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건물을 짓고 건물은 사람을 품다 붉은 벽돌·기와지붕, 동·서양 절충식 건축물
청주시 내덕동 칠 거리에서 진천 나들이 쪽으로 접어들어, 오른쪽으로 야트막한 경사로를 따라가면 예스럽고 장중한 붉은벽돌 건물을 만나게 된다. 서문 쪽에서 보는 내덕동 주교좌 성당(청주시 청원구 공항로22번길 12)이다. 60~70년대만 해도 이곳 방고개(일명 밤고개)하면 청주의 북쪽 끝단으로 증평방면과 진천 방면으로 갈라지는 삼각주의 언덕 꼭대기에 하늘에 닿을 듯 지금의 천주교 종탑이 우뚝 솟아 있던 곳이다. 천주교 종가宗家로서의 위용은 물론, 청주 시가지 북쪽의 랜드마크 역할을 톡톡히 해온 셈이다.
한국천주교회의는 현재 군종교구를 포함해 총 16개의 교구가 있고 42명의 주교가 있다. ‘청주교구’는 1958년 6월 23일, 서울대교구로부터 분리됐다. 내덕동 성당은 청주교구의 교구장(주교)이 관장하는 중심교회로서 ‘주교좌 성당’ 또는 ‘교구 성당’이라고 한다.
내덕동 성당은 미국의 ‘메리놀외방전교회(이하 메리놀회)’를 떠나서 생각할 수 없다. 메리놀회는 1911년 6월 29일, 아시아 지역의 전교傳敎를 위해 미국 가톨릭교회에서 최초로 설립한 단체다. 1923년 5월 10일, 한국에 첫 진출, 청주교구를 관할한 시기는 한국전쟁이 끝난 1953년 이후다. 따라서 내덕동 성당은 메리놀회에서 처음부터 건축양식은 물론 청주교구의 주교좌 성당을 염두에 두고 건축했다고 볼 수 있다.
■라틴십자형 평면, 사각형 종탑 인상적
메리놀회의 트레이드마크라 할 수 있는 성당건축의 네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평면은 라틴 십자형이어야 한다. 둘째, 벽체는 붉은 벽돌로, 지붕은 목조 지붕틀 위에 기와를 얹는 방식으로 하되 중국풍 형태의 곡선을 살려야 한다. 셋째, 반드시 미국 메리놀회 본부 종탑을 본떠야 하고, 끝으로 자유로운 공간구성과 융통성 있는 공간사용이 그것이다.
메리놀회가 청주교구를 관할한 시기(1953~1969)에 건축한 성당은 18개인데, 11개 성당이 메리놀회 건축양식의 영향을 받아, 성당 정면 모서리에 종탑을 배치하는 방식으로 지어졌으나, 위 네 가지 특징을 제대로 살린 것은 내덕동 성당뿐이라고 한다. 이유는 지역민에게 구휼미를 나눠줘야 했을 만큼 어려웠던 1950~1960년대의 경제 사정을 고려해 볼 때 정교하고 복잡한 메리놀회 공사 방식을 온전히 따르기는 어려웠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설득력이 있다.
특히, 중국풍 지붕처리와 종탑 건축은 메리놀회 본부의 전통양식을 도입하기엔 너무 복잡하고 경비가 많이 드는 공사 방식이라서, 주교좌 성당으로 낙점된 내덕동 성당만이 유일하게 메리놀회 본부의 건축 모티브를 충실히 따랐을 것으로 보고 있다. 종탑의 형태와 더불어 성당 정면 모서리에 종탑을 배치하는 방식도 메리놀회의 특징으로 꼽고 있다.
내덕동성당은 파 야고버(James V. Pardy) 주교가 설계하고, 레이몬드(Raymond Sullivan) 신부의 감독하에 한국인 시공자에 의해 1961년 11월에 완공됐다. 이듬해 1962년 3월 10일, 한국교회에 교계제도가 설정됨에 따라 청주 대목구가 청주교구로 승격되면서 주교좌 성당으로 지정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건평 약 900㎡의 비교적 작은 규모지만, 메리놀회의 영향을 받아 고딕이나 바실리카양식이 아닌 동·서양이 절충된 개방적이고 자유로운 양식으로 지어져 건축으로서 미관이나 외부 공간구성도 빼어나 ‘청주교구의 대표 성당’으로서 손색이 없다는 게 건축가들의 공통된 평이다.
■자연광 어우러지는 스테인드글라스
좀 더 성당 건물을 들여다보자. 내덕동 성당은 위에서 내려다보면, 장방형의 평면에 십자가의 가로지르는 부분인 익랑翼廊을 둔 라틴크로스(Latin Cross) 양식이다. 사각형 종탑이 건물 중앙이 아닌 옆으로 비켜서 있는 것도 메리놀 식의 특징이다. 성당 정면은 3칸으로 된 현관이 뾰족한 아치 형태로 흰 테를 두르고 있다. 현관 좌·우측으로 성당을 출입하는 포오치(porch)도 완전한 대칭 구조를 이루고 있다.
