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찬모 문학박사 . 문학평론가
[동양일보]고단한 삶의 속 풀이, 위로와 희망의 서민 '밥심'
■ 묵을수록 더 새로운 이야기
오래된 해장국집이 있었다. 그 집은 널리 소문이 난 소위 잘나가는 '맛집'이었다. 현재 이 집의 주인은 구순을 바라보는 할머니로 3대를 잇는 가업의 주인인데, 2대였던 시어머니로부터 해장국집을 이어 받아 40여 년을 한결같은 자리에서 식객을 맞고 있다. 해장국집이 본격적으로 성업을 이룬 것은 온전히 할머니의 따뜻한 정과 손 큰 인심 덕분이다.
그런데 하루는 이른 새벽, 남루하고 초라한 중년의 남자가 식당 문을 열고 들어섰다. 사람들의 눈길은 곧 중년 남자에게로 쏠렸다. 누가 봐도 오갈 곳 없는 노숙자의 행색이었기 때문이다. 남자는 해장국 한 그릇을 시켜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허겁지겁 먹었다. 사람들의 관심은 과연 초췌한 남자가 계산을 치르고 나가느냐에 모아졌다. 아니나다를까 남자는 해장국을 먹은 후 화장실의 위치를 물은 뒤 곧바로 줄행랑을 쳤다.
이때 주방 쪽에서 해장국 간을 보던 노구의 할머니가 불편한 몸을 이끌고 출입문 밖으로 뛰어 나와 큰 소리로 외쳤다. 이봐 젊은이 뛰지 마! 넘어지면 어쩌려구. 배 꺼지면 어쩌려구. 도망가던 남자는 뒤쪽에서 들려오는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장면과 목소리에 뒷덜미가 뜨거워짐을 느꼈다. 경찰에 신고하거나 악담을 퍼부어도 시원찮을 상황에 오히려 넘어져 뛰지 말라니. 배가 꺼져 뛰지 말라니.
세월이 흘러 다시 찾은 해장국집은 여전히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지만, 그때 손을 저으며 뛰지말라고 소리쳤던 할머니는 이미 세상을 뜬 후였다. 그동안 남자는 할머니의 따뜻한 정을 계기로-그래도 세상은 살만하다고 느끼며-재기에 성공해 노숙자 생활을 청산하고 당시 뒷덜미를 부끄럽게 만든 해장국집을 다시 찾은 것이다. 이 이야기는 수년 전 한 방송사에서 짧은 미담으로 소개된 바 있는 실화다.
이처럼 해장국은 마지못해 하루의 허기를 때우는 생존을 위한 단순한 저작물이 아니라, 한 사람의 삶을 변화시키는 너무나 고마운 인간적인 음식이다. 야박하거나 인색함과는 거리가 먼 우리네 서민 음식이다.
■서민의 삶 속에서 역사가 된 해장국
"원래 해장국은 '술로 쓰린 창자를 푼다'는 '해정(解酊)'의 뜻이었는데, 해정이 '해장(解腸)'으로 와전된 것이다. 현재의 해장국은 1883년 인천항이 개항하면서 시작되었다. 인천항 개항과 동시에 외국인의 출입이 잦아졌고, 이들은 주로 소고기의 안심, 등심 등 주요 부분을 많이 먹었다.
남은 내장과 잡고기 뼈 등은 인근 식당에서 가져다 국을 끓였다. 이 국이 노동자들에게 술 마신 다음 날 큰 인기를 끌며, 지금의 해장국으로 전해내려 온 것"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해장국은 국물을 우릴 수만 있다면 다양한 주재료에 따라 얼마든지 각기 다른 종류의 해장국을 만들 수 있는 셈이다. 우리 민족성처럼 임기응변과 순발력이 뛰어난 음식인 것이다.
가장 대중적인 것은 아무래도 소고기의 부속인 선지해장국과 돼지 부속 등뼈인 뼈다귀해장국을 꼽을 수 있겠다. 선지해장국은 여기에 시래기와 우거지, 콩나물 등으로 균형을 맞추며, 뼈다귀해장국도 역시 우거지와 시래기를 첨가한다. 약방의 감초인 콩나물은 다른 해장국의 보조 재료로 각광 받지만, 자신의 이름을 맨 앞에 내세운 '콩나물해장국'으로도 사랑을 받는다. 이 경우에도 나 홀로 단독이 아니라, 북어 등이 곁들어진 콩나물북어해장국의 시원한 맛으로 거듭난다. 그러나 서민들은 가난하고 배고팠던 시절에 쉽게 먹을 수 없는 고기 조각이 들어간 선지와 뼈다귀해장국을 더 선호했다.
■삶이 된 청주해장국, 희망을 채우다
청주가 해장국으로 명성을 얻기 시작한 것은 해방 전부터 성황을 이룬 남주동 부근의 우시장 때문이다. 청주 우시장은 수원, 의성과 더불어 전국 3대 우시장으로 손꼽힐 만큼 규모가 컸다. 경기 이남과 전라 충청을 두루 포괄하는 시장인 탓에 전국의 내로라하는 소가 경쟁하듯 청주 남주동 우시장을 찾았다.
