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은 시간 놀고 즐기고 할 시간 없지요… 사도 바울처럼 남은 생애 하나님께 바칠 것입니다”

[동양일보]■장석연 원로목사는…



1943년 충북 괴산군 불정면 목도리에서 출생했다.

목도초-목도중·고를 나와 청주대 국어국문학과-동 대학원-충남대 대학원(박사과정 수료)-장로회 대전신학대-동 대학원 박사원(목회학 박사)을 나왔다. 1972년 청주대 국문학과 강사-전임강사-조교수-부교수로 18년간 강단에 섰다. 1990년 10월8일 청주서원경교회를 창립하면서 목회자의 길에 들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서원경교회 담임목사로 예수교장로회(통합)충청노회 회장을 역임하고 2010년 은퇴했다. 2년 후 세종시에 세종교회를 창립(2015년)해 요즘도 매주 토요일에 나가 전도교육을 하고 창립목사로 월 1,2회 설교도 행한다. 그의 설교는 내용과 호소력이 탁월하여 27명으로 개척한 서원경교회를 20년 만에 1만3000명 성전으로 키워 충북교회사에 한 전설이 되기도 했다. 가족으로는 부인 (김영애·74), 아들 (장철웅·47·세종농업기술센터 근무)과 며느리(성경화·45·세종시어린이집 원장), 딸(장한나·45·더기쁜노인복지센터 원장), 사위(김수진·47·청주 라온건축설계사무소 대표)가 있다.



…1990년 3월, 청주시 복대동 2008 삼일아파트 상가 3층 76평짜리 건물이 계약됐다. 매입자는 교회를 하겠다는 중년 부부였다. 그리고 5개월 뒤인 8월 1일 7세대 27명이 모여 성전입당기도회를 갖는다. 기도회를 주관하는 깡마르고 뿔테 안경을 낀 보통 키의 남자-18년간 후학양성에 애정을 쏟던 청주대학 국어국문학과 교수가 홀연 목회자로 변신하여 하나님의 종이 되기를 서약했다.

장석연(張錫連·당시 47세)목사. 그의 첫 설교는 결연決然했다.

“이 자리는 서원경 교회의 첫 번째 공식예배를 드리는 감격스러운 순간입니다. 서원경 개척의 주역으로 부름을 받은 우리에게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동일한 음성을 주십니다.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마음을 강하게 하라. 담대히 하라. 너는 이 백성으로 내가 그 조상에게 맹세하여 주리라 한 땅을 얻게 하리라’… 하나님은 지금 이 자리에서 바로 이 말씀을 통해 우리들에게 새로운 사명을 감당할 결의를 주십니다…”

-동양일보 2010년 10월 26일자 9면 ‘동양초대석’ <장석연 청주서원경교회 담임목사 대담> 머릿글



지난 15일 약속 시간에 나타난 장 목사는 예나 다름없이 웃는 표정이 맑았다. 젊을 때나 80대가 된 이제나 변함이 없다. 또 한 가지 눈에 익은 것이 있었다. 13년 전 <‘동양초대석’-조철호가 만난 사람> 취재 때 목에 걸었던 은제銀製타이슬링이었다. 평양에서 출토된 고구려 유적 진파리 7호분 금동장식 중 하나인 삼족오三足烏형상을 양각한 문양이 눈길을 끄는 장식. 오래전 아들이 여행 갔다가 사온 것이란다. 부인의 치매증세는 좀 어떠냐 물으니 요즘 조금 더 나빠진 듯하다며 씁쓸해 했다. 그래도 며칠 전부터 아내는 딸이 운영하는 노인복지센터에서 낮시간 대부분을 보내게 돼 마음이 놓인다고. “평생을 목회자 뒷바라지만 하다가 늘그막에 치매를 앓는 것이 가슴이 저리다”고 했다. 평생 구차한 말을 하지 않는데 ‘오죽하면…’이란 생각이 들었다.

 

 

●요즘 어떻게 지내시는지요.

