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 운동화 -조선미

[동양일보] 여전히 발목이 시큰거렸다. 레오는 고개를 저으며 눈을 감았다. 눈과 입 안으로 모래가 흩날리던 그날의 사고는 눈을 감아도 레오의 머릿속에 선명하게 떠올랐다.

“3번! 달려! 일어나 달리란 말이야!”

“이럴 수가! 어서 일어나 레오!”

바닥에 고꾸라진 채 움직일 수 없는 레오의 귓가에 수많은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레오! 안 돼!”

낙마한 기수는 헬멧을 벗어 던졌다. 거친 숨을 몰아쉬던 레오의 귓가에 울부짖는 기수의 목소리가 절망으로 다가왔다.

경기장에서 실려 나온 레오의 상태를 본 수의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안락사를 시키기엔 골절 부위가 애매합니다. 뒷다리를 다친 게 그나마 다행입니다. 레오는 그동안의 실적도 좋고, 무엇보다 혈통이 좋으니까 치료를 잘 하면 다른 용도로 활용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레오에겐 아직 희망이 있네요. 선생님, 가능하다면 레오가 꼭 다시 달릴 수 있도록 치료 부탁드립니다.”

기수는 진찰대에 누워 있는 레오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것이 레오와 수년간 호흡을 맞춰온 동반자와의 마지막이었다.

해가 기우는 낮은 산자락 아래 차가 멈추고 카라반 문이 열렸다. 레오는 눈을 떴다. 뒷걸음질로 차에서 내려 승마장 할아버지가 이끄는 마방으로 들어갔다. 승마장 입구에는 “어서오세요. ‘포하재활승마클럽’입니다.” 라고 적혀 있었다.

“이제 여기가 네가 지낼 곳이다. 넌 훌륭한 경주마였고, 지금도 그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오늘은 피곤할 테니 푹 쉬거라.”

승마장 주인 할아버지는 레오를 마방으로 들여보낸 뒤 밖에서 문을 닫아걸었다. 빨간 플라스틱 구유에 담긴 사료에는 한 번도 맡아본 적 없는 낯선 냄새가 났다. 레오는 영양제와 오일이 섞인 사료 냄새, 바스락거리는 건초 냄새가 그리웠다. 익숙한 냄새를 찾아 콧구멍을 벌름거리고 있는 사이 바닥이 뚫린 문 아래로 딱딱하게 굳은 말똥 하나가 굴러들어왔다.

“어이! 이봐! 여기야, 여기!”

레오는 두리번거리며 주위를 둘러봤다.

“여기라고. 여기. 바로 네 맞은편.”

레오는 몸을 돌려 문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바로 앞에 서 있는 검은색 말과 눈이 마주쳤다.

“해럴드? 네가 어떻게 여기에 있어?”

“하하하. 맞구나, 레오! 난 네 옆모습을 보고 너라는 걸 바로 알아차렸지. 내가 이렇게 살아 있는 게 신기하지? 저 옆에는 전설의 레이먼드 아저씨도 있다고. 지금은 주무시고 계시지만.”

“레이먼드 아저씨가 아직도 살아있다고?”

“응. 나도 여기 와서 다시 만났어. 그런데 메니피의 혈통이 이곳에 온 건 정말 신선한데!”

“비웃을 거라면 그만둬.”

레오는 몸을 돌려 해럴드의 말문을 막았다.

“레오! 처음엔 좀 힘들겠지만 서서히 괜찮아질 거야. 너도 나도 우린 행운아야.”

레오는 숨이 차도록 경기장을 달리던 해럴드와의 재회가 반가웠다. 하지만 늘 꼴찌만 하던 해럴드와 같은 처지가 되었다는 사실은 썩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다.

‘저 허풍쟁이! 행운아는 무슨!’

레오는 창문밖으로 어두워지는 하늘을 바라보며 눈을 감았다. 모든 게 꿈이었으면 싶었다.

햇살이 마방 안을 비추자 주인 할아버지의 수레바퀴 소리가 들렸다.