장이 서면 흥정이 오가고 멍석을 깔면 재주를 부리듯 남주동 일대의 우시장이 서자 자연스럽게 소의 부속물들을 재료로 하는 해장국집들이 하나둘 들어서게 되면서 번성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번진 해장국은 남주동해장국이란 이름으로 알려지게 되고, 인근의 '서문해장국'등으로 확장하면서 해장국이 청주를 대표하는 서민 음식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남주동 우시장 터는 역사적으로도 중요한 장소다. 청주 3.1 만세운동의 진원지이기 때문이다. 옛 우시장 터인 남주동 소공원에 '청주 3·1 만세운동의 자리'라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백성들에게 '장시(場市)'는 세상의 풍문을 귀동냥할 수 있는 공론의 장으로, 남주동 우시장은 청주인의 결기를 한 곳에 모으기 더없이 좋은 '마당'이었던 것이다.
지금도 남주동에선 남주동해장국이란 상호를 건 백 년 가게가 손님을 맞는다. 1943년에 개업을 해 4대 80여 년에 걸쳐 남주동해장국의 전통을 잇고 있다. 특히 식당 안의 세 가지 소품이 인상적이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정면 벽 쪽에 1950년 초 청주 남주동해장국 우시장 모습이라고 쓰인 오래된 흑백 액자 사진이 눈길을 끈다.
사진 밑에는 긴 나무 탁자와 의자가 있는데, 해방 직후 조선 소나무로 만든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출입문 벽 상단에 걸려 있는 오래된 '코뚜레'는 두 소품과 더불어 남주동해장국집의 역사는 물론, 남주동에서 시작된 청주해장국의 역사를 단박에 상징하는 문화유산이다. 세월이 흘러 주변에 산재하던 가게들은 사라졌지만, 남주동해장국집만큼은 꿋꿋하게 한 자리를 지키고 있다.
필자도 대학과 대학원생 때 남주동해장국집을 자주 찾았다. 대학 때 처음 발견한 남주동해장국집은 타관(他官)인 청주에서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나만의 호젓한 단골이었다. 대학원생 때는 남양주가 고향인 조교와 빈번히 드나들었다. 양평과 가까워 양평해장국 맛에 길들여진 그 친구의 입맛을 사로잡았던 곳이 남주동해장국이었다. 지금은 고향에서 교편을 잡고 있다. 발령을 받고 떠난 후에도 꿈만 꾸면 청주가 보인다고 말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에게 잊을 수 없는 풋풋한 젊음의 정거장이던 청주는 아마도 남주동해장국으로 각인된 청주해장국이 큰 몫을 했으리라.
또 한 곳 사람들로 붐비는 해장국집이 있다. 집 근처라서 출입이 잦은 집이다. 결혼식 피로연 후 하루를 묵고 친구들과 찾았던 곳이기도 하며, 초등 동창 모임을 한 뒤 아침 쓰린 속을 풀었던 곳도 이 곳이라 더욱 특별한 기억으로 남는 해장국집이다. 충북대학교 후문 쪽 교차로 부근에 위치한 개신해장국집이다. 이곳은 번화한 곳에 위치해 언제나 사람들로 가득하다.
이제는 가업의 형태를 벗어나 일종의 분업화된 작은 기업의 형태를 띨 정도로 전문화된 가게다. 꼼짝하기 싫은데 해장국이 먹고 싶을 때 미리 전화를 하면 먹음직스럽게 포장된 해장국을 받을 수 있다. 이 집의 대표 해장국은 '내장탕'과 '콩나물 해장국'인데, 역시 선지가 주요 재료로 들어간다.
남주동에서 무심천변을 따라 걷다 사직동 방향의 서문교를 건너면 마치 도심 속 자그마한 섬처럼 떠있는 아담한 공간에 하늘을 향해 좌우로 두 가지 간판을 두른 사직골뼈다귀감자탕해장국집이 있다. 가게의 외관은 오래된 구멍가게에서 느낄 수 있는 편안함이 짙게 묻어 있는 집이다. 이 집은 앞선 해장국집과는 다르게 돼지 등뼈를 주재료로 한 뼈다귀해장국의 푸짐하고 진한 맛이 일품이다. 흑미가 들어간 공기밥은 정성과 건강을, 길게 썬 깍두기는 나누어 베어 먹는 식감이 선득선득하니 시원하다.
이 글을 마치며 빼놓을 수 없는 감동의 이야기의 주인공도 해장국과 관련된 사람이란 생각이 뇌리를 때린다. 79년 억척스럽게 모은 재산(15억)을 충북대에 장학금으로 쾌척해 세상을 놀라게 한 김유례 할머니다. 할머니의 고귀한 선행이 자란 현장이 바로 땀내 나는 서문시장 해장국집이었다. 서민들의 호주머니에서 나온 손때 묻은 꼬깃꼬깃한 주름진 돈이 영원히 식지 않는 해장국 같은 온정으로 뚝배기 같은 사랑으로 꽃 핀 것이다. 이렇게 청주해장국의 미담은 두고두고 세월을 거스르고 회자되며, 변함없이 사람 냄새 나는 이 땅 청주 사람들의 애환을 풀어주는 든든한 '밥심'으로 오늘도 희망을 안고 새벽을 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