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철호 시인·동양일보 회장
‘우와~저 꽃 터널 좀 봐’ 봄이면 호사 누리는 무심천의 벚꽃잔치
청주시민들은 3월 하순이 되면 설레기 시작한다. 무심천 둑을 따라 시오릿길에 늘어선 묵은 벚나무들이 움을 틔우고, 꽃망울을 내밀면 서서히 바람 날 준비를 한다. 그리고 저마다 내심 카운트다운을 시작한다.
앞으로 보름…열흘…일주일… 닷새… 사흘…내일…드디어 꽃송이가 벙글면, 누구라 가릴 것 없이 “무심천에 벚꽃 피었다-” 소리 내 수선을 피운다. 무심했던 사람도 “그래?” 화들짝 놀라 눈을 돌리면 어느새 축등행렬처럼 벚꽃길이 터널을 이루고, 시내 한복판을 환하게 밝힌다.
축제라는 말, 이곳을 이름이다. 꽃천지란 말, 이곳을 이름이다. 무심천 피라미들도 눈송이처럼 흩날리는 꽃비에 갑자기 눈부시어 수면 위로 튀어 오르고, 밤이면 별들도 무리지어 물속에 잠기어 밤을 새운다.
무심천 벚꽃길의 역사는 이미 1세기에 이른다. 지금 90대 노인들이 무심천 둑길 가까이 있는 청주 영정보통학교(후에 주성초)에 다니던 시절에도 반 아름이 넘는 벚나무가 행렬을 이루고 있었다는 기억이나, 그 때의 여러 기록사진에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벚꽃 터널의 사진이 많이 남아 있음을 보아도 그러하다. 1986년, 그 나무들이 베어지고 수양버들이 심어져 휘휘낭창 가지를 드리우더니, 봄철 솜털꽃이 날린다는 원성에 그 마저 베어지고, 2,346그루의 새로운 벚나무를 식재해 오늘의 벚꽃 터널이 형성된 것도 줄잡아 20년이 넘는다.
이 벚꽃길이 유독 시민들의 눈길을 끌고 길손의 발목을 잡는 까닭은 무엇일까.
두말 할 것도 없이 고도古都 청주시내 한복판을 흐르는 유서 깊은 ‘무심천’ 때문일 것이다. ‘무심천’無心川이라는 범상치 않은 이름이 지니는 감성적인 느낌의 6.5㎞에 이르는 냇물은, 이 나라에서는 흔치 않은 역류천이다.
태백산맥이나 소백산맥을 등뼈로 하는 한국의 지형에서 대부분의 강줄기는 동에서 서로,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것이 예사인데, 무심천은 남에서 북으로 흘러 미호강에 이어진다. 청주시내는 이 무심천을 중심으로 동편은 옛 도심지
요, 서편은 신흥도시다.
시내 지도를 확연하게 가르는 경계선이 바로 무심천이다. 장마철이면 강폭이 늘어나 때로 강변도로 통행을 통제하기도 하지만, 아무리 가뭄이 심해도 바닥을 드러내 보이지 않는 적당수량의 잔잔한 흐름이 유순한 충청도 사람의 기질과 흡사하다.
지금부터 50년 전까지만 해도 무심천은 청주사람들의 거대한 천연 목욕탕이었다. 여름철만
되면 해가 저물녘부터 밤늦게까지 무심천 물굽이를 따라 영운동~석교동~남주동~모충동~사직동~남문로~북문로~우암동~내덕동에서 까치내에 이르기까지 남녀노소가 끼리끼리 몰려들어 여기 저기에 자연스럽게 남탕과 여탕이 형성되어 단원 김홍도의 풍속화처럼 추억에 각인되었다.
물줄기를 따라 줄을 잇고 있는 벚나무들의 성급한 속잎이 피어나는 봄이 오고, 3월 하순에서 4월 초엔 어김없이 가지마다 꽃등이 피고 꽃타래는 늘어져 꽃터널을 이루고, 기다렸다는 듯
사람들이 몰려들어 자연스럽게 축제장 분위기가 된다. 꽃잔치에 몰려든 사람 하나하나도 저마다 꽃이 된다. 이때쯤이면 무심천 양 옆 도로가 차와 사람들로 붐비고 막혀 교통경찰의 호루라기 소리가 요란하지만, 몰려든 사람들은 아랑곳 하지 않고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다.
벚꽃이 만개한 기간이 짧아서 이때를 놓칠세라 달려온 시민들은 밤이 깊도록 떠날 줄을 모른다.
무심천 벚꽃길이 ‘청주의 미래유산 23곳’ 중 하나로 꼽힌 데는 무심천의 유래도 한 몫을 했을 것이다.
