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명균

[동양일보]목명균(42‧경기 김포시)씨의 단편소설 ‘프리다 칼로의 도마’가 24회 무영신인문학상 당선작에 선정됐다.

무영신인문학상은 한국문단에 ‘농민문학’이라는 새 이정표를 세운 ‘흙의 작가’ 이무영(1908~1960) 선생의 문학 혼과 작가 정신을 기리기 위해 동양일보가 제정한 상이다.

이번 공모에는 전국 각지에서 총 169편의 작품이 응모됐으며 문단 권위자로 구성된 심사위원회는 본상에 오른 작품 중 ‘프리다 칼로의 도마’를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시상식은 오는 21일 금요일 오전 11시 이무영 선생의 고향인 음성(충북 음성읍 석인리 364-1 이무영 생가)에서 열리는 30회 무영제에서 진행된다.

24회 무영신인문학상 당선작과 당선 소감, 심사평을 싣는다.



아빠는 점점 어린아이가 되어가고 있다. 집에 가고 싶다고 생떼를 부리고 밥이 맛없다며 인상을 썼다. 그러다가도 엄마가 아이 착하다. 흘리면 안 되지. 하면서 입가에 묻은 밥까지 숟가락으로 걷어올려다 주면 입을 딱딱 벌리며 받아 먹었다. 처음에는 병원이 싫어서라고만 여겼다. 무서운 속도로 몸을 갉아 먹고 있는 암세포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약물로 인한 부작용이 치매 현상처럼 온다는 것을 잘 몰랐다. 부모가 시들어가는 상황이 인생에서 반드시 거쳐야 할 부분이란 것은 안다.

그즈음 나의 일상은 늘 같은 행동 패턴을 가지고 움직였고, 무겁고 어두운 감정의 무게를 유지하고 있었다. 퇴근을 하면서 세탁해 둔 엄마의 옷가지며 수건 등을 챙겨서 병원으로 갔고, 도착하자마자 아빠의 팔다리를 주무르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억지스럽게 꺼내놓았으며, 쓸데없이 배시시 웃기도 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뛰쳐나가 울곤 했는데 복도 끝으로 가면 또래의 젊은 남자가 울고 있었고, 계단으로 가면 대학생쯤 되는 청년이 울고 있었다. 밖으로 나가도 마찬가지였다. 병원은 죽음 자체였다.

여느 때와 같이 아빠 옆에 있다가 눈물 때문에 병실에서 급하게 나왔다. 이번엔 감정 조절이 약간은 가능했기에 쏟아내기보다는 집어 넣어보고자 휴게실로 가서 TV 앞에 앉았다. 함께 이야기하기 위해 앉아있는 보호자와 방문객들 외에도 TV를 보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이곳저곳을 돌려보며 감정을 누를 만한 프로그램을 찾았다. 그러던 중 흑백의 화면 속에서 내 눈길을 사로잡는 여인이 등장했다. 프리다 칼로를 주제로 한 다큐멘터리였다. 진행자와 그녀를 상담했던 정신과 의사가 소파에 앉아 대화를 하고, 그녀가 사랑했던 사슴과 원숭이, 털 없는 강아지와 함께 있는 사진들이 차례대로 나오고 있었다. 자신에게 정착하지 못하는 남편과 불임으로 인해 스스로 평범함과 차별을 두어 괴로워했던 여자. 동물들은 그녀의 자식이었다.

사실 프리다 칼로라고 하면 대학 시절 놀라웠던 기억이 있다. 지금은 작업과 상관없는 일을 하며 그럭저럭 살고 있지만, 한때는 내 작품을 그리기도 했었다. 그때 나는 어릴 시절부터 핏줄이 떨어져나가는 경험을 해서인지 세상을 꽤 많이 아는 것처럼 분위기를 잡곤 했다. 사람들은 온실 속 화초 같은 외동딸이라고 부러워하기도 하고, 비꼬기도 했지만, 후천적 외동딸은 우울의 그림자가 없는 보통의 가정이 부러웠다. 이미 태어난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치열하게 고민했지만, 굳은살이 생기기는커녕 사람들이 병들고 떠나며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는 세상이 점점 더 무서워졌다. 그렇기 때문에 내 그림의 주제는 대체로 고통받는 사람들, 그리고 허무함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프리다의 그림을 보고는 일기장 한 귀퉁이에 그렸었던 스케치가 떠올라 소름이 돋았다. 사람의 가슴께까지 그려진 실루엣에 못이 다닥다닥 박혀 있는 나의 스케치는 못에 박혀 울고 있는 프리다의 자화상과 매우 흡사했다. 아, 나보다 빠른 사람이 있었네. 그런데, 이 여자. 도대체 어떤 고통을 겪었기에 저렇게 처절하게 울고 있는 것일까?

