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숭고한 민주항쟁을 정략적으로 이용하는 파렴치한들 없어야”

[동양일보]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광주시와 전남지역의 시민들이 벌인 ‘5.18 민주화운동’의 명칭은 시시각각 사태와 정권의 흐름에 따라 달라졌다. 사건 당시 언론은 ‘광주폭동’-‘광주소요사태’-‘광주사태’ 등으로 보도했었다. 언론은 발발 당시 군부의 발표를 인용해 ‘극소수 불순분자와 폭도들의 난동’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그러다 광주사태의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이 이루어지면서 ‘광주사태’(전두환 정부)-‘광주민주화운동’(노태우 정부)-‘5.18광주민주화운동’(김영삼 정부)-‘5.18민주화운동’(김대중 정부)으로 규정됐다.



한국 근대사의 ‘얼룩’이라 할 ‘5.18 민주화운동기념일’을 앞두고 5.18사태로 인해 ‘해직기자’의 아픔을 삭이며 인생의 황금기인 40대~50대 10년 세월을 녹슬게 했던 주헌일(朱憲一·83·청주시 상당구 용암동 효성아파트) 전 언론인을 만났다. 5.18 당시 MBC 본사 사회부 차장이었던 주 씨는 5.18 43주년을 앞두고 당시의 정황을 되새겨 보려한다는 인터뷰 요청에 ‘잊고 싶고, 잊어야할 사건 중 하나인데 이를 되새겨 보는 일은 아문 상처를 다시 헤집는 일’이라면서 손을 내젓는다. 얼마 후 다시 연락해 충청권 독자들은 대부분 당시 상황을 제대로 알지 못하니 기억나는 대로만이라도 짚어 달라했다. 4일 오전 10시 30분, 동양일보 회장실에 나타난 그는 평소 88킬로그램이던 체중을 5킬로그램이나 줄여서인지 훨씬 건강해 보였다.

그는 1941년 서울서 태어나 6.25때 피난을 온 곳이 충북 보은이었고, 청주로 이사해 청주고와 청주대 법학과를 나와 1969년 MBC 기자로 입사했다. 1980년 5.18 광주사태가 일어날 때 보도국 사회부 차장으로 사건 사고 데스크를 맡고 있었다.

 

●선배님. 5.18이 43주년을 맞습니다. 그때 태어난 아이가 불혹의 나이를 지났습니다.

“헤아려 보니 그 때 내 나이가 꼭 40이었습니다. 막 차장승진을 하여 사건 데스크를 보고 있을 때였으니까…. 세월이 빠른 것인지, 그 때의 아픔이 워낙 커서였는지 그렇게 많은 세월이 지난 것같이 느껴지지 않았어요.”



●그 때의 기억을 좀 되살려 주셨으면 합니다.

“나라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지요. 광주사태 발발 전 해인 1979년 10월 4일 김영삼 신민당 총재가 국회에서 의원직을 제명당하자, 10월 15일부터 부산과 마산을 중심으로 한 소요(부‧마항쟁)가 일어나 사회전반에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았어요. 급기야 10월 26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박정희 대통령을 궁정동에서 권총으로 살해하는 희대의 사건이 터집니다. 보안사령관 전두환 소장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세력이 12.12 사건으로 하극상을 하여 군부를 장악, 최규화 과도정부를 무력화하면서 권력기반을 구축하기에 이르지요. 5월 13,14일 서울‧부산‧대구‧광주 등 37개 대학에서 계엄철폐를 요구하는 시위가 거세게 확산됐어요. 이어 17일,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됐고 김대중‧김종필을 비롯해 권력형 부정축재자, 소요조종 혐의자, 학생시위 주동자가 체포 연행되지요.”

 

 

●왜 갑자기 광주가 사건의 중심이 됐지요?

“광주의 전남대와 조선대생들의 시위가 거세졌어요. 계엄군이 대학마다 진주해 해산시키자

전남대 정문 앞에서 해산됐던 대학생들이 광주역에 재집결하지요. 18일 자정을 기해 광주 일원에 공수부대가 투입됐어요. 서울과 부산과 마산의 거센 저항을 받아오던 군부가 광주를 타깃으로 전국에 쇼크 요법을 쓰려 했던 것 같습니다. 이날 오후 1시부터 무차별 진압작전을 펼쳐 금남로 등 시내 중심가에서 학생으로 보이는 청년이나 여자들을 마구 구타하고 짓밟으며 총검으로 찌르는 등 그 무자비한 진압에 분개한 시민들이 합세하기에 이릅니다. 19일 밤과 20일 택시와 버스 운전기사들이 광주역과 무등경기장에 모여 대형버스와 트럭을 앞세워 계엄군을 몰아냅니다. 이 때 시위대는 광주MBC와 세무서 노동청 등에 불을 놓았지요.”



