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과 더불어 살아온 80여 성상… 사모하던 ‘예쁜 여학생’ 아내와 회혼回婚바라보는 행복한 노후

[동양일보]오랜만에 전화를 했다. 예나 다름없는 맑고 굵고 울림이 있는, 또렷하고 윤기가 있는 그 음성 그대로였다. 80대 중반의 노인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다. 테너 채완병(蔡完秉· 84·청주시 청원구 내덕2동 신화아파트)전 청주교육대 교수는 건재했다. 58년 전, 이 지역에서 최초로 독창회를 열어 충북 성악가 1세대의 관록(?)을 훈장처럼 달고 있는 이 노신사를 만났다. 세계 3대 음악경연대회로 꼽히는 벨기에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성악부문에서 한국인 성악가 김태한(22·바리톤)이 우승했다는 따끈따끈한 뉴스가 채 식지 않은 6일 오전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만나자마자 “김태한의 소식을 들었느냐”고 묻는다. 100% 순수 국내파가 세계를 감동시켰다면서 매우 감격 어린 어조였다. ‘80대 소년’같은 모습이다.



서울서 태어나고 자란 그는 초등학교 때부터 ‘노래 잘하는 아이’로 뽑혀 학예회 때면 우쭐댈 수 있었다. 청운초 6학년 때 6.25를 맞았고, 피난처가 평강 채씨 집성촌인 충북 진천군 덕산면 덕산읍 용몽리여서 그곳 옥동초로 편입했다. 한 피난민 아저씨의 제안으로 학예회 수준의 악극을 꾸며 공연을 하여 어른들의 박수를 받았다. 그의 음악인생의 단초는 이때부터였을 것이라고 회상한다. 청주중을 거쳐 청주사범학교에 진학했다.

그는 사범학교 시절 한 예쁜 여학생을 사모하게 됐다. 옆반 반장이었는데, 숫기가 없어 육촌형에게 연애편지를 써 달라하여 밴드부 친구를 통해 전했다. 다음날 전달된 답장엔 ‘Impossible’이라는 영어단어 하나만 달랑 적혀 있었다. 그러나 실망하지 않았다. 그 후 여러 차례 편지를 보내 ’졸업 한 뒤에 보자‘라는 답을 얻어냈다. 자존심이 상한 그는 서울대 진학을 결심하고 밤잠을 줄여가며 음악 공부에 몰입한다.

이때 평생의 은인인 이상덕(1924~2004)교수를 만난다. 이 교수는 음악관 피아노 방에 머물며 노래 연습을 하도록 배려했고, 서울대 이상춘 교수에게 사사 받도록 연결시켜 주는 등 꿈에 그리던 서울음대 진학을 위해 세심한 도움을 주었다. 서울음대 성악과 졸업 후 청주에서 음악교사-교수로 음악 인생을 살아가는 길목마다 디딤돌이 돼 오늘의 ‘성악가 채완병 교수’가 있도록 그늘을 만들어 준 멘토였다.

그가 첫 음악교사로 발령 받은 것은 25세가 되는 1964년 3월, 발령지는 청주여자상업고였다. 그리고 4월에 결혼을 한다. 신부는 ‘옆반 반장이던 예쁜 여학생’ 김옥순(당시 26세) 청주중앙초 교사였다. 그는 거리낌 없이 음악에 정진했고 이듬해 1965년 첫 독창회를 마련했다. 충북에서 열리는 첫 독창회였고, 그에게는 음악인생의 모멘텀이 되는 행사였다. 음악에 대한 열정과 패기를 밑천으로 한 모험적인 행사 주최여서 혼신을 다했다.

옛 청주우체국 뒤 청주시청 건물로 창고처럼 쓰이던 시의회 강당을 빌려 대청소를 하고, 청주여상 강당에 있던 업라이트 피아노를 리어카에 싣고 시내를 관통해 옮겨 왔다. 포스터와 프로그램은 아내가 직접 그려서 인쇄소에서 복사해 부부가 들고 다니면서 현 성안길(옛 본정통)의 상점이나 양장점 쇼윈도에 붙였다. 청중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발표할 ‘시인의 사랑’ 독일어 가사는 독일어에 능통한 세광고 교목 이쾌재 목사의 도움으로 우리말 해설지도 만들었다. 독창회는 대성공이었다. 500명 좌석이 꽉 차고 반응은 뜨거웠다. 충북음악사에 한 획을 긋는 행사여서 그때 있었던 모든 일들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는 모두 다섯 차례의 독창회를 열었다. 그에 의해 충북은 ‘독창회’라는 음악행사를 비로소 알게 됐다. 그러나 정작 그가 충북음악계와 한국음악계에 기여한 공훈은 음악교사들이 가장 기본적으로 알아야하는 ‘졸탄 코다이 이론’에 대한 일깨움일 것이다.

