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광섭 청주대 교양학부 겸임교수
[동양일보]세종의 애민정신, 도전과 창조의 숨결이 곳곳에…
청주의 스토리텔링이고 콘텐츠다.
1경. 초정약수공원과 세종행궁
우리는 이곳을 탕마당이라고 불렀다. 드넓은 마당에 우물이 세 개 있었는데 상탕은 세종대왕이 안질 등을 치료했던 곳으로 초정영천이다. 바로 아래에 두레박으로 물을 길어 올려 마시는 샘터가 있었고, 그 옆에 돌계단을 밟고 내려가면 바위틈 사이로 흐르는 물맛이 삼삼했다. 그리고 하탕은 노천탕이었다. 하루에 한 번씩 하늘 높이 치솟았다. 1444년 세종대왕이 이곳을 다녀갔을 때도 있었던 일이다. 세종대왕은 행궁을 짓고 두 차례에 걸쳐 121일간 머물며 요양을 했다. 톡 쏘고 알싸한 맛에 매료돼 목욕을 하며 건강보감을 실천했다. 훈민정음 창제와 국악, 과학, 문학, 복지, 조세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곳에서 일구었다. 세종은 노인들을 초청해 양로연을 베풀고 주민들과 함께 멋진 신세계를 꿈꾸었다.
2경. 구라산성
누가 그랬던가. 나이테는 나무가 만들어 낸 역사이고, 나무껍질은 나무가 겪어낸 고난의 무늬라고. 소나무는 그 모습만으로도 나이를 알 수 있다. “남산 위의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이라고 노래하지 않았던가. 고즈넉한 한낮, 숲에서 들리는 청아한 산새 소리가 귓가에서 맴돈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숲에서는 맑은 솔잎향이 끼쳐온다. 움직이는 것이 어디 바람뿐일까. 살아있는 것은 모두 움직이고 흔들린다. 아픔과 상처를 딛고 일어나야만 강건해지는 것이다. 소나무처럼…. 해발 484m의 이 산은 백두대간 한남금북정맥으로 좌구산~구라산~상당산성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티재는 산 너머 노인이 이틀 걸려 이 산을 넘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산성의 둘레는 950m이 이른다. 구라산 자락에 승어(乘御)골이라는 골짜기가 있다. 임금이 즐겨 찾던 곳이기 때문에 지어진 이름이다.
3경. 저곡리 풍경
마을 입구에 보호수인 회화나무가 늠름하다. 회화나무는 과거급제를 하거나 큰 벼슬을 하는 사람이 나올 때 이를 기념하기 위해 심는 나무다. 절개와 풍요와 복된 삶을 상징한다. 이 나무는 얼마를 살았을까. 얼마를 더 살 수 있을까. 마을 사람들은 가던 걸음 멈추고 두 손 모아 기도를 한다. 가족과 이웃 모두 무탈하기를 소망한다. 오래된 것들은 남루하고 쓸쓸하지만 아름답고 애달프다. 공간이 사라지면 역사도 사라지고 사랑도 사라진다. 지키고 가꾸어야 할 책무가 있다. 저곡리의 풍경이 한유롭다. 돌담과 우물과 오래된 나무와 풍요로운 산과 주름진 논과 밭…. 한 때는 닥나무가 많았다. 그래서 저곡(楮谷)리다. 100년 된 방앗간 풍경이 주민들의 사랑방으로, 마을카페로 변신했다. 벼를 찧고 쌀을 빻고 떡을 빚었던 곳, 발동기 소리, 벨트 소리, 농부들의 꿈이 영그는 소리…. 좁고 쓸쓸하고 가난한 풍경들이 내 마음에 쉼표가 되는 시간이다.