“자, 다들 일어나 밥 먹자! 오늘은 우리 천사들이 오는 날이니까 기운 내야지!”

주인 할아버지는 빨간 플라스틱 구유 안에 눅눅한 사료와 거친 건초를 담아주었다.

“이런. 레오는 어제저녁을 안 먹었구나. 입맛에 맞지 않아도 좀 먹어두렴. 이곳에 오기 전 훈련 받은 대로만 하면 된다. 너의 도움이 필요한 아이니까 잘 부탁한다.”

레오는 등을 쓰다듬는 주인 할아버지의 손길이 싫지 않았다. 어제 저녁에는 구유에 입도 대기 싫었는데, 점심이 되자 배가 고파진 레오는 사료와 건초를 모두 비웠다.

주인 할아버지는 레오를 데리고 승마장으로 나갔다. 레오는 트랙을 돌고 있는 레이먼드와 해럴드를 발견했다.

“해럴드! 뭐 하는 거야? 너랑 어울리지도 않는 그 허름한 안장은 뭐지?”

“어, 레오! 나왔구나! 이 안장에 아이들을 태우고 걷는 일이 우리의 일이야.”

“저렇게 작은 원을 뱅글뱅글 걷는 것이 우리의 일이라고? 최악이군.”

“하하하. 네 처지에 안 맞게 여전히 까칠하군. 넓은 트랙을 최고 속도로 달리던 우리들이 이렇게 작은 트랙을 한 시간씩 걷기만 해야 한다는 건 괴로운 일이지. 하지만 관광지에서 뜨거운 햇볕 아래 하루 종일 마차를 끌지 않아도 되는 우리는 행운인 거야. 제대로 걷기도 힘든 너의 그 다리로 말고기가 되지 않은 것에 감사하라고 친구. 그럼 난 이만!”

해럴드가 걸어간 길에는 뒷다리를 끌고 간 긴 발자국이 남았다. 해럴드의 부상도 레오와 비슷했다. 레오는 오른쪽 뒷다리를 온전히 들 수가 없었다. 오른쪽 뒷다리는 네 개의 발굽이 만드는 규칙적인 박자를 벗어난 듯 일자로 된 긴 발자국을 남겼다.

주인 할아버지가 잠시 자리를 비우자 레오는 트랙 가까이 다가가 레이먼드에게 물었다.

“아저씨, 아저씨답지 않은 이런 일이 지루하지 않으세요?”

“이 나이에 이렇게 흙을 밟을 수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이냐.”

“아저씨는 우리들의 영웅이었어요.”

“여기 오는 아이들은 모두 우리처럼 몸이 불편한 아이들이란다. 난 아직도 걸을 수 있는 힘이 있고, 이 아이들에게 도움을 줄 수가 있어. 사람들에게 큰 돈을 안겨주기 위해 달리는 것이 네가 생각하는 영웅이라면 내 생각과는 좀 다르구나.”

레이먼드는 해럴드가 흔드는 꼬리를 따라 천천히 걸어갔다.

주인 할아버지가 돌아와 레오 등에 안장을 얹고, 낮은 사다리 위에서 레오를 기다리는 남자 아이에게 데려갔다.

“한결아, 이 친구가 레오란다. 레오는 너와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거야.”

“네, 할아버지!”

한결이는 주인 할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레오 등에 올라탔다. 레오는 주인 할아버지가 이끄는 로프에 이끌려 레이먼드와 해럴드가 돌고 있는 트랙 안으로 걸어갔다. 기수를 태울 때와는 다르게 무게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주인 할아버지는 레오와 함께 걸으며 한결이에게 물었다.

“한결아, 오늘 여기 오는 길은 어땠니?”

“오늘은 하늘이 맑아서 기분이 좋았어요. 그런데 할아버지! 레오는 어쩌다 이곳에 오게 됐어요?”

“레오는 아주 빠르고 멋진 선수였지. 빨리 달리고 싶은 마음이 몸과 하나가 되지 못한 탓에 다리를 좀 다친 모양이야.”

“그렇구나. 나도 빨리 달리는 자동차에 다쳤는데. 그럼 레오도 저처럼 다시는 달리지 못하나요?”

