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4시 일어나 독서하고 악상 정리… 8순 기념 작곡집 준비 중”

[동양일보] 17세에 등단하고 1933년 종합문예지 ‘조선문학’을 발간해 오던 정호승(본명 정영택鄭英澤1915~?)은 1930년대 한국 현대시단에 영향력을 가졌던 충주 출신 시인. 그를 ‘모밀꽃 시인’으로 불리게 한 작품 ‘모밀꽃1’과 ‘모밀꽃2’는 당시 서정시의 전형인데다, 후대에 다시 보아도 그 시가 담고 있는 애절한 사연 또한 예사롭지 않다. 해방이 되고,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남·북은 민주와 사회주의의 이념 대립이 3.8선보다 더 뚜렷하게 날을 세웠다. 정호승은 해방공간에서 좌파 월북시인으로 분류됐고, 한국전쟁 전·후 월북했다는 소문만 떠돌 뿐 그의 행방을 아는 이는 아무도 없다. 월북 이후 그의 행적에 관해 아는 이는 더더구나 없다. 그럼에도 그를 이야기하려면 아무 거리낌도 없이 ‘월북시인’으로 단정 짓는다. 이 나라 근·현대사의 ‘얼룩’은 문단에서도 아직 현재 진행형이다. 이념적인 편 가르기는 한 번 찍히면(?) 수정되기란 ‘하늘의 별 따기’ 만큼이나 어렵다. 근거도 확증도 확인도 없이, 인정되고 인용되고 이용된다.



그의 아들 정태준(鄭泰駿·79·충주시 중앙탑면 창동2길 6)은 그런 유명 시인 아버지가 남긴 ‘주홍글씨’(연좌제)때문에 가슴에 멍이 든 채 비교적 바람이 조용한 교육계에서 몸을 담다 충주여고 교장으로 정년퇴임을 했다. 아버지를 따라 대물림 시인이 됐고, 작곡가가 되어 아버지 시를 비롯해 마음에 드는 시를 골라 곡을 붙였다. 정년 이후 더욱 작곡에 심취하여 이미 작곡가로의 탄탄한 기반을 확보한 그는 지난해부터 ‘시‧ 음악 만남회’를 만들어 본격적인 창작활동에 들어서서 눈길을 끈다.

 

그가 작곡가의 길에 들어선 것은 이미 6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가 군복무를 마치고 수석으로 입학한 청주교육대학은 충북음악의 산실이라 할 충북 음악의 대부인 이상덕 교수와 당시 한국 중견 작곡가였던 오동일 작곡가와 테너 채완병 성악가가 교수로 있었다. 작곡가가 되겠노라는 그의 결의와 열정과 음악적 감성을 엿 본 오 교수는 정규교과 시간이 끝난 방과 후 시간이면 거의 개인교습처럼 작곡의 토대를 쌓게 했다. 작곡가가 지녀야하는 청음능력‧관찰력‧탐구력‧직관력‧통찰력을 습관적으로 갖춰야 하고, 끊임없이 미학적으로 완결성을 추구해야 한다는 작곡가의 기본적인 자질에 관한 교육을 받게 된다. 좋은 작곡가가 되기 위해서는 철학이나 역사학, 문학, 신학, 심리학 등 모든 분야의 소양을 섭렵해야 하는데 이런 것의 이해에 따라 작곡가의 질적인 차이가 드러나게 된다는 것도 깨닫게 된다. 열심히 공부했다. 오로지 좋은 곡을 만들기 위해 고뇌하고 몰입하며 해를 넘겼다. 어느 날 오 교수는 ‘작곡발표회’를 해 보라고 권했다. 청주교육대 역사 이래 재학생이 단독으로 작곡발표회를 갖는 것은 처음이었다. 충북에서 대학재학생이 작곡발표회를 갖는 것도 처음이었다. 1969년 10월, 청주수동천주교회 강당에서 열린 첫 ‘정태준 작곡발표회’는 대 성공이었다. 교육대학 교수들 전원과 학생들과 청주의 음악 애호가들이 만석을 이뤘고,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줬다.

교육대 재학 중에 중등 음악교사 검정시험에 합격했다. 졸업 후 그는 음악교사로 청주중에 첫 발령을 받았고, 여러 학교를 전전하면서 음악에 대해 성심을 다해 지도했다. 작곡을 위한 노력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제까지 그는 세 차례의 작곡발표회를 가졌다. 고등학교 음악교과서에 그의 작품 ‘추심秋心’ 이 수록되고, KBS FM 신작가곡에 ‘국화 옆에서’가 선정 발표됐다. 그는 가곡집 <추심>을 출간하자 많은 이들이 그의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고, 가곡이 지녀야하는 서정성과 호소력과 아름다운 여운에 박수를 보냈다. 드디어 그는 한국 가곡의 작곡가로의 인증을 받기에 이른다. 그는 아버지를 따라 시인으로도 등단했다. 시 전문지<심상>과 <한국시>를 통해 시단에 나온 후 시집<몽산포 가는 길>1996년, <난지도 가는 길>1998년,<어머니 그리고 아내>1999년, <게쎄마니의 잠>2000년,<머물다 떠난 순간들>2006년,<함부로 쏜 화살>2006년 등 6권을 상재했다.