“은목교회라고 있어요. ‘은퇴한 목회자들의 교회’라고 보면 됩니다. 청주법원 근처에 있는데 가끔 가서 설교를 하거나, 세종시 고운동 가락 18단지 아파트 부근에 있는 세종교회에서 매달 한두 차례 설교를 합니다. 창립목사의 사명이랄까, 은퇴목사의 소명이랄까 서원경 할 때보다 더 정성을 쏟습니다. 대체적으로 은퇴한 목회자들은 젊은 날 교회부흥에 혼신을 다한 끝이라 은퇴 후엔 하고 싶었던 여행이나 취미생활에 빠지는 사례를 자주 봅니다. 나는 은퇴 후 시간이 넉넉하여 본래부터 시도하던 ‘이야기식 설교’에 대해 깊이 연구하고 있어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강하게 빠른 시간에 심어주기 위함보다는, 이야기 전하듯 서서히 풀어서 이해를 돕고자 하는 것이지요. 일상을 살기에 바쁘고 지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서둔다고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음을 알고 있기에 그렇게 하는데, 나중에 보면 의외로 이해도가 높아요. 앞으로도 기회가 있으면 언제나 이야기식 설교로 말씀을 전해 보려 합니다.”



●살아오는 동안 잊혀 지지 않는 많은 일들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면?

“전에도 피력한대로 목도중학교 때 국어를 담당했던 안영자 선생님의 따뜻한 배려와 당부 말씀이 제일 기억에 새롭습니다. 새 아버지 때문에 강에 빠져 죽을 결심까지 했을 때 품에 안아준 그 선생님이 전근을 가시면서 ‘나를 키워주신 목사님과 국문학을 가르쳐 주신 교수님 은혜를 잊지 못하는데, 너는 교회도 열심히 다니고, 공부도 잘하니까 부디 목사님이나 교수님 중 어느 쪽이라도 되어 주면 좋겠다’고 하셨어요. 그때 겉으로는 고개만 끄덕였을 뿐이지만 속으로는 ‘선생님-교수도 하고, 목사님도 되겠어요’라고 대답했지요. 그 약속을 지키려 열심히 노력했지요. 중학교를 겨우 졸업하고 청주고등학교 시험을 쳤는데 2등으로 합격했다고 들었어요. 그런데 입학금이 없어 등록을 못한다고 하자 누군가가 지역신문에 내 사정 이야기를 전해서 기사로 나왔다고 알려주었어요. 그런데 등록마감일까지 나타나는 독지가가 없어 입학이 취소되었지요. 세상이 얼마나 각박한 지를 뼈저리게 느꼈지요. 하는 수 없이 목도고에 들어갔고 면사무소 사환으로 일하면서 다니다 말다하며 졸업을 하는데, 목도교회 전도사님이 청주대학 원서를 사다 주셨어요. 입학금 때문에 대학 진학이 어려울 것을 알면서도 전도사님의 성원으로 시험을 쳤습니다. 발표가 났는데 생각지도 못한 4개년 특대생이 되어 꿈에 그리던 대학을 다니게 되었지요. 옛날 일을 돌이키려면 그런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떠오릅니다. 어린 시절이나 젊은 시절의 애환이 너무나 깊게 각인돼 있나 봐요.”



●그 선생님은 둘 중 하나만이라도 하시길 바랐는데 둘 다 하신 셈이네요.

“그 때 속으로 대답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알게 모르게 자신을 꽤나 담금질 했을 것입니다.

대학 시절에도 밥 한 두끼 굶는 것은 문제도 아니었어요. 어느 때는 학교 가려면 어지러워서 한동안 가로수나 건물 벽에 기댔다가 가기도 했어요. 울어도 눈물이 나지 않는 것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은 몰라요. 대학 교수가 돼서도 학생 때의 그런 가난과 고난의 경험 때문에 학생들을 유심히 살펴보는 버릇이 있었습니다. 그 빈곤의 시대를 벗어난 지금은 오히려 풍요가 넘쳐서 걱정이 되지만요. 목회자가 되고 서원경 교회가 자리를 잡았을 때도 문득 문득 그 어려웠던 시절이 떠올라서 다시 옷깃을 여미며 자세를 바로잡으려 신경을 썼습니다.”