“글쎄다. 한결이가 잘 뛸 수 있게 되면 레오도 그렇지 않을까?”

“음. 할아버지는 제가 3학년이 되기 전에 뛸 수 있을 거라 하셨지만, 저는 벌써 4학년이 되었어요.”

“한결아, 우리 승마 클럽이 왜 ‘포하’인지 알지?”

“물론이죠, 할아버지. 포기하지마(馬)!”

“그래. 한결이도 열심히 재활해서 다시 걷고, 뛰어야지! 레오도 꼭 그럴 수 있을 게다.”

주인 할아버지는 레오에게서 로프를 제거한 후 해럴드의 뒤를 따라 걷게 했다. 레오는 해럴드의 뒤를 따라 걷는 게 못마땅했다. 당장이라도 앞발을 들어 몸을 세워 보고 싶었지만 할아버지가 부탁하신 한결이가 떨어질까 신경이 쓰였다.

레오는 천천히 트랙을 따라 도는 것이 지루하고 따분했다. 시간이 갈수록 오른쪽 뒷다리도 저리고 아파 왔다. 아직도 한결이를 태우고 30분이나 걸어야 했다. 그 사실이 레오를 점점 더 거칠게 만들었다.

“레오. 해럴드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때도 꼭 너 같았어. 이렇게 불안한 느낌.”

‘꼬맹이 주제에 뭘 안다고! 해럴드는 늘 꼴찌였다고! 어떻게 나랑 비교를!’

레오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해럴드의 꼬리 옆으로 얼굴을 들이밀고 힘을 주어 달렸다. 해럴드는 갑작스런 레오의 행동에 등에 앉은 아이를 떨어뜨리지 않으려 조심스럽게 비켜주었다. 한결이는 손에 힘을 주어 안장 손잡이를 더욱 꼭 잡았다. 그동안 연습해왔던 것처럼 다리에 힘을 주고 앉았다 일어섰다를 반복하며 레오의 반동에 박자를 맞췄다. 레오는 터질듯한 심장에서 뜨거운 피를 발끝까지 밀어내며 작은 트랙을 한 바퀴 돌아 다시 해럴드의 꼬리 앞에 멈췄다.

그날 저녁, 오른쪽 뒷다리에 파란 붕대를 감은 레오가 사료를 먹고 있을 때 말똥 하나가 굴러왔다.

“어이, 레오! 첫날부터 사고를 치다니 역시 대단한걸! 넌 내일 한결이가 다시 오지 않는다면 여기서도 끝이라고!”

“항상 꼴찌만 하던 녀석이 누구보고 끝이래!”

레오는 굴러온 말똥을 다시 해럴드를 향해 차 버렸다.

“그만들 해라. 한결이는 다시 올 거야.”

“그걸 아저씨가 어떻게 아세요?”

“내가 그랬고, 해럴드가 그랬으니. 한결이는 마음이 따뜻하고 승마에 노련해. 분명히 레오 네가 그럴 줄 알고 있었을 거야. 그러니 낙마하지 않은 거지.”

레오는 한결이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낙마하지 않고 잘 버텨줘서 고맙기도 했다. 내일 한결이가 다시 온다면 그땐 차분하게 천천히 트랙을 돌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사료를 다 먹은 레오는 뒷발에 힘을 주고 걸어보려 했다.

“아아악!”

“그러게 어쩌려고 다 낫지도 않은 발로 뛰기까지 한 거야? 진짜 말고기가 되는 게 네 소원이야?”

“그만해라, 해럴드. 레오도 오늘 밤 느끼는 게 많을 거다. 그리고 레오도 너무 서운해 마라. 해럴드는 이곳에 네가 온 걸 참 안타까워하고 있어. 늘 너를 걱정하고 있단다.”

레오는 다시 한번 발에 힘을 주고 이를 꽉 물었다. 앓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이번에는 해럴드도 레이먼드도 숨을 죽이고 지켜보았다. 한동안 움직임이 없던 레오는 붕대가 감긴 다리를 쿵쿵 내디디며 날뛰었다. 점점 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앞 다리를 들어 올렸다. 뒷다리에 통증이 심해진 레오는 금방이라도 마방을 뛰쳐나가고 싶었다.

