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돌아보니 밉든 곱든… 인연 있는 이들이 모두 내 사람”
[동양일보] 청주에서 제천을 가려면 거쳐야 되는 충주-. 그 충주호반의 굽이 길을 몇 차례인가 끼고 돌아도 계속 이어지는 벚꽃 터널은 눈이 부셨다. 호수면의 반사 빛이 꽃송이마다에 생기를 불어 넣어 길손의 발목을 잡는다. 제천 의병의 의혈이 대물림하여 ‘제천 사내들의 뚝심’이 되었을 제천을 찾는 심사가 이번엔 그리 곱지 못하다. ‘파란의 정치인’ 송광호(宋光浩·82·제천시 장락동 장락로즈웰아파트) 전 의원을 만나는 길이어서다. ‘근래 들어 살고 있는 고향 밖으로는 행보를 하지 않는 듯하다’ 는 전언傳言에 송씨문중의 어른이요, ‘제천의 대부’로 일컫는 송만배(88) 전 제천문화원장께 만남을 주선해달라 부탁했다. 요즘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다, 몸담아 있던 정치권과 옥살이 4년의 족쇄가 풀린 지도 만 4년이나 지났으니 소회所懷 정도 가볍게 듣고자 한다고 전해 달라 첨언添言을 했었다. 얼마 후 인터뷰에 흔쾌히 응한다는 답이 왔다. 그래서 서둘러 가는 길엔 봄기운이 한껏 따라 붙었다.
약속 시간인 오전 11시, 만나기로 한 동양일보제천본부 앞에서 송 의원과 맞닥뜨렸다. 진청색 양복에 자주색 넥타이의 말쑥한 정장인데 흰 운동화를 신고 있다. 10년도 넘는 동안 만나지 못했던 송 의원과의 첫 대면은 내 예상을 깼다. 173㎝의 키에 73㎏의 건강미가 넘치는 늠름한 체격과 혈색이 좋은 둥근 얼굴이 옛날 4선 여당 중진의원 때의 모습 그대로가 아닌가. 4년간의 옥살이에 아무리 건강관리를 잘한다 해도 심신이 다소 상했을 것이란 예측은 빗나갔다. 어딘가는 주눅이 들었을 것이라는, 그래서 조심스럽게 인터뷰를 해야겠다는 소심한 생각도 다 기우杞憂였다. 다행이다.
● 참 오랜만입니다. 건강해 보이십니다.
“우리 만난 지가 한 10년 쯤 됐지요? 내 감옥에서 4년, 나와서 4년이 지났으니. 출옥 후 모든 감정의 찌꺼기를 내려놓고 열심히 운동하면서 이제 이만큼 건강을 찾았지요. 하루 3만보쯤을 걷습니다. 15대 국회의원 낙선한 후 승용차를 없애고 걷거나 대중교통을 이용하면서 사람들 만나고 건강관리 할 때와 같습니다. 지금도 승용차 없습니다. 걷느라 늘 운동화를 신지요. 갓 쓰고 양복 입은 것 같아 보이지요?”
● 그래서 정장에 흰 운동화 차림이군요. 운동시간은 정해져 있나요?
“오전 5시부터 8시까지, 그리고 독서를 하고 오후 2시부터 3·4시까지 또 걷습니다. 3만보 전후를 걷는데 어느 땐 4만보를 걸을 때도 있어요. 걷는 운동이나 뛰는 운동은 명상의 스포츠라 하잖아요. 생각을 많이 하게 되고 정리도 되지요. 제천 지역의 환경변화 등을 살피고, 지인들과의 교감을 위해 더 이상 좋은 방법이 없지요. 15대 때 낙선 되자마자 거리 인사에 나섰었어요. 로터리마다 서서 지나가는 차량과 행인들에게 인사를 했지요. 제천과 단양의 읍,면을 모두 다니는데 꼬박 한 달이 걸렸어요. 내가 대한민국의 선거 출마 후보들 ‘거리 인사’의 창시자래요.” (‘~래요’ 는 제천, 단양과 강원지역 억양으로 ~랍니다‘의 줄임말)
● 그 당시 낙선자의 낯선 모습이어서 신문에 거리인사 하는 송 의원 사진이 나왔었지요. 의원 시절엔 국회도서관에서 책을 제일 많이 빌려간 의원으로도 소문이 났었지요? 지금도 독서를 많이 하시는지요.
