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종윤 한국선사문화연구원장
[동양일보]땅 속에는 과거 인간의 활동과 관련된 풍부한 고고학적 기록 즉, 먼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인간이 살아오면서 남긴 흔적들을 잘 보존하고 있다. 이 기록은 다양한 종류의 물질자료로 남아 있는데, 그것이 유구,유물 및 동·식물유체 등이다. 이 기록들을 발굴해서 과거 인간의 활동과 환경을 밝혀낸다. 고고학자의 역활이다. 특히 문자가 없던 선사시대는 이 기록들이 중요한 정보의 원천이 된다. 퇴적물로 쌓인 땅 속은 인류역사의 기록을 잘 보존한 보물창고와도 같은 것이다.
청주에서 고고학적 조사가 이루어진지 올 해로 46년이 된다.그 동안 조사로 땅 속에서 청주의 역사를 밝혀줄 중요한 자료들이 찾아졌다. 1976년 두루봉 동굴 제2굴의 발굴조사가 청주의 첫 고고학적 조사이다. 불을 피웠던 흔적, 코뿔소·코끼리·곰·하이에나·사슴·원숭이 등 많은 동물화석, 석기, 얼굴모양 예술품, 인류화석 등이 찾아졌다. 청주에 구석기시대부터 사람들이 살았음을 알려주는 최초의 고고학적 기록들이다.
오송 만수리유적에서는 약 50만년 전의 석기가 발굴되었다. 약 5m 깊이의 땅 속에서 찾은 돌을 깨트려 만든 뗀석기 몇 점이 청주 역사의 시작을 알려준다. 청주 땅에 가장 먼저 삶의 흔적을 남긴 기록이다. 소로리유적에서 검출된 17,000년 전의 볍씨는 현재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볍씨로 벼의 기원지가 청주임을 알려주는 인류생명문화의 소중한 자산이다. 청주시 심벌 마크가 소로리볍씨를 상징화한 것으로 생명문화도시 청주의 상징성을 잘 보여준다. 그밖에도 청주에는 40여 곳의 구석기유적이 분포한다. 이는 청주가 구석기시대 사람들의 보금자리였고, 동물들의 낙원이었으며, 인류생명문화의 기원지였음이 고고학적 기록들이 말해준다.
구석기시대의 이동생활을 마감하고 변화된 환경에 적응하며 청주에 정착생활을 시작한 자취는 쌍청리유적에서 처음(1993년) 찾아졌다. 凸움자형의 독특한 구조의 움집을 짓고 돌보습,갈판,갈돌,돌도끼,화살촉,그물추,숫돌 등의 돌연모를 제작하였으며, 여러 문양이 베풀어진 토기를 구워 생활하였다. 이러한 유물들은 약 4,500년 쯤 쌍청리 신석기 사람들이 농사짓기와 사냥, 물고기잡이로 생업경제활동을 하였음을 보여준다. 이들은 청주의 첫 농사꾼들이었다. 이후 봉명동,산성동,오송,송절동,사천동,가락리,영하리 등에서 신석기시대 유적이 조사되었다. 움집입지와 규모로 보면 청주에 살았던 신석기시대 사람들은 야트막한 능선 정상부 또는 비탈사면에 원형이나 장방형의 움집을 1~4동씩 짓고 소규모의 고립된 취락을 이루며 생활하였다.
청동기시대 청주는 농사짓기의 보편화, 취락의 확대, 움집 규모와 구조의 변화, 새로운 형태의 무덤이 축조되는 등 크게 변화하였다. 청동기시대 전기의 마을은 조망이 좋은 능선 정상부에 1~3기씩 독립된 형태로 존재한다. 움집은 평면 장방형에 돌돌림 불땐자리, 초석, 저장구덩을 갖춘 구조와 이중단사선문을 특징으로하는 토기가 출토되는 가락동유형 움집으로 대표된다. 돌도끼,돌대패 등 나무가공 석기가 증가하고,반달돌칼,돌낫,돌칼 등 식물자원의 수확이나 채취와 관련된 석기들을 제작 사용하였다. 이와 같은 움집은 내곡동,송절동,용암동,비하동,가경동,대율리,풍정리,장대리,상신리 등 미호천 언저리에 집중 분포하는 특징을 보인다.
특히 대율리유적에서는 환호(環濠)취락이 조사되었다. 낮은 구릉에 조성한 취락으로 9동의 움집이 3중의 환호 안에 대형, 소형 움집이 공간을 분리하여 계획적으로 조성하였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이른시기의 환호마을로 주목된다. 기원전 12~11세기의 학평리 움집에서는 간돌검,화살촉,반달돌칼,가락바퀴 등과 함께 주로 무덤에서 나오는 비파형동검이 나왔다. 이 동검은 남한지역 초기 동검을 대표하는 것으로, 일찍이 금속문화를 소유한 사람들이 청주에 살았음을 의미한다.
청동기시대 후기의 취락은 구릉이나 평탄대지 또는 충적대지에 자리하며, 공통적으로 농사짓기에 유리한 입지를 선택하였다. 봉명동,비하동,서촌동,송절동,운동동,쌍청리,만수리,궁평리,장대리유적 등이 이에 속한다. 특히 궁평리 취락에서 출토된 민무늬토기의 압흔(壓痕) 조사결과 논 작물인 벼와 밭 작물인 기장,조,들깨 그리고 곤충 등이 확인되었다. 이는 궁평리에 살았던 청동기시대 사람들은 밭,논농사로 작물을 재배하여 식량자원화 하였음을 흔적으로 남긴 씨앗의 기록이 말해준다.
이 시기의 무덤은 고인돌로 대표된다. 최근 조사된 월오동 고인돌은 협소한 골짜기에 조성한 입지적 특이성, 25기가 확인된 높은 밀집도, 중층으로 축조한 점, 묘역시설을 갖춘 점, 모든 형식의 고인돌이 확인된 점 등은 지금까지 충북지역에서 조사된 예가 없는 매우 독특한 무덤유적으로 중요하다. 청주에서 처음 조사(1977년)된 청동기시대 유적은 문의 아득이 고인돌이다. 탁자식 고인돌로 별자리 돌판이 찾아졌다. 별자리 돌판에는 북두칠성,용자리,작은곰자리,카페우스,카시오페아 등 5개의 별자리가 표현되어 있다. 이들 별자리는 청동기시대 북극 근처의 실제 별 분포와 일치함이 밝혀졌다. 고인돌 축조 당시 북극 근처의 별을 돌판에 새겨 주검과 함께 부장하였던 것이다. 청동기시대부터 고유한 천문관과 뛰어난 천문지식이 있었음을 알려준다.
죽은자의 무덤에 왜 별자리를 새겨 부장하였을까? 아마도 죽은자의 영혼이 영원히 죽지 않기를 바라며 별처럼 빛나기를 기원하는 간절한 마음을 담아 별을 새겨 부장하지는 않았을까. 무덤에 별을 그려 죽은자의 영혼을 기리는 풍습은 고구려 고분벽화에서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땅 속에 수백~수십만년 동안 묻혀있던 고고학적 기록(유구,유물)은 청주역사의 시작을 알려줌과 함께 청주 땅에 살았던 선사시대 사람들의 발자취를 이해하는데 소중한 문화자산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