“아아악! 달리고 싶어, 달리고 싶다고! 아악!”

“진정해, 레오! 위험하다고!”

해럴드는 마방 문에 몸을 부딪치며 레오보다 더 큰 소리로 울었다. 다리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레오를 진정시킬 누군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두 마리 말이 날뛰며 갑자기 소란스러워진 소리에 주인 할아버지가 마방으로 달려왔다.

“워, 워, 워! 레오! 해럴드! 그만!”

해럴드는 주인 할아버지가 마방으로 들어오자 소란을 멈췄다. 레오도 해럴드의 소란이 잦아들자 거친 숨을 내쉬며 맑은 콧물을 내뿜었다. 빨갛게 달아오른 레오의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가득 고였다.

주인 할아버지는 레오의 마방으로 들어와 레오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레오야, 우린 세상을 살면서 늘 한 곳에만 머물 수는 없는 거란다. 천천히라도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 수밖에.”

“히이이잉! 히이이잉! 푸레레레.”

레오는 주인 할아버지의 손길에서 처음 기수와 만났던 때를 떠올렸다. 빨리 달리는 말이 필요한 곳, 그러나 더 이상 그곳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다리 통증이 말해주고 있었다. 레오는 창문 밖에서 들어오는 달빛을 느끼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레오야, 레오! 나야, 나.”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눈을 떴을 때는 해가 이미 하늘 높이 솟아 있었다. 레오가 바닥에 누운 채 문 아래로 고개를 돌리니 파란 운동화가 보였다.

“레오야, 많이 다친 거야? 할아버지가 오늘은 널 만날 수 없다고 하셨지만 네가 걱정돼서 마방으로 와 봤어.”

한결이가 고개를 숙여 붕대가 감긴 레오의 다리를 내려다보았다.

“레오야, 멋지게 달리던 말들이 이곳에서 다리를 끌며 걷는 모습이 마치 날 보는 것 같아서, 처음에는 그게 너무 싫었는데, 할아버지가 그러시더라고. 남보다 꼭 빨리 달려야만 행복한 건 아니라고. 천천히 걸어야만 보이는 것들이 세상엔 참 많다고 말이야.

너도 한 번 생각해 봐. 네가 빨리 달리던 때는 탄탄하게 단련된 기수의 다리가 보였겠지만 천천히 걷는 지금은 이렇게 힘없고 약한 내 다리도 볼 수 있잖아? 그렇다고 이게 꼭 나쁜 건 아니야. 난 너에게 채찍을 때리지 않을 테니까. 널 아프게 하지 않을 거라고.”

레오는 마방 바닥에 얼굴을 떨어뜨린 채로 한결이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었다. 그때 가벼운 발소리를 내며 누군가 레오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한결아, 마방에서 뭐하는 거야? 오늘은 해럴드가 널 태워준대. 어서 나오렴!”

“네, 엄마! 금방 나갈 테니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멀리서 들리던 발소리가 멈추고, 마방 문 가까이 ‘스르륵’ 신발을 끄는 묵직한 소리가 들렸다. 문 아래로 몸을 숙인 한결이가 속삭이듯 말했다.

“꼭 다시 일어나 줘, 레오. 네가 다시 걷고, 다시 달릴 수 있게 되면 어제처럼 네 등 위에서 트랙을 한 바퀴 힘차게 달려보고 싶어. 보다시피 난 혼자서는 뛸 수가 없거든. 네가 있어야만 나도 다시 달릴 수 있으니까. 그러니까 이런 날 위해서라도 꼭 일어나 줘.”

한결이가 신발을 끌며 엄마를 향해 걸어나갔다. 파란 운동화가 움직이는 모습을 바라보던 레오는 붕대가 감긴 오른쪽 뒷다리에 살짝 힘을 주었다. 레오의 마음을 감고 있던 붕대는 어느새 풀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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