의사는 프리다와의 상담 내용을 덤덤하게 말하는 중이었다. 미술의 가치를 위해 기획했다고는 하지만 저렇게 개인의 사생활을 밝혀도 되는 걸까 하면서도 나는 이미 빠져들어 있었다.

“그녀는 버스 사고로 기적적으로 살아났을 때 낙담하지 않았어요. 할 수 있는 거라곤 침대에 누운 채로 천장에 걸린 거울을 보면서 자신을 그리는 일뿐이었죠. 게다가 그녀는 의사 지망생이었어요. 그런데 뭐라고 한 줄 아세요? ‘그림을 그리면 되는데 의사가 못 되면 어때요?’ 그렇게 화가의 길로 접어들었지요.”

그 장면을 보면서 엉뚱하게도 ‘나는 어떠한 계기로 그림을 그려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지?’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7살 때였다. 나는 혼자서 잘 놀았다. 그림을 그리고 오리고 붙이며 무언가를 만들기 좋아했는데, 항상 혼자 중얼중얼 떠들고 있었다. ‘왜 자꾸 말이 나오지?’ 나는 그런 내가 피곤했다. 어째서 끊임없이 상상하고 상황극을 만들어 입으로 조잘거리고 있는지, 정말 하기 싫은데 그게 잘 되지 않았다. 아마도 늘 함께했던 동생과 형성한 세상에서 벗어나지 못해서였던 것 같다.

그해 나보다 2살 어린 동생은 간에 갑작스러운 이상이 생겨 입원을 했다. 가족의 온 신경이 동생에게로 쏠리고 나는 외할머니와 함께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어느 날, 엄마는 동생에게 줄 감색 벨벳 드레스와 굉장히 많은 장난감을 사 왔다. 마냥 순했던 나는 질문을 내뱉지 않고 생각만 하는 편이었다. ‘작은이가 아프니까 빨리 나으라고 드레스랑 선물을 사주는 거겠지? 나는 아프지 않으니까 엄마아빠가 날 예뻐하지 않아도 괜찮아.’ 성인이 되어서 깨달은 것이지만 나는 부모님의 편애에 대한 불만보다도 내 옷을 물려만 입던 동생에게 예쁜 드레스와 그 많은 선물을 사주는 것에 불안함을 느꼈던 것 같다.

동생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이번엔 반드시 질문을 해야겠다 싶었다.

“작은이 드레스 입고 하늘로 올라갔어?”

“응. 예쁘게 입고 날개 달고 올라갔어.”

“인형도 다 가지고 갔어?”

“응. 전부 다 가지고 아기천사처럼 올라갔어.”

그때부터 나는 감색 벨벳 드레스를 입은 동생이 양손 가득 장난감을 안고 병실 침대에서 하늘로 날아올라 가는 상상을 자주 했다. 그런데 그것을 스케치북에 그리다 보면 항상 날개 부분에서 멈칫했다. 드레스가 덮고 있는데 몸의 어느 부위에 날개가 달려서 날아간 것인지, 그렇다면 모양이 이상한데 그게 아니라면 날개가 드레스를 뚫고 나온 것인지 이러한 의문이 생겨서였다. 결국 해결하지 못한 채 날개 부분을 대강 뭉개어 넘기면 이번엔 병실 천장을 어떻게 처리해야 동생이 하늘로 날아갈 수 있을까에서 부딪혔다. 그래서 나의 그림은 항상 동생이 병원 천장으로 올라가는 도중에 끝났다. 자세한 광경을 엄마에게 더는 묻지 못했지만 어쨌든 동생이 한밤중에 소리 지르며 아파하지 않는 천사가 되었으니 좋은 일이라고 여겼다.

동생의 빈자리는 우리 가정을 더욱 어둡게 만들었다. 엄마 아빠의 관심이 나에게로 쏠렸지만 행복하지 않았다. 나의 반쪽이 떨어져 나간 듯한 허전함과 불안감에 무언가를 해야만 할 것 같았다. 어린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동생과 함께하던 것처럼 상황극을 만들어 이야기하며 그림을 그리는 것뿐이었다. 하루는 뭔가 특별한 것을 그리고 싶어서 크레파스를 들고 주제를 찾기 위해 골똘히 고민했다.

“엄마가 요리하고 있으니까 도마를 그려서 주자.”

“칼도 있어야지.”

그림의 구성은 스케치북에 도마를 가득 차게 배치하고, 그 위에 칼이 올려져 있는 모양으로 했다. 억지를 조금 부린다면 어린 나이에 일찍 정물화라는 분야에 진입한 셈이다. 색칠까지 마친 후에 스케치북을 가지고 주방으로 가 엄마에게 덤덤히 보여드렸다. 그런데 그림을 본 엄마가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모습으로 굉장히 놀라며 감탄에 감탄을 연발하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곧바로 아빠를 불러 어리둥절해 하는 나에게 함께 칭찬을 쏟아부었다.