4경. 운보의 집
아버지는 그를 목수로 만들고 싶었다. 그것이 말하지도 듣지도 못하는 아들이 살아갈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를 화가로 키웠다. 아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그의 재능을 살려 주었다. 그리고 우향 박래현은 그의 아내이자 예술가이며 든든한 벗이었다. 운보 김기창. 세 살 때 장티푸스로 청력을 잃은 그의 일생은 청각장애의 고통을 딛고 일어선 위대한 인간 승리였다. 18세 때인 1931년, 조선미술전람회 입선을 시작으로 무려 1만여 점의 작품을 남겼다. 세필(細筆)에서 시작해 한국의 산하를 수묵의 농담(濃淡)으로 힘차게 그려낸 ‘청록산수’, 조선시대 민화의 정취와 익살을 대담하고 해학적으로 표현한 ‘바보산수’를 거쳐 걸레그림에 이르기까지 구상과 추상의 세계를 자유자재로 넘나들었다. 그리고 2001년 1월 21일 세상과 이별을 했다. 말 대신 붓끝으로 세상과 뜨겁게 소통하고 사랑했던 운보의 생을 만나보자. 축복은 기적처럼 오고 사랑은 별빛처럼 쏟아진다.
5경. 비중리 석조여래삼존상, 석조여래입상
보면 볼수록 정겹고 평화롭다. 어머니의 자애를 보는 것처럼 마음까지 포근하다. 초정약수에서 2㎞ 떨어진 비중리 입구에 있는 석조삼존불좌상과 석조여래입상은 돌을 다듬어 만든 불상이다. 그 앞에 서면 석공의 미세한 떨림이 끼쳐온다. 석공의 귀재는 새를 깎아 하늘에 띄운다고 한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두 손 모아 기도했을까. 보물 제1941호인 석조삼존불좌상과 석조여래입상은 삼국시대의 것으로 추정된다. 6세기 중엽 이후 청주지역을 둘러싼 삼국의 항쟁을 상징하는 유물이다. 타원형의 상체, 턱과 양 무릎을 연결하는 정삼각형의 안정된 형태, 큼직한 손, U자형으로 무릎을 덮으며 좌우로 내려진 천의(天衣)가 상현좌를 이루는 등 고졸한 불교 미술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6경. 홍양사와 삼세충효문
홍양사는 충효의 가문인 안정라씨(安定羅氏) 조상의 공덕을 기리는 곳이다. 이 동네는 라씨 집성촌이다. 수많은 학자를 배출했고 충신을 길러냈다. 조선시대에는 무려 15명의 문과 급제자를 배출했다.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인조를 보위하며 식량조달에 힘쓰고 좌의정에 오른 사람도 있고, 문인으로 도학이 깊은 사람도 있다. 삼세충효문은 이 동네 나사종 가문의 삼세대에 걸친 충효정신을 기리는 곳이다. 나사종은 성종(成宗) 22년(1491) 여진족이 기병(驥兵) 5천을 거느리고 변방에 쳐들어왔을 때 아군 50여 명을 이끌고 싸우다가 전사했다. 아들 운걸은 여진정벌에 백의종군하였으나 부친의 원수를 갚지 못함을 비분하여 부친의 3년상 마치는 날 자결했다. 또 운걸의 아들 빈, 린 형제도 효성이 깊어 수차례 여진정벌에 나섰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부친의 3년상이 끝나는 날에 역시 스스로 목숨을 끊어 3세대가 모두 기일(忌日)이 같다. 옷깃을 여민다.
7경. 의병장 한봉수 장군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내수읍 세교리에서 태어난 한봉수는 어려서부터 날렵했다. 산과 들과 하천을 뛰어다니며 화랑의 정신을 길렀다. 별명이 번개대장이었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한봉수는 나라 잃은 아픔을 더이상 지켜볼 수 없었다. 무기와 연장으로 무장했다. 일제가 오가는 길목에 밤낮으로 진을 치고 있다가 맞서 싸웠다. 1907년부터 1910년까지 그 싸움만 해도 30여 차례에 달했다. 기습과 변장 등 유격전술에 뛰어난 명장이었다. 한봉수 장군의 기개가 전국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죽음을 각오하고 일제에 저항하는 의병들이 많아졌다. 1910년 5월, 일제에 체포됐다. 교수형을 선고받았으나 항고해 15년형으로 감형되었다. 출옥과 동시에 괴산의 벽초 홍명희와 함께 손병희의 집으로 갔다. 만세운동을 주도하기 위해서다. 세교리 장터와 내수 장터에서 학생과 주민들을 이끌고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다. 일제에 붙잡혀 또다시 옥고를 치렀다.
