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삼철 충북연구원 북부분원장

 
 
 
정삼철 충북연구원 북부분원장
정삼철 충북연구원 북부분원장

 

[동양일보]오늘날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청주의 역사문화 정체성과 모습은 지극히 제약적이고 한정된 제한적 범위에서 인식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지역정체성과 문화의 현재 모습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에 걸쳐 그 속에서 살아온 사람들에 의해 형성되어온 것이고, 그 속에 역사적 흔적이나 문화적 유전자(DNA)로 남아서 오늘의 모습으로 투영되어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대체로 역사문화유적의 발굴과 남아있는 기록이나 체험적 기억 등을 통해 확인하고 고증된 것을 토대로 하기에 이해의 범위와 인식의 한계가 뒤따르기 마련이다. 그러다 보니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이해하는 청주의 역사와 문화정체성은 매우 제한적일 수밖에 없으며, 불확실한 측면과 궁금증들이 여전히 매우 많이 남아있다. 이에 청주역사를 온전히 이해하고 문화적 정체성과 유전자를 찾아내고 확인하는 책무는 지역 주체들에게 남겨진 과제일 것이다. 이는 범위를 달리해 국가와 지역뿐만 아니라 조직이나 개인의 인생을 이해하고 인식하는 일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살고 있고 앞으로 후손들이 살아가야 할 청주의 역사와 문화적 뿌리를 찾아내어 문화원형자산으로 지역의 주권을 확보하고 지켜나가는 일은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들의 전통 역사문화에 대한 정책은 중앙에만 머물러 있고, 지방에서는 여전히 주류정책이 아닌 주변 정책에 머물러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리고 역사문화 인문학 분야의 학문도 물질적 경제가치만을 중요시하는 시대로 변하면서 가난하고 배고푼 학문으로 전락하면서 학생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 대학에서 관련 학과가 사라지거나 전문인력을 길러내지 못하고 있다. 이에 따라 역사문화의 학문적 단절이 현실화되고, 지역의 향토역사문화 관련 단체나 연구회에도 기성세대만 명목상으로 활동하고 있을 뿐 젊은 층으로의 세대 간 이음을 이루지 못한 가운데 정책지원금에 의존해 연명하고 있는 것이 지금의 안타까운 현실이다. 우리가 이해하는 청주의 역사문화도 대부분 사료의 제약과 관심 부족으로 인해 조선 이후의 시각 속에 머물러 지금의 현실을 인식하고 있어 청주의 역사문화적 가치의 지평을 외연적으로 넓혀가지 못하고 갇혀 있다. 역사문화적인 시각에서 현재 우리가 사는 청주는 도대체 어떤 곳이고, 그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청주는 이미 오래전 고대 선사시대부터 수렵 채취의 생활양식을 벗어나서 13000~15000년 전부터 정착해 농사를 짓고 살았던 흔적으로 소로리 유적에서 세계 최고의 볍씨가 출토된 고대 인류의 삶의 터전을 이루었던 곳이다. 백제 시대에는 상당현(娘臂城 혹은 娘子谷)으로 불렀다. 통일신라시대에는 서원소경이었다가 서원경(西原京)으로 승격되었다. 일본 정창원 창고에서 발견된 `신라촌락문서(新羅帳籍, 新羅村落帳籍)는 775년에 작성된 것으로 통일신라 때 지금의 청주인 서원경(西原京) 4개 마을의 경제 상황과 행정을 이해할 수 있는 사료로 평가되며, 청주의 역사문화적 위상이 가볍지 않았었음을 엿볼 수 있다.

서기 775년에 작성된 신라촌락(서원경)문서 이미지
서기 775년에 작성된 신라촌락(서원경)문서 이미지

 

고려시대에 서원경은 940년(고려 태조 23년)에 청주로 명칭이 개정되어 올해로 1,082년이 되었다. 당시에 고려국은 동아시아 지식정보 문화강국으로 평가되어 중국 황제들은 늘 사신을 보내 고려의 지식이 담긴 서적을 구해서 오도록 했던 사실이 여러 역사자료에 기록되어 있다. 고려시대 당시에 청주는 1377년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로 주조한 직지심체요절을 인시하였던 곳이며, 용두사 철당간, 용화사 석불상, 사뇌사의 금속공예품 등 다수의 고려유물과 유적들로 볼 때 청주는 결코 만만한 곳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1123년에 송(宋)나라 사신으로 고려에 왔었던 서긍(徐兢)이 저술한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 27권 객관(客館) 기록에는 당시 고려국의 수도였던 개경에 4개의 객관이 남문 밖에 있었는데, 양광충청주도(중원도)에 속한 청주와 충주에서 청주관(淸州館)과 충주관(忠州館)을 설치하여 중국 상인들을 접대하였던 것으로 보아 대외적인 거래 활동도 매우 왕성했던 지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고려때 청주는 왕이 수시로 행차했던 요충지였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볼 때 고려시대 청주는 폐쇄적이거나 소극적인 변방이 아니라 문화적, 경제적으로 매우 활발한 역할과 기능을 담당하였던 고려국의 역동적인 중요 도시였음이 분명하다.

1123년에 제작된 송나라 서긍의 선화봉사고려도경(약칭 고려도경)
1123년에 제작된 송나라 서긍의 선화봉사고려도경(약칭 고려도경)

 

그러므로 청주에 대한 역사 문화적 인식을 조선시대 이후에만 국한하지 말고 적극적인 사료 발굴과 다면적 시각의 연구추진으로 고려시대와 그 이전 등으로 인식을 확대해 청주의 역사 문화적 지평을 외연적으로 확장해 나가야 한다. 또한, 이러한 역사문화적 반추를 통해 기록문화 창의 도시 청주가 나가야 할 미래를 새롭게 설계하고, 온고지신을 통해 역사문화공동체 청주의 역사문화적 품격과 위상을 높여 나가려는 주체적 노력의 전개가 필요하다. 청주역사문화연구소의 존재 이유와 역할기능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이를 통해 아직 알지 못하고, 밝혀내지 못한 청주의 가치와 궁금증을 풀어내고, 본격적인 지방경쟁 시대에 청주의 역사문화원형 콘텐츠에 대한 주권 확보와 지역정체성을 확립해 시민 모두가 자긍심을 가지는 자랑스런 청주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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