“아니, 어떻게 도마랑 칼을 그릴 생각을 했니?”

“누구를 닮아서 그림을 이렇게 잘 그려?”

동생이 떠난 후 처음 보는 엄마 아빠의 웃음이었다. 생각지 못한 반응에 나는 그날도 그냥 배시시 웃었다. 그리고 깨달은 바를 굳게 믿게 되었다. ‘아, 나는 그림을 잘 그리며 내가 그림을 그리면 엄마 아빠가 웃는구나. 화가가 되어야겠다.’

그렇게 나는 순진하게도 한 번의 의심도 없이 미대 지망생이 되어 입시 준비를 하게 되었다. 돌아보면 우리 가족이 오랜만에 웃었던 그 날처럼 그림을 그리면서 쭉 행복하지 않았다. 입시학원에서 하루 4시간씩 반복적으로 그려내는 석고상들은 지루했다. 선생님은 우리를 기계 시스템처럼 훈련시켰다.

“명암 들어갈 때는 빛이 왼쪽이나 오른쪽에서 오는 걸로 정해야 해. 정면이나 천장에서 떨어지면 덩어리 표현에 실패하는 거야. 야, 기초 명암을 깔 때는 연필을 깍지에서 빼면 안 돼. 그래, 전체 깔아주고, 빛 반대편에 한 번 더 깔아줘. 목에 더 깔아줘야 얼굴보다 들어가 보일 거 아니냐. 생각을 해라, 생각을. 쟨 왜 그래? 비너스 머리로 국수 삶아 먹을 거야? 누가 머리부터 파래? 쑥 들어간 눈, 코 측면, 목, 다이 과감하게 명암 들어가. 미술은 수학이야. 니들 수학 못 하지? 모지리들아.”

미술이 수학이라니. 나에게 미술은 빨간 시럽약 같은 존재였는데,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빼어난 수학자이자 과학자였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배신감마저 들었다. 그러나 나마저도 미술에 대한 의리를 저버린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었기에 나는 특유의 단순함으로 결국 미대에 들어갔다. 정형화된 입시 미술에서 벗어나니 그제야 그림에서 의미를 찾고 싶어졌다. 작품을 세상에 내놓기 전에 과거에 동생을 잃은 상실감을 이겨내고, 앞으로 상실할 것에 대해 채비를 해야 했다.

TV 화면에는 혈관까지 연결된 두 명의 프리다가 그려진 그림이 나오고 있었다.

“프리다는 사고로 인해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이었지만 끊임없이 자신을 다른 여자들과 비교하며 핏줄을 원했습니다. 가정을 겉도는 남편 디에고에 대한 사랑이 집착으로 바뀌었죠. 저는 다른 사람이 아닌 본인을 사랑하라고 말했고 그녀도 노력했어요. 그녀의 작품에 자화상이 많은 이유이기도 합니다.”

고통스러운 육체와 자신의 것이 되지 않는 남편, 소유할 수 없는 자신의 핏줄, 앞으로 사라질 가족. 평범함을 꿈꾸며 이 모든 것을 혼자서 견디는 것이 얼마나 외롭고 처절했을지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가슴 한가운데가 쿡쿡 쑤셔왔는데, 남을 향했던 그 안쓰러운 마음이 어느새 나에게 와서 닿아 있었다. ‘너 진짜 외로웠겠다. 동생 보고 싶다고 아이답게 한 번 징징대지도 못하고.’

오랜만에 받는 위로의 느낌이었다. 미술사를 공부하는 수업 시간에 화가들의 생애와 그림의 배경을 알게 되면서 느낀 것은, 얼마 살아보지도 않은 사람들끼리 어설프게 서로 털어놓고 위로하는 것보다 저들의 이야기를 통해 스스로 위안을 얻는 것이 더욱 효과가 크겠다는 것이었다. 그저 잘 그렸네, 하고 지나치던 그림 속에는 인생의 희로애락이 모두 들어 있었다. 명작을 그려낸 훌륭한 화가들은 갖가지 고통을 겪었다. 그 고통에는 사랑의 배신, 경제적 어려움, 가족과의 이별, 전쟁으로 인한 조국의 몰락, 자신을 떠나지 않는 정신적 질병, 허약한 몸과 육신의 고통, 심지어 화가로서의 무능함까지 포함되었다. 아름다운 나신이 수수께끼처럼 얽혀 있는 알레고리화에서는 젊음, 그것의 아름다움과 천박함, 또 이를 시기하는 세월의 흐름 등 많은 것들을 읽어낼 수도 있다. 역사화를 통해서는 세상의 기록과 인물을 둘러싼 개개인의 족적을 알 수 있고, 풍속화에서는 그 시대 사람들의 풍습과 습관을 엿볼 수도 있다. 심지어 정물화에서도 화가가 그 정물들을 닦고 그것으로 요리를 하며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 알 수 있으며 초상화에 나타난 인물의 표정과 기법에서는 그의 고뇌가 담긴 인생의 변화를 알 수 있다. 나만 겪는 세상사가 아닌 것이다.