“전 요즘도 신문이나 책을 열심히 그리고 많이 봅니다. 위인전이나 명사들의 자서전은 거의 보았습니다. 그 속에 세상 모든 것이 들어 있지요. 감옥에 있을 때도 책 많이 보는 게 소문이 나서 보기보다는 학구적이라고들 했다고 들었습니다.”
송 의원은 단양출신으로 제천고를 나와 성균관대(경제학과)를 졸업하면서 ROTC출신 육군소위로 임관, 중령으로 예편한 지 8년 만에 14대 국회의원(국민당, 제천. 단양)에 당선돼 16대, 18대, 19대에 당선됐고, 새누리당 최고의원과 국토해양위원장을 지냈다.
● 군에선 정보기관 일을 하셨지요.?
“중위 때부터 18년간 보안사령부에서 근무했습니다. 월남전 참전도 했고, 주로 사령부의 정보 분석관으로 일했습니다. 대위 때 이진삼 중령(후에 육군대장으로 참모총장)께서 특별히 아껴 주셨습니다. 서울 변두리에 집이라도 한 채 장만하라며 급여가 높은 월남전 파견도 주선해주셨지요. 중령으로 6사단 보안부대장을 할 때는 옥천출신 박준병 보안사령관께 건의한 것이 있었어요. DMZ(군사분계선)넓은 공간에 대형 축구장이나 야구장을 만들어 국제 경기를 유치하면 대한민국의 분단현실을 세계에 알리고, 남북 대치의 현상도 보여주면서 폐쇄적인 북한실상을 외국인들의 눈으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제안이었어요. 실현은 되지 않았지만, 박 사령관은 다른 자리에서 기발한 아이디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답니다. 국가에 충성하는 일에 열중했던 군 생활은 지금까지도 나를 지탱해 주는 생애의 토양이었지요.”
● 4선 중진의원일 때 뇌물죄로 4년형을 받았지요? 재판기록을 보면 2012년부터 철도부품업체 이모 대표로부터 2년간 11차례에 걸쳐 6500만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다 지난 일이지만, 이 내용이 맞습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11차례에 6500만원이면 한 번에 몇 백만원 꼴인데, 술밥 등 향응은 몇 차례 받았지만 뇌물을 받은 것은 없다고 주장했지만, 내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았어요.”
● 그 당시 일설엔 박근혜 대통령의 장관 인사에 농지법위반자, 병역미필자, 세금탈루자 등 부적격자들이 연달아 나오는 것에 송 의원이 ‘이런 자들이 임명되면 대한민국은 미래가 없고, 박근혜 대통령도 성공한 대통령이 될 수 없다’는 공개적인 비판이 부메랑이 되어 감옥에 가게 됐다고들 했는데요. 맞습니까?
“다 지난 얘기지요. 더구나 박 대통령이나 그를 보좌하던 김기춘 비서실장 등 모두 불행하게 되었기에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들이 모두 내가 옥살이하는 동부구치소에 뒤늦게 들어 왔어요. 김 실장은 복도에서 마주치면 언제나 고개를 돌리더군요. 교도관들이 말하더군요. 왜 김 실장은 송 의원만 보면 고개를 돌리느냐고요. 나를 특가법상 뇌물죄로 감옥에 보낸 것에 일말의 죄책감이라도 느꼈다면 다행이고요. ‘인생사 새옹지마’가 실감됩니다.”
● 감옥생활은 어떠했는지요.