8경. 독립운동가 손병희 생가
내수읍 금암리는 선생이 태어난 곳이다. 1만여 평의 드넓은 터에 유허지가 조성되어 있다. 전시관과 사당, 동상과 팔각정, 생가와 소나무 숲이 있다. 잔디정원과 곳곳에 잘 어우러져 있는 조경 또한 일품이다. 전시관에는 선생의 유품과 민족운동 일대기를 생생하게 엿볼 수 있다. 의암은 1882년(고종19) 20세 때 동학에 입교했다. 2년 후 교주 최시형을 만나면서 빼앗긴 조국을 찾는 일에 나섰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 때 농민군을 이끌고 정봉준과 논산에서 합세, 호남ㆍ호서를 석권하고 북상하며 관군을 격파했으나 일본군의 개입으로 실패하고 원산, 강계 등지로 피신하였다. 1897년부터 최시형의 뒤를 이어 3년 동안 교세 확장에 힘쓰다가 1901년 상하이로 망명하여 이상헌이라는 가명을 사용하면서 개혁운동과 신생활운동을 전개하였다. 1906년에는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고 제3대 교주에 취임, 교세확장 운동과 교육문화사업에 전념하였다. 1919년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3·1운동을 주도했다.
9경. 최명길과 전주최씨 세거지
“대감은 이 문서를 찢지만 나는 주워 맞추리다.” 임진왜란 때는 7년 동안 전쟁을 치렀지만 병자호란은 불과 40여 일이었는데도 임진왜란과 맞먹을 정도로 피해가 컸다. 최명길(崔鳴吉.1586~1647). 역사에서는 그를 주화파라고 부른다. 병자호란 때 청의 침략이 시작되자 최명길이 항복문서를 썼다. “가거라 삼각산아, 다시보자 한강수야~”의 김상헌이 그 문서를 찢어버렸다. 최명길은 찢어진 문서를 주워 맞추며 눈물로 호소했다. “의리보다 더 중요한 것은 현실을 직시하고 나라를 살리는 길이오.” 최명길은 쇠퇴해 가는 명에 대한 의리만 지킬 것이 아니라 새롭게 부상하는 청과의 관계 정상화를 촉구했다. 당시 조정에서는 청의 사신이 와도 만나지 않았다. 국서조차 받지 않았다. 그의 예측대로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최명길은 혈혈단신 적진으로 들어가 적장을 만나 타협을 꾀했다.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신할 시간을 끌기 위해서다. 일신의 명예보다 나라와 백성을 먼저 생각했다. 북이면 대율리에 그의 묘소가 있다. 이곳은 전주 최씨 세거지다. 지혜로 빛났고 실리로 나라를 찾고자 했던 그의 정신이 새삼 주목받고 있다. 숙종 때 당쟁의 혼란 속에서 포용의 정치를 펼친 영의정 최석정이 그의 손자다.
10경. 증평 좌구산과 김득신공원
조선 중기의 다독(多讀) 시인으로 알려진 백곡(栢谷) 김득신(1604~1684). 그는 1만 번 이상 읽은 책이 36권이나 된다. 자신의 서재를 억만재로 불렀다. 김득신은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 대첩을 이끈 김시민 장군의 손자다. 59세에 이르러서야 과거에 합격해 성균관에 들어갔다. “재주가 다른 이에게 못 미친다고 스스로 한계를 짓지 말라. 나처럼 어리석고 둔한 사람도 없을 것이지만 결국엔 이루었다. 모든 것은 힘쓰고 노력하는데 달려있다.” 그는 시 1,588수와 글 182편이 실린 <백곡집>과 시 비평집인 <종남총지>를 남겼다. 효종은 “당시(唐詩)에 넣어도 부끄럽지 않다”며 칭찬했다. 삼기저수지와 김득신공원을 지나면 좌구산휴양림이 있다. 울창한 숲과 계곡, 출렁다리의 짜릿함이 일품이다. 밤에는 별들이 쏟아진다. 시도 때도 없이 들끓던 욕망도, 번잡하게 매달리던 상념도, 일과 권력에 쫓겨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된 내 청춘도 이곳에 들어서면 가뭇없다.
*세종대왕과 초정10경은 필자가 초정약수 및 주변의 역사문화 공간과 마을의 이야기를 체계화한 것이며, 로컬콘텐츠로 특화하고자 기획한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