희극의 주인공은 바보가, 비극의 주인공은 뛰어난 사람이어야 한다는 법칙이 있다. 영웅이 고통받고 있다. 갈등이 침범하고 고조될 때 이를 보는 사람의 카타르시스는 극에 달한다. 해결되지 않아도 상관없다. 뛰어난 영웅도 저리 고통받는데 나라고 피해 가겠는가. 비극의 주인공과 나를 동일시하다가 극이 끝나면 이렇게 되뇌어도 좋을 것 같았다. 나의 비극도 끝났다고.

일기장에 그려진 나의 스케치와 프리다의 그림이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을 때도 나는 위로 받고 있었다. 나는 부서진 척추를 신전 기둥이 대신하고 있는 이 신화적 영웅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프리다는 남편 디에고와 동생 크리스티나의 불륜 사실을 알고는 그림조차 그리지 못했어요. 그녀를 보는 저까지 입맛을 잃을 정도로 힘겨운 시간이었죠. 그렇다고 디에고를 내가 어찌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의사도 꽤 힘든 직업이랍니다. 친절하면서도 중립을 지켜야 하거든요.”

어떻게 보면 프리다에게 많은 여성이 열광하고 공감하는 이유는 디에고 리베라가 상당한 만행을 저질러 주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밥은 먹고 산 걸까? 그러고 보니 화면 속 프리다는 걱정과 달리 목이 굵고, 어깨가 벌어진 데다 팔도 통통했다. 만약 밥을 잘 먹었다면 그건 더욱 슬프게 다가올 것 같았다.

살기 위해 먹는 밥이 있고, 살 만할 때 먹는 밥이 있다. 나는 눈물 젖은 밥이 싫다. 노점 상인이 추운 바닥에 앉아 찌개에 밥을 말아 먹는 모습을 보면 눈물이 핑 돈다. 장발장을 실제로 봤다면 나는 꺼이꺼이 울면서 우리 집으로 데려갔을 것이다. 마음은 만신창이인데 몸은 허기를 느껴 밥을 욱여넣어야 한다는 것이 너무도 슬프게 느껴졌다. 프리다는 분신처럼 사랑하는 두 사람이 자신을 배신하고 불륜을 저지른 상황에서 살기 위해 밥을 먹고, 기운을 겨우겨우 차리면서 그림을 그렸을 것이다. 병에 걸린 아빠가 심술 난 얼굴로 밥을 딱딱 받아먹는 모습도, 죽어가는 남편 옆에서 딸이 가져다준 도시락을 먹는 엄마의 모습도 눈물겨워서 견딜 수가 없다.

나는 프리다가 고통 속에서 그린 그림을 찬찬히 보았다. 나신의 그녀가 칼에 찔려 피를 철철 흘리며 침대 위에 까무라쳐 있다. 옆에는 디에고로 보이는 남자가 서 있고, 그의 대사는 띠를 이루어 날아간다.

“그냥 몇 번 칼로 찔렀을 뿐입니다, 판사님. 스무 번도 안 된다고요.”

보는 사람까지 고통스러워지는 그림을 보면서 프리다에게 그림은 눈물 젖은 밥과 같은 것이었겠구나 싶었다. 영웅이 그러하니 나 또한 슬프지만 버티기 위해서 밥을 먹어야 하는 인생의 한 단계를 인정하고 걸어가 보자. 그러기 위해서 나에게 맞는 눈물 젖은 밥을 찾아보기로 하자. 이러한 다짐을 하니 먼 곳에서 평온함이 머리를 드는 것 같았다.

“이번 꼬마 작가 주제는 프리다 칼로 어때?”

기획서를 작성하던 날, 아빠 일로 얼이 빠져 있던 나는 무심코 ‘프리다 칼로’라고 적고 있었다.

“그 불쌍한 여자? 그림도 무섭고, 애들한테 보여주기엔 너무 일반적이지 않잖아?”

옆자리 동료에게서 이런 반응이 왔다.

내가 하는 일은 유치원이나 미술학원, 방과 후 교실에서 쓸 교재를 기획·제작하고, 파견 강사들을 관리하는 것이다. 작가의 일과는 거리가 멀지만 그렇다고 아주 다른 일을 하기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미술학원’, ‘미술 선생님’처럼 ‘미술’이라는 단어라도 들어가는 직장에 발을 담그고 있어야 위안이 될 것 같아 스스로 정한 직업이었다. 물론 그림을 그릴 일은 없다. 다음 프로그램에 어떤 미술 놀이를 넣으면 좋을까요? 000 강사 무단결근했다던데요? 대체할 강사를 마련해 둬야 할 것 같아요. 이런 일들이 주를 이룬다.

