교’와 ‘외국인 학교’를 설치한다는 이질적인 두 가지 내용을 하나의 법안에 담은 것이었다. 여기에는 전자는 보호하고, 후자는 규제함으로써 각종 학교의 일본인 경영자와 조선인 학교를 교묘히 분열·적대시키는 의도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와 같은 법안 형식은 이후에도 유지되었다.

법안화에 있어서 문부성은 이 문제가 학교제도의 개편에 관련된다며 중앙교육심의회(회장 모리토(森戶辰男)) 임시총회의 개최를 요구하였다.(4월 13일) 그리고 ‘이미 북조선계의 학교 등이 반대 운동을 일으키고 있는 실정도 고려’하여 ‘불필요한 마찰은 일어나지 않도록 배려’한다는 요망을 덧붙이기도 하여 그 승인을 받았다.(‘요미우리신문’ 4월 14일)

그 후 법률안이 작성되자, 5월 13일에는 국회 상정의 각의 결정을 마치고, 국법에 따라 조선인 학교를 규제하기 위한 체제를 정비하였다.

그동안 전후 20년간에 걸친 일본 정부는 일관해서 재일조선인 교육을 억압하는 정책을 일관해 왔지만, 그 억압의 절차는 점령군의 지령이나, 문부성의 통달이었지 법률에 따른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이번의 법률에 따른 규제라는 억압 형식은 전후 처음 취해진 것이었다. 통달에 의한 규제에 견주어서 훨씬 규제력은 강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변화가 일어난 데에는, 한편으로는 한일조약 체결 때문에 법률에 관한 규제가 합법화되었다는 지배자 측의 요인도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조선인 학교를 둘러싼 한일간의 지지 세력이 강했다는 국민 측의 요소도 영향을 미쳤다. 즉, 한국전쟁 전야에 조선인 학교를 탄압할 때에는 점령군의 권력이 강했기 때문에 폭력으로 탄압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강화 후 재일조선인은 일본 국적을 이탈해서 외국인의 입장에 섬과 동시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위신도 높아졌기 때문에 조선 공민의 교육을 폭력적·비합법적으로 탄압할 수 있는 조건이 사라져버렸다.

여기에다 조선인 학교는 일본 사회에 정착하고, 일본 국민에게 이해와 지지를 얻어 냈기 때문에 그것이 일본의 도도부현(都道府縣)의 교육위원회에도 반영되어 한 통의 문부성 통달만으로 교육위원회를 얽어매기에는 어렵게 되었다. 사실 1965년 말에 문부성이 조선인 학교를 각종 학교로 인가하지 말라는 통달을 냈음에도 불구하고 부현(府縣)교위에서는 각각 인가를 해 주었다.

그러므로 종래 보다 더욱더 정비된 강력한 억압 형식을 채용해야만 했을 것이다.

이것이 법률 제정을 초래했고, 또 문부대신의 독자적인 외국인 학교 지배의 권한을 규정한 법조문으로도 나타났다. 이와 같은 반동적 사태가 이번에는 역으로 한일 양 국민의 한층 더 강력한 반대를 끌어내는 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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