기와지붕의 끝과 벽이 맞닿는 박공牔栱부분이나 처마도 전통한옥 방식이 아닌 중국풍에 가깝다. 종탑의 지붕은 메리놀 본부의 것과 유사하다. 사각으로 쌓아 올려 사방 개구부를 내고, 내부를 장식한 다음 지붕을 얹은 것이다. 종탑을 3단으로 나눠 벽돌 내쌓기로 띠를 두른 것도 눈여겨 볼만하다. 다른 곳에도 목조가구와 벽돌벽이 만나는 꼭대기에 벽돌로 돌림띠를 두르는 등, 의장 면에서도 세심한 고려를 한 게 눈에 띈다.
내부로 들어가면 우선 회백색 색조로 단장된 벽체와 기둥, 그리고 은은한 자연채광의 멋에 취하게 된다. 맛으로 치면 담백한 뭇국 같은 맛이다. 십자가 날개에 해당하는 제대 왼쪽에는 성모상이, 오른쪽 성가대석에는 김대건 성인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찬찬히 살펴보면, 성전 내부의 모든 문양은 두드러지지 않은 십자가 문양으로 꾸며져 있다. 기둥은 벽돌 모양의 인조석으로 십자가 문양을 낸 회백색 사각기둥이 늘어서 있다.
신자 석을 구분하는 대칭 구조로 돼 있다. 바닥은 짙은 갈색 마루이며, 벽체는 흰색으로 칠해져 있고, 천장도 조개껍데기 모양의 목재패널을 이어 붙인 형태이며 흰색 도장으로 마감했다. 제대 배경 무늬나 스테인드글라스도 십자가 모양을 제외하고는 한지 바른 문살처럼 단순하고 소박하다. 하늘색 십자가 문양에 자연광이 어우러져 스테인드글라스로 표현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를 연출하고 있다.
■메리놀외방전교회 한국진출 100주년 맞아
잘 지어진 건축일수록 역사와 생활과 문화를 담는, 그릇으로서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다.
내덕동 주교좌 성당이 그렇다. 70년이 채 지나지 않은 건축물이 지역의 명소가 되고, 청주교구 17만2000명 신자들의 정신적 주춧돌이 돼온 것은 내덕동 주교좌 성당이 품어 왔던 사람들의 힘이다.
1957년 8월 15일 내덕동 성당이 설립되고, 초대 주임으로 부임한 메리놀회 출신 나길모 신부(인천교구 주교 부임:1960. 7.15)가 첫 번째 주인공이다. 1년여에 걸친 교섭 끝에 어렵사리 나주나씨 종중 산을 매입, 59년 11월 20일 공사에 들어가게 됐다. 당시 미국 매사추세츠 로렌스에 살던 나 신부의 부친이 부지 매입비용과 공사비 전액을 부담했기에 가능했다. 본당을 짓는다고 손발 걷어붙이고 달려 나와 노력 봉사를 했던 본당 신자들의 땀도 성당의 벽돌이 되고 기왓장이 됐다.
1961년 11월 성당이 완공되고, 1962년 3월 주교좌 성당의 초대 교구장으로 파 야고버(James V. Pardy)주교가 부임했다. 당시 주교의 비서로 활동했던 전문 건축가 박태봉 씨도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인물이다. 파디 주교를 도와 1954년 옥천성당의 공사감독을 시작으로, 진천성당, 오송 성당, 서운동 성당의 신축설계와 공사감독을 맡은 것으로 알려졌다.
2대 주교로는 정진석 주교가, 뒤를 이어 3대 장봉훈 주교가 청주 교구장을 역임했고, 현재 김종강 시몬 주교가 4대 교구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특히 한국의 두 번째 추기경이자 2대 교구장을 역임한 고 정진석 니콜라오 추기경이 28년 동안 머물렀던 곳이 이곳 주교좌 성당이다.
1972년, 한국인 사제로는 처음으로 고 이중권 신부가 부임하면서, 한국인 사목 시대를 열었고, 이어 김광혁·권오정·김원택·장봉훈(주교)·경덕수 신부 등 청주교구 1세대 사제들을 거쳐 현재 반영억 라파엘 신부가 4800명 본당 공동체를 이끌고 있다. 내덕동 주교좌 성당의 의미를 묻는 말에 반 신부는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를 사목 지표로 내걸고 있다는 말로, 하느님께로 가는 이정표 역할을 하고 있다고 에둘러 중심성당의 의미를 설명해 준다.
‘사람은 건물을 짓고, 건물은 사람을 품는다’라는 말이 있다. 앞으로도 내덕동 주교좌 성당이 품어야 할 사람들이 있는 한, 경건하고 고풍스러운 외양과 함께 내면이 더욱 깊어진 성당건축물로 우리 곁에 오래도록 남아 있을 것이다.
올해가 메리놀외방전교회가 1923년 한국에 진출 한지,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10일 이곳 내덕동 주교좌 성당에서 ‘메리놀외방전교회 한국진출 100주년 감사미사’가 열린다. 참으로 은혜롭고 감사한 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