‘멕시코에 대한 학습적인 내용과 연결해 민속 의상을 입은 자화상으로...’라고 적다가 동료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원래는 이렇게 적어야 하는데. 어린이 여러분, 사람은 결국 혼자가 돼요. 힘들 땐 프리다처럼 씩씩하게 이겨내야 한답니다.”

“선생님은 자기 작업을 해야 하는데. 이런 데 있기엔 개성이 강해.”

“헝그리 정신이 부족해서 못했지. 남자들에 비해 여자들은 찍어 발라야 할 것도 많고, 치마도 좀 사 입어야 하고, 머리도 볶아야 하잖아.”

“프리다도 그랬어? 그림만 그린 거 아니었어?”

“아니, 아파서 누워 있을 때도 얼마나 예쁘게 머리를 해 올렸는데. 그리고 이게 드레스 상의가 아니야. 척추용 깁스라고. 아프다고 우울하게 누워만 있던 게 아니라 그림을 그려서 화려하게 치장한 거야. 아마도 자신의 결핍이 드러나는 게 싫었던 것 같아. 나는 아프지 않고 외롭지 않아. 평범한 너희들보다 더 멋지기까지 하지. 이렇게. 그러니까 우리도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다이어트를 하고 꾸며야 하는 거야.”

“그런데 선생님. 내일 지구가 멸망할 것처럼 비쩍 말랐어. 밥 좀 잘 먹고 다녀.”

“육신을 위한 밥이라기보다 위로를 위한 밥을 먹어야겠어. 상실의 두려움도 힘이 있어야 이겨내겠지.”

마냥 앉아 있을 수가 없어 병실에 가보았더니 아빠는 잠들고, 엄마도 모처럼 쉬고 있었다. 잠깐의 평화에 어색함을 느끼며 문을 닫고 다시 휴게실로 돌아왔다. TV 채널이 고정된 채 프리다가 사람들과 웃고 있는 모습, 담배를 피우며 편안한 눈으로 카메라를 응시하는 사진들을 내보내고 있었다.

“그림과는 다르게 평소 모습은 밝아 보이는데요. 그녀가 희망을 이야기한 적은 없었나요? 이 그림만 해도 자신의 얼굴을 한 사슴이 화살에 맞아 죽어가고 있어요.”

의사는 자신 있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프리다는 농담을 좋아하는 유쾌한 사람이었어요. 그리고 고통에서 빠져나오고 싶어 했습니다. 그녀는 나에게 쓴 편지에서 그림 속 장치들을 알려주곤 했어요. 사슴 앞에 나뭇가지 보이시죠? 우리 풍습대로 좋은 곳으로 가라고 놓아준 겁니다. 표정 보세요. 아픈 사람 얼굴이 아니에요.”

나는 핸드폰을 들어 액정에 얼굴을 비춰 보았다. 나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가. 온실 속 귀한 외동딸의 얼굴인가. 핏줄에 대한 열등감에 시달리는 절망 가득한 모습인가, 나 자신을 살릴 힘이 있는가. 앞으로 나의 자화상은 어떻게 진행될 것인가. 나는 근육을 풀어 덤덤한 표정을 지어 보았다.

아빠는 평생 일 중독으로 바쁘게 살았다. 남자답고 멋진 외모에 목소리까지 좋아서 사람들에게 인기가 넘쳤지만 내 눈에는 늘 무뚝뚝하게만 보였다. 그런 점에 크게 불만이 있지는 않았다. 성인이 되어서는 아빠의 카리스마를 물려받지 못한 것이 아쉽기도 했다. 어쨌거나 아빠의 무뚝뚝한 면을 똑 닮은 나는 아빠와 다정한 부녀관계보다는 굵직한 말만을 주고받는 부자 사이 같았다. 부모님과 떨어져 서울에서 생활하는 내가 고향 터미널에 내리면 항상 아빠가 터미널 맞은편에 주차를 하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반가워서 아빠! 하고 달려가다가 갑자기 브레이크가 걸린 듯 아빠가 어색하게 내미는 손에 악수를 하기도 했다. 그랬던 아빠가 아프고부터는 사소한 것들에 관심을 많이 가졌다. 아니, 관심 있게 보았던 것들을 말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정신이 온전할 때는 생각지도 못한 질문을 하기도 했다.

“니 방에 걸어둔 그림은 뭘 그린 거야?”