 

성악가로, 교사배출을 담당하는 교육대학 음악교수로 강단을 지키면서 그는 고민해 왔다. 연주가로서 살 것인가, 음악 지도자로 일관할 것인가를 선택하기란 그리 쉽지 않았다. 오랜 고민 끝에 그는 결단을 내린다. 교육자로 충실하게 살 것을 선택했다. 그리고 70년대 이후 우리 음악교육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분석해 보았다. 많은 지방대학 음악교육과에서 교육학은 가르치면서 정작 중요한 음악 교육이론은 제대로 가르치지 않는 것에 불만이 있었다. 음악이 인성을 감화시키고 예술성이 인성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는 것이 간과되는 것 같아서 안타까웠다. 연구논문 주제를 찾기 위해 일본 서적을 뒤적이다가 헝가리의 작곡가 졸탄 코다이kodaly, zoltan의 음악교육 이론을 발견했다. 헝가리는 유럽음악의 중심에 있으면서도 한국의 문화와 매우 유사하다. 오음계는 우리나라 민속음악의 오음계하고 흡사했다.

코다이는 “음악교육은 노래 부르기로부터 시작돼야 한다” 고 주장했다. 그는 코다이 음악교육론을 게재한 <음악교육>지의 일본 저자에게 편지를 보냈다. 한 달 만에 코다이 교육론에 관한 저서가 한 보따리 왔다. 이 자료로 코다이 교육이론에 관한 논문을 썼다. <코다이 이론과 기초교육-교사를 위한 코다이 교수법의 실제>를 저술, 출간했다. 국내 최초의 코다이 연구서였다. 교육자로 충실하게 살겠다고 결심한 그의 이 연구는 청주교육대와 교육대학원의 음악교육 전공자를 통해 초등음악 교육의 방향을 제시하는 수범이 됐다.

그는 28세이던 1967년 청주교육대 전임강사로 임용된다. 청주사범학교 시절 모셨던 이상덕 교수 등 은사들과 동료교수 입장이 된 모교에서의 근무는 여간 조심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그러다 1976년 청주대학에 음악교육과가 생겨 조교수로 가서 8년간, 수원 협성신학대학에 잠시 머물다 1990년 청주교육대학이 4년제로 승격하면서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2004년 8월 정년퇴임 때까지 모교의 강단을 지켰다. 이제 80을 훌쩍 넘긴 오늘에 이르러 음악과 더불어 살아온 짧지 않은 삶은, 기쁨과 설렘과 감동이 있는 행복한 인생이었노라 단정한다. 회혼回婚을 바라보며 자칫 건강이 걱정되지만, 아직도 예쁘게만 보이는 아내와 단둘이서 사는 일은 더없이 평화롭고 애틋하다. 젊은 시절을 열심히 살아온 이의 노년이 이러하다는 듯 정중동靜中動의 일상이다.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새벽 4시쯤 일어나 아내와 산책하는 일부터 하루가 시작돼요. 먼동이 틀 때쯤 집을 나서면 인근에 있는 내덕동 새적굴공원을 돌고 옵니다. 1시간 30분 정도 걸으면 6000보 쯤 걷기가 되지요. 이래저래 하루 1만 보 걷는 운동은 되는 셈입니다. 아침식사는 6시에서 7시 사이 집에서 하고, 점심은 되도록 외식을 하는데, 집 주변에 걸어서 다닐만한 거리에 오래된 맛집들이 있어서 돌아가며 들립니다. 저녁식사는 하지 않으려 하고요. 그저 간식 수준으로 요기정도 하는데 비만도 예방하고 속도 편해서 앞으로도 그렇게 하려고 합니다. 겨울철엔 오전 11시부터 걷는 운동을 시작해요. 술과 담배를 하지 않아서인지, 운동을 꾸준히 해서인지는 몰라도 나이에 비해 아직 건강한 편이지요.”



●음악가족이시지요.

“음악교육자로 사는 일은 봉사자의 삶이란 생각으로 살아왔어요. 그래서 아들 셋 중 둘이 음악의 길에 들어서는 것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어요. 큰 애(채희철·58·첼리스트)가 올 3월 1일자로 숙명여대 음악대학장이 됐어요. 큰며느리(어수희·56·피아니스트)와 셋째(채희민·54· 콘트라베이스), 며느리(손희정·54·소프라노)도 서울에서 교향악단과 대학 강사 등으로 열심히 활동하지요. 둘째(채희구·56·음성혁신도시에서 알파문구점 경영)와 며느리(신기연·55·천 아파트관리소장)가 가까이 있어 자주 드나들지요.”



●잊혀지지 않는 기억 첫 번째라면?