“사람들은 감옥이 마치 아비규환의 지옥으로 알지만, 그 속에도 바깥세상과 같은 인간사가 엮여집니다. 불행한대로 위안 하고, 희망을 말하고, 진실과 거짓, 분노와 화해, 갈등과 조화… 등 배울 것들이 많았어요. 특히 실추된 명예와 자존감을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에 관한 깊은 성찰이 철학적인 일깨움을 주었지요. 살아온 세월과 주변사람들을 돌아보는 기회도 됐고요.”
● 무사히 복역을 마치고 나와 보니까 어떻던가요.
“예상대로지요. 정치적인 이해관계가 있거나 친숙도의 차이에 따라 천차만별이지요. 오히려 내가 도움을 주었거나 가까이 했던 사람들 중 일부는 등을 돌리는데, 먼발치에 있던 사람들이 달려와 고생했다며 위로하고 밥 한 끼라도 할 시간을 만들어 달래기도 해서 느낌이 컸어요. 누구라 밝히지도 않고 고구마며 호박이며 농사지은 것 집 앞에 갖다놓고 가는 농심에 감동이 되더군요. 더 열심히 주변을 섬겨야겠다는 결심이 섰습니다. 요즘 들어서는 제천출신으로 최초의 감리교회 목사이자 독립운동가인 탁사 최병헌 선생을 기리는 기념사업회(상임고문)와 지난해 결성된 자유헌정포럼(공동대표)만 관계하고 있습니다.”
● 일단 정치활동은 접은 상태지만, 현 시국을 보는 시각은 어떤지요.
“이런 이념대립의 극한 상황은 일찍이 보지 못했어요. 국민을 두 패로 갈라놓으면 어쩌자는 것입니까. 우리의 적은 북한이잖아요. 저들이 노리는 대로 가는 것 같아 안타깝지요. 갈등과 대립만 있지 정치가 없는 세월만 자꾸 흘러가고 있으니 가슴이 답답해요. 못났든 잘났든, 뜻에 맞든 안 맞든 뽑힌 대통령이 일을 잘 하도록 끌어주고 밀어 주어도 힘든 국제정세며 국내경제판도에 불안감만 자꾸 조성되는 듯해서 큰일이다 싶어요.”
● 그동안 송 의원을 지켜 주신 분들이 많지요?
“그럼요. 우선 제천 단양 주민들이 오늘의 송광호를 한국 의정사에 남는 4선 의원으로 만들어 주셨지요. 단양 매포읍의 가난한 농부의 아들을 오늘에 이르게 해주신 주변 친지들 모두가 은혜를 주신 분들이지요. 제천역 앞에서 평생 구두닦이를 하는 친구부터 제천고 동기생인 소장수 이태희, 동기회장 이신일, 특히 제천 중·고와 대학에서 학훈단 까지 함께한 후원회장인 ANC그룹(국제항공화물) 이호우 회장 등 평생 잊을 수 없는 친구들의 은혜가 태산이지요. 온갖 수모를 감수하며 나를 믿어준 아내(권태선·82)와 한국과 미국에서 잘 살고 있는 자식들(1남3녀)이 큰 버팀목 이지요”
● 좌우명이나 이쯤에서 남기고 싶은 말이 있다면…
“어려서부터 ‘하면 된다’를 되뇌이며 살았어요. 그래서 남보다 더 많은 땀을 쏟으며 앞만 보고 달려 왔습니다. 이제 8순을 넘어서서 돌아보니 밉거나 곱거나 인연 있는 모든 이들이 다 내 사람이에요. 그동안 베품보다 받은 은혜가 너무나 컸다는 뒤늦은 깨달음에 부끄러움이 앞섭니다. 남은 여생을 헌신적인 삶으로 보답하려 합니다. 부디 나라와 제 주변의 모든 분들이 건강하시기를 진정으로 바랄 뿐입니다.”
긴 시간 좋은 말씀 고맙습니다.
/조철호 시인·동양일보 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