그린 지 10년이 다 되어가는 그림을 궁금해하다가 이제야 물어본 것이었다. 동생의 승천에 대해 생각만 하다가 묻지 못한 나의 모습과 비슷했다. 아빠가 내가 그린 그림을 무서워하는 것 같다는 이야기를 엄마에게서 이미 들은 상태였다. 문제의 그림은 전체적으로 보라색 빛을 띤 파스텔화로 동그랗고 커다란 얼굴이 중앙에 있고, 가로로 긴 눈이 끔뻑끔뻑할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으며, 머리카락이 흩날리면서 오선을 이루어 그 위에 음악 기호들이 부유하는 구성이었다.

“전에 꿈을 꿨는데, 내가 음악이 되어서 여기저기 날아다니게 됐거든. 그런데 세상에 너무 행복한 거야. 어두운 곳이었는데 몸이 굉장히 가볍고 자유로웠어. 그렇게 건물 안을 나비처럼 곡선을 그리면서 날아다니다 보니 어느 방에 작은이가 있는 거야. 너무너무 반가워서 눈물이 났어. 그런데 부르지는 못했어.”

“널 그린 거야, 작은이를 그린 거야?”

“나야.”

주인공이 나라고 대답한 이유는 산 사람을 위한 그림이었기 때문이다. 산 사람이 떠난 이를 그리워하고, 산 사람이 위로받아야 했고, 산 사람은 미래의 불안도 떨쳐야 했다. 아빠는 내 대답에 별다른 말없이 천장만 바라보다가 다시 잠들었다. 무슨 생각을 했을까. 먼저 떠난 동생을 생각했을까.

발병한 이후로 아빠는 항상 가지런히 길게 누워 있었다. 키가 크고 뼈대가 큰 아빠는 버거웠다. 옷을 갈아입힐 때도, 침대에서 오르내리게 할 때도 기다란 팔다리가 휘청거렸고 누워 있으면 마른 몸이 유난히 더 길어 보였다.

“그렇게 인물 좋고, 목소리 좋은 거 따지더니 키가 크니까 안 좋은 면도 있네?”

“아이고, 누가 아니라니. 아프면 변한다던데 늬 아빠는 기세가 등등하다. 맨날 짜증이야. 근데 그런 모습이 애기 같고 귀여워. 불평하면서 밥 받아먹는 거 봤지?”

잘생겼던 사람도, 젊었던 시절을 뒤로 하고 죽어간다. 살이 마르고, 가죽은 물기가 빠져 퍼석퍼석해지며, 장기가 제 기능을 못 해 냄새가 난다. 죽어가는 아빠가 가장 가엾은 것은 자신이 죽을 걸 알고, 죽음을 기다리며 누워 있는 것이다. 희망 없이 스스로 죽을 수도 없어 수많은 약을 투여 받고, 밥을 먹다가, 죽으로 바뀐 식단을 먹다가, 또 죽을 대신하는 하얀 약을 링거로 받으며 그저 누워 있는 것. 배에 툭 튀어나온 커다란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어서 나에게 직접 이게 암이라고 말해주는 것. 그것이 마음 찢어지게 아팠다. 앞으로 엄마의 죽음과 나의 죽음에 대해서도 어찌하지 못하고 마주치는 삶을 살아야겠지?

아빠는 아직 살아있었지만 나는 병원 인근 사진관에 영정사진을 부탁했고, 장례식장과 묘지를 알아봐야 했다. 죄지은 듯한 표정의 나에게 묘원 직원은 “다들 미리 준비하셔요. 당연한 절차입니다. 오늘도 병원에 계시지만 미리 계약하러 오신 분들이 있었어요.”라고 나를 위로했다. 계약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나는 길에 쪼그리고 앉아 엉엉 울어버렸다. 한 아주머니가 나를 일으키며 “길에서 울면 안 돼요.” 했다. 나는 처음 보는 사람에게 “아빠가 죽는대요. 내 동생도 죽었는데 아빠도 죽는대요.” 하면서 서럽게 울었다.

동생이 떠났을 때, 어려서 미쳐 온몸으로 겪지 못한 고통과 슬픔이 아빠의 죽음 앞에서 몇 배가 되어 한꺼번에 몰려왔다. 이제 나는 꿈속에서 두 사람을 기다려야 하겠지? 죽은 사람은 꿈속에서도 말이 없다던데 목소리는 영영 듣지 못하는 것일까? 병에 걸려 누워 있는 아빠라도 살아만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나의 결핍을 증폭시키지 않으려는 이기적인 생각이었다. 나는 이제 두 사람의 모습을 박제시키기 위해 그림을 그려야 할지도 모른다. 마음의 설계를 다시 해야 했다.