‘정태준 교장’에서 ‘시인‧ 작곡가 정태준’이 됐다.

‘인생 4막’이라는 정년 이후 노후에 들면서 그는 시도 열심히 쓰고, 악상도 열심히 정리하고, 농사도 열심히 짓는다. 그가 살고 있는 충주시 중앙탑면 창동의 2층 양옥집은 남한강 탄금대가 한눈에 보이는 곳. 청주교대 때 ‘눈이 컸던 후배’로 초등학교 교사였던 아내(박수영·74)도 정년퇴임을 하고 함께 여생을 보낼 이 둥지를 정성스럽게 만들었다. 400평 대지에 건평 40평(1층 30평, 2층 10평)짜리 별장 같은 집이다. 눈 안에 잠겨있는 그의 산과 밭이 2만여 평이나 된다.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이곳에 부모의 산소를 모셨고, 한양 가던 옛길 옆 산자락을 깎아 아버지 정호승 시비를 세웠다.<아래 사진> 천년 씻긴 강돌을 옮겨와 2013년에 세운 이 비에는 ‘모밀꽃 2’를 새겼다. 주변엔 나이 많은 소나무들이 지키듯 서 있다. 농사가 버거워 호두나무 300그루를 심었다. 심은 지 8년이 되자 지난해부터 호두를 수확한다고 대수롭지 않게 말하지만, 산 중턱 정자 옆에 서 있는 소형 굴삭기와 경운기의 낡은 정도가 그간의 땀 밴 세월을 대변해주고 있었다.

5월 10일, 진천 포석조명희문학관에서 30회 ‘포석조명희문학제’가 열렸다. 이 자리에 정태준 작곡가가 보였다. 추도식 식순에 ‘헌가獻歌’가 있었고, 포석의 시 ‘달 좇아’에 그가 곡을 붙여 이날 첫 발표를 하게 되자 충주에서 달려온 것이었다. 테너 박경환(한국교통대 교수)이 소개되고 그의 우람한 몸집이 앞에 나서서 열창했다.

“이 밤의 저 달빛이 야릇이도/왜 그리 사람의 마음을 흔드는지/가없이 가없이 서리고 아파라//아아, 나는 달의 울음을 좇아 한없이 가련다/가다가 지새는 달이 재를 넘기면/ 나도 그 재 위에 쓰러지리라.”

망명지 소련 땅에서 일제 압제에 신음하는 조국과 고향을 그리며 한을 토해내던 한 시인의 애절함을 대변하듯 박경환의 비장감 넘치는 노래는 식장을 한동안 고요하게 했다. 작곡가 정태준은 비로소 안도하는 표정이었다. 곡을 발표 할 때마다 겪는 작곡자의 긴장이지만, 이날은 더욱 그러했노라 고백한다.

추도식이 끝난 후 곧바로 인터뷰를 요청하자 흔쾌히 응했다. 포석문학관 2층 볕이 밝은 작은 강의실에서 1시간이 넘도록 대담이 이어졌다.



●오늘 발표된 곡 ‘달 좇아’는 만족 하십니까?

“시를 보자마자 곡을 써야겠다고 마음먹었는데, 어느 날 문득 악상이 떠올랐지요. 포석 선생의 당시 정황 등 여러 생각이 함부로 다룰 작품이 아니어서 신경을 많이 썼지요. 오늘 들어보니 그런대로 마음이 놓입니다. 테너 박경환이 역시 역량 있는 성악가임을 다시 느꼈습니다. 과문한 탓에 그동안 모르고 있던 포석 선생의 시를 더 열심히 공부해 볼 생각입니다. 곡으로 만들고 싶은 시들이 여럿 있어서 얼마나 고마운 지요”



●요즘 어떻게 지내시는지요.

“정년퇴직 후에 더 바빠요. 현직에 있을 때는 한 가지 업무에 충실하면 됐는데, 퇴직하고 나니 해야 될 일들이 너무나 많고 모두 직접 해야 할 일들이라서 분주하죠. ‘백수가 과로사 한다’는 말 실감이 납니다. 새벽 4시에 일어나면 1시간을 독서 합니다. 읽어야할 책들이 줄을 서 있어요. 그리고 화성학 등 작곡에 필요한 전문적인 서적들을 섭렵하는 데 이 또한 간단치가 않아요. 역시 공부란 평생을 두고두고 해야 될 숙제인 것 같습니다.”



●작곡한 작품을 최종적으로 아내의 결재(?)를 받고서야 발표하신다면서요.