“아무래도 앞서 말한 대로 첫 독창회가 기억에 새롭습니다. 은퇴할 때 가족들이 마련한 ‘정년퇴임기념 음악회’의 감동도 컸고요. 나도 최선을 다해 노래를 불렀고, 후배 성악가 김태훈 교수(청주대)의 노래와 장영숙(청주대), 권춘하(청주교육대)교수의 피아노 연주, 두 아들 부부의 연주 등 연주자와 청중이 한 가족처럼 호흡을 맞춰준 따뜻한 음악회여서 울림이 컸지요.



●음악 관련하여 하신 일들이 많으셨지요?

“다섯 번의 독창회마다 정성과 땀이 뱄지요. 교회의 성가 독창회, 아내가 음악학원을 하며 운영했던 ‘벨칸토’에서의 연주회, 독일가곡과 한국가곡을 선곡해 ‘애창 가곡집’CD를 만든 일, 1회 충청북도음악축제를 만들어 ‘한국가곡의 밤’과 ‘서울심포니에타·실내악의 밤’을 2일간이나 개최했던 일, 청주서남교회 찬양대 25년 지휘… 등 충북에 음악적 분위기를 만들고자 나름대로 노력을 했었던 일들이 기억이 납니다. 찬양대 지휘를 오래하다 보니 합창 소리가 세월이 갈수록 점점 작아지는 거예요. 그래서 더 소리를 높이라고 역정을 내곤 했어요. 그런데 알고 보니 내 청력이 나빠져서 작게 들리는 것을 뒤늦게야 알았어요. 그래서 얼른 지휘봉을 넘겼지요. 어찌나 부끄럽던지요(웃음)”



●하시는 일이라면?

“어린 시절부터 나가던 교회를 주말이면 꼭 나가고 있어요. 그래서 되도록 기독교적인 사고를 하려 노력하지요. 성경 가르침대로 인간애를 가져야 한다는 신념을 지키려 애를 씁니다. 그리고 매월 한 차례씩 가까운 친지들과 어울려 밥도 먹고 담소를 나누지요. 박상일(85·전 충북대농과대학장), 최종태(85·전 청주문화방송 상무), 박영수(85·전 청주문화원장·수필가)씨 등 오랜 친구들과의 만남은 부담도 없고 허심탄회하게 속을 털어놓을 수 있어 좋지요. 그리고 신문을 꼼꼼하게 읽으면서 세상 돌아가는 일에 관심을 갖지요. 중요한 기사나 상식을 돕는 기사엔 밑줄을 치거나 메모를 해 놓아요. 나이가 들어 갈수록 세상 돌아가는 것에 무심해지면, 세상도 점점 나를 무심하게 만들 것이어서지요. 다양한 일에 관심을 갖고 되도록 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갖고자 하고 있습니다. 그래야 정신적인 자양이 보충될 듯 해서지요.”



●잊혀 지지 않는 분은?

“누구나 그러하겠지만, 어머니가 늘 그리워요. 모시고 있다가 2016년에 99세로 청주인근 요양원에서 돌아가셨는데, 청주에서 중학교 다닐 때 진천 덕산 집에 다니러 가면 어머니는 늘 제일 먼저 동네 어른들 인사부터 챙기도록 하셨어요. 집성촌이어서 동네어른들이 거의 집안 어른들이셨는데 이웃과 어른들 섬기는 가정교육이 유별하셨지요. 어릴 때의 그 교육이 사회생활을 하면서 바른 언사와 행실로 사람을 대하는 기본을 익히게 하셨다고 봅니다. 앞에서 피력한 평생의 은인이자 입지전적인 음악인 이상덕 선생님도 잊을 수 없고, 잊어서도 안 되는 분이지요.”



●계획하고 있는 일이 있다면?

“늘 꿈꾸고 있는 일이지만, 진천 덕산면 용몽리 몽촌마을에 선대가 물려주신 땅이 좀 있습니다. 그 곳에 가족들이나 친지들이 모여 연주를 즐기는 집 하나 지었으면 하고 바라지만, 이뤄질 가능성은 거의 없어요. 그저 평생 음악과 함께 살아 온 사람이니 그런 소망만으로 행복을 느껴보는 일이겠지요. 또 하나 더 있다면 내년이면 결혼한 지 꼭 60년이 됩니다. 회혼이지요. 별 탈이 없다면 가족들과 맛있는 음식 나누고 부산 쯤 열차여행을 할까 합니다. 아내가 고소공포증이 있어서 해외여행은 포기했어요. 따지고 보면 국내여행도 해외 관광지 못지 않은 곳이 많아서 아쉬울 것도 없지요”



●긴 시간 좋은 말씀에 감사드립니다. 부디 건강하시고 행복한 노후 되시기 바랍니다.

 

조철호 동양일보회장
조철호 동양일보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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