나는 마음이 고통스러울 때면 잠들기 전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한다. 내 머릿속에 구역을 나누고, 재구성하고, 청소하기도 한다. 그렇게 하다 보면 마음이 깨끗해지면서 평온해진다. 이번에도 의식을 치르듯이 진행해보기로 했다.

캄캄한 곳에 서 있던 나는 문을 열고 거실을 지나 방으로 들어간다.

시뮬레이션 1. 아빠를 붙들고 싶은 마음을 서랍에 담는다. 그 마음은 크리스마스카드의 모양을 하고 있다. 동생에 대한 카드도 들어 있다. 두 카드를 함께 두니 마음이 따뜻해진다.

시뮬레이션 2. 앞으로 다가올 죽음은 두려움이 아니다. 그 두려움을 꺼내어 쓰레기봉투에 담는다. 봉투가 금세 반 이상 찼다.

시뮬레이션 3. 다른 서랍에서 옛날 일기장을 꺼낸다. 펼쳐보니 나의 을씨년스러운 스케치들이 있다. 그것을 이젤 위에 둔다.

시뮬레이션 4. 핏줄이 죽는다고 가족의 존재가 영원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나는 결코 불쌍하지 않다. 마지막 서랍에서 열등감을 꺼내어 쓰레기봉투에 담아 꽉꽉 묶는다.

시뮬레이션을 끝내고 문을 열고 나오려는데 저쪽 방문의 열린 틈으로 노란 불빛이 보인다. 들어가 보니 프리다가 식탁 한편에 앉아 있다. 맞은편에 앉는다. 우리는 말없이 식사한다. 우리의 몸에는 못이 박혀 있다. 그녀가 나이고, 내가 그녀인 것처럼 어떠한 이해나 생각도 필요치 않았다. 아무런 고통도 느껴지지 않는 따뜻한 식사였다.

아빠의 마지막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껴 마음이 급해진 나는 빨래가 끝나는 알림음도 듣지 못한 채 책을 꺼내어 프리다의 그림을 찾는 데 열중했다. 나의 눈은 그녀가 그린 말년의 작품을 쫓고 있었다. 그녀는 척박한 땅 위에 길게 누워 있었다. 보기만 해도 목이 타는 환경인데, 그녀의 몸에서 나무줄기와 잎사귀들이 뚫고 나와 땅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그녀는 곧 뿌리 자체가 되어사라질 모양이었다.

나는 평범함에 집착하던 그녀가 멕시코 대지에 자기 자신을 뿌리내리는 주체적인 모습에 안도했다. 그리고 고마웠다. 나는 그림 속에 나의 얼굴을 넣어 뿌리를 내리고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죽기 전 아빠는 내가 마치 고아가 될 것처럼 불쌍해하면서 고모의 아들딸 며느리 앞에서 울었다. 나는 아빠에게 친척들과 친형제처럼 자주 왕래하고 지낼 테니 걱정하지 말라는 거짓말을 했다. 가정도 꾸려서 북적북적 행복하게 잘 살겠다고도 했다. 나의 말에 안심했는지 마지막 숨이 사그라들 때 아빠의 표정은 편안했다. 잠든 아빠를 오열하며 끌어안는 엄마를 고모가 떼어내려 했고, 나는 그런 고모를 밀쳐냈다.

아빠의 영정사진 앞에 고모의 며느리가 와서 눈물은 없고 소리만 있는 울음을 보여주었다. 아빠의 옛 친구는 엄마에게 이제 챙길 남편 없으니 편하겠다며 당치도 않은 유머를 해댔다. 살아있는 자들은 죽음이 남의 일이기만 한 양 기름지고 번들거렸고, 이쪽 편은 어두움에 모든 것을 빼앗겨 버린 듯했다. 사람들은 나에게 어서 결혼하여 엄마에게 아이를 안겨 드리라고 했다. 나는 네,라고 또 거짓말을 했다. 자신의 외로움을 없애기 위해 동의도 없이 새 생명을 만들어 내고, 그렇게 태어난 생명에게 살아갈 고통을 되풀이시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생각만 해도 몸이 떨렸다.

나는 사람들이 한 차례 다녀간 빈소에 앉아 앞으로 슬픈 엄마를 보호하고, 다른 생명에게 내가 사라지는 이별의 고통을 주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핏줄에 대한 열등감을 안은 채 외로운 길을 갈 것이었다. 그리고 아빠의 걱정처럼 외롭게 흔들리지 않도록 나 자신이 견고한 뿌리가 되겠다고 영정사진 앞에서 약속했다.