“(웃음)그렇지요. 수 없이 고치고 다듬었어도 객관적으로 어떻게 느껴지는지를 아내의 촉수에 맡겨 봅니다. 가장 정직한 평을 들을 수 있지요. 때론 깜짝 놀랄 지적도 받아 속으로 놀라는 일이 적지 않아요.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할 겁니다. 평론가 한 분을 모시고 사는 셈이지요(웃음)”



●근래 작곡한 작품들도 많은지요.

“그동안 작곡한 작품이 거의 300편에 이릅니다. 근래 들어 신경림의 ‘농무’ 김억의 ‘산수갑산’, 조철호의 ‘청보리밭’, 김소월의 ‘금잔디’…등 시를 보자마자 악상이 떠오르는 대로 초고를 만들고, 시간을 두어 다듬지요. 현대시들은 몸에 녹아들지를 않고 머리로 이해해야 돼 음악이 되기가 좀 어려울 때가 많아요.”



●어떤 시가 작곡하는데 좋은지요.

“노랫말은 단순할수록 음역이 깊어지고 넓어지지요. 전달되는 힘도 강해져서 여운이 길지요. 그렇다고 산문처럼 늘어지면 악상을 떠올릴 수 없지요. 역시 좋은 시가 좋은 노래로 남습니다.”



●충주는 우리나라 3대 악성인 우륵이 살던 곳이지요?

“고구려의 왕산악과 조선의 박연과 더불어 악성 우륵이 직접 만든 가야금을 타며 음악을 즐겼던 곳이라고 <삼국사기>는 전하지요. 생몰연대는 알 수 없지만, 그 기록엔 우륵의 탄생지는 지금의 제천시 청풍면으로, 그가 만든 가야금은 중국의 쟁箏거문고 비슷한 13현의 악기을 본떠서 만들었으나 소리가 더 맑고 멀리 퍼져서 우리 악기로 자리매김 했다는 것이지요. 한국의 음악사엔 이들 우륵이나 박연부터 근래의 서태지, 정연우 등이 빼어난 작곡가들로 기록되지요.”



●오래전에 있던 ‘호승시문학회’ 아직 있는지요.

“아버지의 유업을 기리고자 2002년에 만든 ‘호승시문학상’도 6회 째 시상하는 등 불을 붙여 보았으나 역시 역부족임을 알았지요. 앞으로는 지난 해 10월 창립기념 행사를 가진 ‘시‧음악만남회’나 열심히 운영하려 합니다.



●멤버들이 어떻게 되지요?

“제가 회장을 맡고, 이석우 시인과 정성용 작곡가가 부회장을 맡고 있지요. 시인으로는 김순영 오만환 채희인 등 지역에 살고 있는 시인들과 성악가 등 30여 명이 됩니다, 사무국장은 박경환 성악가가 맡고 있지요. 올 해 두 번째 행사로 9월 14일 충주음악창작소에서 열 준비를하고 있어요. 김소월·조명희·허의행·이계상·김억·서범석·정연덕·이석우·조철호·신경림의 시와 문석현(국원초) 장은재(목행초) 채지우(국원초) 김시은(달천초매현분교) 어린이들의 동시에 정태준이 곡을 붙여 발표합니다. 소프라노 박소정‧한윤옥, 베이스 박광우, 테너 박경환 등 좋은 성악가들과 피아니스트 정해진 등이 총 출동하지요.”

 

 

●기대해 보겠습니다. 가족들은?

“2남 1녀를 뒀어요. 맏이는 충주에, 딸은 원주에, 작은 아들은 안산에 살고 있어요. 저희들 나름대로 열심히 살고 있어요. 넓은 땅에 나이든 부부만 살고 있으나 적적하지는 않아요. 음악이 있으니까요. 작곡가의 길을 가는 것에도 보람이 있지요.”



●남기고 싶은 말이 있다면?

“교직에 있던 37년간도 보람이 컸어요. 학생들에게 인생의 표상은 못 돼도 정열적인 교사였다는 말은 듣고 싶었어요. 충주여고 교감 때 국궁을 하면서 많은 명상도 했지요. 활을 쏘면서 <함부로 쏜 화살>이라는 궁시집도 냈어요. 퇴임 후 명상에 잠기는 시간이 더 늘어나고 삶의 가치가 어떤 것인가를 고민하게 되지요. 좋은 곡을 만들고 싶습니다. 그리고 시대별, 시인별 특성대로 나눠서 작곡집을 만들고자 합니다. 곧 8순에 접어들게 되는데 8순 기념으로 그동안의 작품들을 모아보려 합니다. 먼 훗날이라도 누군가에 의해 ‘충주에 사는 한 늙은 작곡가의 작품이 주는 감동을 잊을 수 없더라’는 말을 듣고 싶습니다. 열심히 노력하면 되지 않을까요?”



●‘충주에 사는 정태준 작곡가의 명곡들이 줄이어 발표되어 음악계를 놀라게 하고 있다’는 기사가 곧 나오리라 믿습니다. 오랜 시간 응대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조철호 동양일보 회장·시인
조철호 동양일보 회장·시인

 

■ 조철호 동양일보 회장·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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