1989년, 충북예총은 ‘무심천’의 유래에 대한 논의를 시작했다. 많은 시민들이 무심천을 사랑하고, 즐겨 찾고, 시인 묵객들이 노래하고 있지만, 정작 ‘무심천’이라는 이름의 연유는 무엇일까를 확인하기 위해 나섰다. 무심천 유래 공모 사업을 본격화 한지 3개월이 지났어도 그럴듯한 내용이 채집되지 않았다.
그래서 끝내는 한국국토지리원에서 발간한 책자의 내용을 근거로, 당시 예총 회장이던 조철호 시인이 ‘무심천 유래비’의 문안을 다듬고, 김동연 서예가가 쓰고, 음성 청원물산 곽우영 회장의 석재기증으로 세워졌다. 조각은 충북출신 조각가 김봉구 김경화 김지택 김윤화 정창훈 등 5명의 교수들이 합작품으로, 관계자들 모두가 기꺼이 무료봉사를 해 줬다. 이 유래비는 1990년 10월 14일 32회 충북예술제 개막식장에서 준공식을 가졌다. 현재 청주시 사직동 용화사 가까운 무심천 둔치에 세워진 이 ‘무심천 유래비’ 에 새겨진 비문이다.
무심천 유래비
‘무심천’은 남석천南石川통일신라-심천沁川고려-석교천·대교천石橋川·大橋川조선-무성뚝일본강점시기-에서 오늘의 무심천無心川으로 불려 왔다. 이 무심천에는 확인키 어려운 몇 설화가 전해져 오는바 그 중 다음과 같은 사연이 길손의 발길을 멎게 한다.
청주고을 양지바른 곳에 오두막이 있었네.
그 집에 한 여인 다섯 살짜리 아들과 살았네.
집 뒤로 맑은 물 사철 흐르고 통나무다리 놓여 있었네. 어느날 행자승 하나 찾아들자 여인은 아이를 부탁하고 일보러 나갔고 아이를 돌보던 행자승 그만 깜박 잠들고 말았네.
꿈결인 듯 여인의 통곡소리에 눈을 뜨니 이게 웬일인고. 돌보던 아이 주검 되어 그 여인에게 들려 있네. 사연을 알아보니 행자승 잠든 사이 통나무다리 건너다 물에 빠져 죽었다네. 여인은 아이의 잿가루를 그 물에 뿌리고 삭발 후 산으로 갔다네. 이 소식 인근 사찰에 전해지자 모든 승려 크게 부끄러워하며 아이의 명복을 빌기로 했다네. 그들은 백일만에
통나무대신 돌다리를 세웠네.
그 다리 이름은 남석교南石橋 현재 석교동에 묻혀 있음
이같은 사연 알 바 없이 무심히 흐르는 이 냇물을
일러 무심천이라 하였네
무심천을 오가는 무수한 시민들이, 이 시정 넘치는 무심천의 유래에 관심 갖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싶어 전문을 옮겼다. (이 비가 세워진 이후, 어떤 불교 일파에서 불교를 욕되게 하였다하여 ‘행자승’을 ‘행인’으로, ‘부끄러워하며’를 ‘불쌍히여기어’로 바꾸는 등 교정을 했다고 들었다. 나무에 눈을 가려 숲을 보지 못한 우愚는 아닌지…)
앞서 말했듯 무심천에 관한 시인묵객들의 작품이 꽤나 많은데, 그 중 가장 빼어난 작품으로 노산 이은상(1903~1982)의 ‘무심천을 지나며’를 꼽지 않을 수 없다. 5절로 되어 있는 되어 있는 이 시조 중 지면이 좁아 일부만 옮긴다.
세상이 어지러워 마음 둘 곳 바이없어/막대를 이끌고서 영호嶺湖를 헤매나니/ 무심천 밭 언덕길로 또 한 사람 지나노라/ 다정한 길 나그네 발을 잠깐 머물고서/ 무심천 흐르는 물 유심히 바라볼 제/저 물도 내 안을 알아 따라 울어 예더라
-‘무심천을 지나며’ 중 4,5절
이 시는 이흥렬의 작곡에 의해 가곡으로 애창되어 왔는데, 지금도 7,80대의 노신사들이 주흥이 도도해지면 멋지게 불려지고 있음을 본다.
올해도 3월 하순에 접어들면서 중부권 곳곳에서 벚꽃이 피었다며 꽃소식을 전해온다. 호들갑에 가까운 이들 개화소식에 이어 꽃향기도 묻어온다. 살기 팍팍한 시대의 주름살을 잠시 펴고 무심천 벚꽃 소식과 그 향기에 취해 호사를 누려보는 새 봄의 이 축복을 무엇에 비기랴.
조철호 시인·동양일보 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