동생이 떠났을 때 아빠의 고향으로 갔듯이, 엄마는 아빠가 사라진 지역을 떠나 나와 함께 살기로 했다. 엄마는 이사할 집을 찾는 데 정신을 쏟으려 했다. 우리가 정한 조건은 아무런 연고도, 추억도 없어야 하면서 직장을 옮길 생각이 없었으므로 통근이 가능한 지역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마침내 마음에 드는 동네를 찾은 엄마는 그 즉시 부동산을 방문해 하루 만에 집을 계약했다. 조성된 지 5년밖에 되지 않은 이곳은 우리가 원하는 것처럼 새로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서울과 가까운 신도시로 젊은 부부와 아이들이 많아 활기가 있었고, 아직 개발되지 않은 농지가 띄엄띄엄 보여 한산했다. 우리는 이곳이 남은 자들의 마음을 차차 치유해 주기를 바라면서 이삿짐을 정리했다. 엄마는 곧 내 짐들을 보면서 잔소리를 시작했다.

“끔찍한 그림들은 좀 치우면 안 되니? 예술은 꼭 요상해야 해? 이거 너잖아. 딸 몸이 다 찢겨서 피투성이인 걸 어느 엄마가 그림이랍시고 감상하겠니? 이 여자는 또 누구고?”

“이건 이상한 게 아니고 수면제 같은 거야.”

아빠를 잃을 고통에 잠 못 이루던 날, 시뮬레이션에서 만난 프리다와 나를 캔버스에 옮겼다. 그림의 중앙에 시소를 배치했는데, 한쪽에는 부모와 아이들이 함께 있는 평범한 가족을, 다른 한쪽에는 못에 찔려 핏자국이 난 우리 두 사람을 그려 넣었다. 그 시소는 수평을 이루고 있었다. 그녀와 나는 핏줄의 결핍에서 벗어나 다른 이들과 평등해졌다. 이제 나는 지난 상실이 떠오를 때마다, 앞으로 올 상실이 두려울 때마다 그릴 것이고, 그녀처럼 내 세상에 나만의 뿌리를 내릴 것이다. 나는 이 시뮬레이션을 그림에 담기를 마치고 편하게 잠들었다.

“그릴 거면 좀 예쁜 그림을 그리던가.”

똑같은 레퍼토리가 이어졌다.

“그러니까 칼이랑 도마를 그렸을 때 왜 잘 그렸다고 야단이었어. 무슨 애가 칼을 그렸냐고 그때 말렸어야지.”

“도마랑 칼? 넌 호호 아줌마를 잘 그렸는데?”

“어쩔 수 없어. 이제 그림을 나만의 눈물 젖은 밥으로 받아들이기로 했거든.”

“아 참, 밥 좀 주문해. 그거 잘 치우고.”

정신없이 짐 정리를 마치고 늦은 밤 자리에 누웠다. 새로 산 침대가 낯설어 자리를 잡으려 뒤척였다. 내 방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벽 한 면에 딱 맞게 들어간 책장이 마음에 꽤 들었다. 칸마다 꽂혀 있는 헌책들이 새 가구 냄새가 나는 책장과 겉도는 느낌이 들었다. 아직 커튼을 달지 못한 새집의 하얀 새시가 찬 기운을 줬다. 내일 따뜻한 느낌의 커튼을 주문해야지. 창문 옆에는 오래도록 새로운 그림 하나 얹지 못한 이젤이 서 있었다. 자췻집을 옮길 때마다 버릴까 생각해 보기도 했지만 언젠가는 내 그림을 다시 그릴 거라는 생각에 10년이 넘도록 데리고 있던 것이다. 이젤 위에는 시뮬레이션에서 봤던 대학 시절 일기장이 보였다. 이제 이 일기장에 갇혀 있던 그림들을 캔버스에 하나하나 옮길 생각이다.

ㄱ자로 놓인 책상 위에는 어찌해야 할지 모를 아빠의 영정사진이 세워져 있었다. 그냥 두면 볼 때마다 엄마가 슬퍼하겠지? 치운 걸 알고 엄마가 엉엉 울어버리면 어쩌나, 고민을 하다가 밖으로 귀를 기울였다. 엄마도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고 있겠지? 울고 있는 건 아닐까?

동생이 떠난 후 오랫동안 내방 문에 귀를 붙인 채 안방에서 울음소리가 나는 건 아닌지 마음 졸이며 기도했었다. 그 시절이 어느덧 지나가고 우리도 모르는 사이 평화가 찾아왔던 것처럼 이 새로운 풍경이 익숙해져서 우리의 슬픔을 덮어주는 일상이 되기를 다시 기도했다. 그리고 프리다처럼 나만의 뿌리를 견고히 내려 눈물 젖은 밥을 덤덤히 받아들이고자 하는 바람을 편지에 적으며 밤을 보냈다.

“47세. 당신의 나이만큼 살아야겠다고 정해두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점차 당신도 보통의 삶보다 삶 자체에 미련과 욕심이 있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 당신보다 더 오래 그리면서 버텨보려 합니다. 외로울 삶에 친구가 되어주어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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