●현지 방송국이 불에 탔으면 어떻게 사태 정황을 알 수 있었는지요.

“이미 현지에서는 계엄군에 의해 통신시설이 장악돼 기사송고가 되지 않아 가까스로 금남로의 한 전파사의 도움과 개인적인 관계의 지인 도움을 받아 대략적인 상황만을 체크할 뿐이었지요. 광주로 들어가는 모든 교통이 통제되고 전화를 비롯해 모든 통신이 단절된 상태였어요. 일부 외신 기자들만 제한된 활동을 할 수 있었지요. 20일 밤 11시, 시민군에 몰린 공수부대는 시위 군중에게 드디어 집단발포를 합니다. 이 20일 밤의 충돌로 시민들은 무장을 하기 위해 화순, 해남, 나주 등 시외지역에서 무기를 탈취해 시민들에게 지급하여 무장시민들과 계엄군의 시가전이 벌어지는 예상치 못한 지경까지 이르게 됩니다.”



●시민 봉기가 무력항쟁으로 전환되는 시점이 이 때로 보아야하는군요.

“지금 기억으로는 22일부터 27일까지 광주를 장악한 시민군이 민주수호 범시민궐기대회를 열었고, 민주시민투쟁위원회를 구성했는데 27일 새벽 탱크 등으로 무장한 2만5000명의 계엄군이 무력진압으로 시민항쟁은 끝이 났어요.”

당시 사망자는 193명으로 이중 군인 23명, 경찰 4명, 민간인 166명이며 부상자는 852명으로 확인됐다.(1995년 7월 18일 서울지방검찰청‧국방부 검찰부 발표)



●해직은 그 해 당하셨나요?

“신 군부가 들어서면서 ‘사회정화’를 내세워 세칭 ‘반골 기자’들을 소탕(?)하기 시작했어요. 당시 MBC에 300명의 기자가 있었는데 100명 정도가 무더기로 해직을 당했어요. 갑자기 직장을 잃은 것도 어처구니가 없었는데, 해직기자 마다 거동을 감시 당해야하는 것은 정말이지 견디기 어려웠어요. 여행도 마음대로 다닐 수가 없었고, 어떤 모임에도 마음대로 나갈 수가 없었지요. 툭하면 보안사가, 툭하면 파출소에서 무엇을 하느냐, 어디를 왜 갔느냐고 확인 전화가 와요. 그 때의 엄중하고 살벌한 분위기를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조 회장도 현역 기자였을 때지요?”



●9년차 기자였습니다. 언론검열을 받으러 편집된 조판대장을 들고 계엄분소 검열관에게 다니던 참담한 기억을 갖고 있지요. 해직 이후 하루하루를 어떻게 소일하셨어요?

“아예 이민을 간 사람들도 많고, 나 같은 경우는 매일 몇이 만나서 소주로 분통을 달랬어요. 함부로 아무하고나 술을 마실 수도 없었어요. 누가 어떤 말을 어떻게 전할지 모르니 속을 아는 몇 기자들끼리만 만났지요.”



●생활은 어떻게 하셨는지요.

“나는 일선 기자 때 사귄 상공부에 있던 친구가 미국으로 이민을 가 있었는데도 열심히 뒤를 보살펴줬어요. 그리고 누님과 매형이 돌봐주는 덕에 돌려가면서 내는 소주 값도 제대로 내고, 이혼하고 내가 맡은 어린 아이들(아들 형제)밥은 굶기지 않았어요. 그런데 아무래도 돈이 많이 드는 서울에서 살기가 힘들었어요. 그래서 살고 있던 작은 아파트를 정리해서 충주로 이사를 했지요. 충주시 금가면 하담리에 야산 5000평을 사고 그 곳에 20평짜리 외딴집을 짓고 살았어요. 닭 몇 마리, 염소 몇 마리를 키우는 게 낙이었어요.”

 

 

●해직 기자의 분노는 가라앉던가요?

“웬걸요. 시골생활에 익숙해질 때쯤 되니까 주위에서 슬슬 들려오는 말이 나를 ‘국사범’이래요. 겉으로는 친한 척 하는데 속으로는 경계하는 것이 확연해요. 어느 술자리에선가는 노골적으로 ‘국사범’이란 게 뭐유?’라 묻기에 ‘국가의 사범師範’이니 ‘나라 선생님‘ 아니냐며 웃어 넘겼지요. 그러나 속이 얼마나 상하던지… 그런데 지금 와서 돌아보니 자식들에겐 쥐불놀이며 메뚜기, 개구리 잡기며 힘껏 뛰놀고 산속을 헤집고… 자연 속에서 행복한 유년시절을 보내게 해 준 훌륭한 아버지였습니다.(웃음)”



●그런데 왜 고향인 청주가 아니라 충주에 가셨는지요.

“서울서 청주로 이사 가려고 하는데 보안사에서 그 곳엔 고등학교, 대학 친구들이나 지인들이 많아서 안 된다는 겁니다. 대꾸해 봤자 여서 아무 연고도 없는 충주로 택한 것이지요. 충주 술만 많이 축 냈지요”



●아드님들은?

“1980년 5.18 때 태어난 큰 아들은 어느새 43세인데 한국도로공사에, 둘째는 미국 미시간대 금속학 박사로 포드자동차에 있으면서 대학 강의를 나가요. 저희들 밥벌이는 잘 하고 있다고들 해요. 매년 미국에 3개월 쯤 있다 오는데 아들놈이 툭하면 충주서 물고기 잡고 염소 키우던 이야기를 하면서 추억에 잠기는 것을 보지요. 어린 시절의 자연 속 추억은 잊혀 지지 않는 마력이 있는 듯해요. 공기 좋은 시골에서 보낸 세월 덕분에 내 건강도 유지 된 것 같고요.”



●복직은 언제 되셨지요?

“1989년에 됐어요. 그리고 10년 근무를 더 했지요. 1998년에 보도국 사회부장으로 명예퇴직을 했습니다. 충주에 와 있는 동안에 고향 신문인 동양일보에서 주필 직함을 갖고 후배 기자들과 2년이 넘도록 생활했지요.”



●지금은 청주서 사시지요? 어떻게 지내시는지요.

“청주에 온지 한 3년 됐어요. 와서 친구들이랑 어울리니 사는 맛이 나요. 특히 청주고 32회 동기생들이 아직은 매달 30명쯤이 모이지요. 박만순 전 도의원, 이범윤 산악인, 배창근‧ 박인규 전 교장, 김영진 사업가… 등 다 한 짐씩 되는 친구들이지요. 나는 헬스장을 열심히 나가요. 좋아하던 술도 완전히 끊었어요. 술을 먹지 않아도 견딜 정도의 세상이 되는 듯해요.”

 

 

●5.18민주화운동 기념일을 맞는 소회는?

“순수하게 민주화를 위한 항쟁인데, 이를 정략적으로 이용하는 자들 때문에 얼룩이 지는 것이 애석합니다. 젊은이들이나 시민들이 목숨을 걸고 피로 물들여 얻은 민주운동을 빌미로 개인의 영달이나 명예를 꾀한다면 하늘이 용서치 않을 것입니다. 숭고함을 먹칠하는 자들이 누구인지 역사는 알고 있습니다. 해마다 국립 5.18묘지나 5.18민주공원, 5.18자유공원을 찾는 정치인들은 가슴에 손을 얹고 깊이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언제까지 이를 정략적으로 이용하는 파렴치한들이 있어서야 되겠습니까? 광주의 5.18 유공자 명단 공개를 이렇게 많은 세월이 흘렀는데도 하지 못하는 것을 보세요. 아직도 5.18은 ‘미완의 장’입니다.”



●현재의 정치 기상도를 어떻게 보시는지요.

“결국은 국가지도자의 순수성을 보아야하는 것 아닌가요? 현 윤석열 대통령의 정치경험 유,무 보다 국가와 민족을 위한 진정성을 보아야겠지요. 그런 면에서는 믿음이 갑니다. 그런데 제일 큰 문제는 대통령을 받들고 있는 공직자들의 기본적인 자세일 것입니다. 해직 기자로 10년, 이제 80을 넘긴 나이에 느낀 것은 국민의 소중한 돈으로 급여를 받는 공무원들은 책임을 지는 일을 하지 않아도 잘 견뎌요. 우리나라 직업인 중에 제일 게으르고 스트레스 받지 않는 직업이 공무원들일 것입니다. 이렇게 좋은 철밥통 직업이 어느 나라에 있습니까. 각성을 해야 할 때지요. 세계 속의 한국을 보면 미래가 결코 순탄치 못할 것 같아 잠 못 이루는 공직자들이 많아야 하는데 제일 편안한 사람들 같아 유감입니다. 자유도 신장 속도에 비해 규제가 따라가지 못하니 방종으로 흐르지요. 무엇보다 ‘떼법’이란 말 근절돼야 하고요. 5.18민주화운동기념일을 맞으며 그 피해자의 한사람으로, 인생의황금기를 저당 잡혔던 한 사람으로 충고하고 싶습니다.”



●자유 민주 평화 행복… 이 절대 가치의 말들이 존립하는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희생이 밑받침 되었는지를 이런 기회에 되새겨 보아야 할 것입니다. 떠올리고 싶지 않은 아픈 과거를 회상하시느라 애쓰셨습니다. 고맙습니다.


 

조철호 동양일보 회장·시인
조철호 동양일보 회장·시인

 

■ 조철호 동양일보 회장·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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