●여러 곳에 교회도 세우셨지요?

“서원경교회를 비롯해 중국 오지에 소수민족들을 위해 세운 곳이 3곳, 캄보디아에 1곳, 세종시에 1곳 등 모두 6개의 성전을 세워 하나님께 바쳤네요. 당초엔 3개가 목표였는데… 살아있는 동안 1개쯤 더 세워볼 생각입니다. 청주 어느 한 곳에 손바닥 만 한 땅이 있는데 어떻게 교회를 건축할 수 있는가를 골똘하게 생각하고 있지요.”



●곳곳에 교회 십자가가 보이지 않는 곳이 없을 만큼 많은데도 더 필요한가요?

“교회는 많이 세워져야 하고, 계속 세워질수록 좋은 현상이라고 봅니다. 서로 협력하고 선한 경쟁을 하면서 세상을 복음화 시켜 가는 일이야말로 바람직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문제는 신학과 이념이 아닌, 인간관계의 불화나 감정적인 일로 대립하고 난립하고 교단이 분열하는 것이지요. 교회가 많다고 해도 어느 교회 하나라도 도둑질을 하라거나 간음을 하라거나 하는 교회는 없잖아요? 교회가 크든 작든, 목회자가 잘났건 못났건 모두가 성경의 가르침을 따르라는데 이의가 있을 수 없지요. 그렇기에 교회가 많을수록 사회는 정화되고, 인간은 겸손해지지요. 나라나 사회나 가정이나 절대의 믿음이 있으면 그게 바로 천국이 아닐까요.”



●서원경교회를 하실 때, 중국동포 문인들이 매년 ‘충북명사시낭송회’에 와서 출연하는 15일간의 충북순회행사를 마치면 고국의 풍광이 아름다운 제주도를 보고 가라며 해마다 2박 3일간의 여행을 시켜 주셨지요. 그러기를 10년 가까이 해 오셨기에 지금도 연변에 가면 장 목사님 안부를 묻는 문인-교사-언론인들이 꽤나 많습니다.

“지금도 그 때 한국에 초청돼 왔다 간 100명 가까운 동포 지성인들이 서원경교회에 감사인사차 들렸다가 예배 보는 광경을 보고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며 안부를 전해 오고 있어요. 중국 같은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교회는 건물만이지 교인들이 없어요. 그때 왔던 한 분은 정년퇴직을 했고 교회를 나간다고 전해 왔었어요. 매년 10명 전후 방문했던 기억이 나지요. 한국여행이 꽤 인상 깊었는지 여러해 전에 연길에 갔을 때 만났더니 오랜 시간을 제주도와 충북의 곳곳에 관한 소감들을 어찌나 소상하게 기억하고 있는지 놀랐어요. 이제 그분들도 꽤나 나이들이 들었을 것입니다.”



●요즘같이 한국과 중국이 불편한 관계만 아니라면 자주 왕래가 있었을 것인데 유감스럽지요. 그 중 매년 인솔단장을 맡았던 이임원 시인(연변문화예술연구소장)이나 양은희 수필가(연변일보 기자), 심예란 시인(조선족자치주정부 근무), 김영춘 시인(연길방송국 기자), 김성희 수필가(연변대학 교수) 등도 정년퇴직을 했거나 정년을 앞두고 있지요. 연변에 가면 몰려와 장 목사님 안부를 묻곤 하는 분들이지요.

이제 80을 넘어서서 뒤돌아보시니 지내 온 일들이 어떻게 느껴지시는지요.

“굽이굽이 참 먼 길을 왔다 싶습니다. 고생과 사연도 많은 것이 인생이지만, 저는 퍽 힘들게 살아왔다 싶어요. 그런데도 고등학교 교사 3년과 교수 18년 등 20년 넘는 교단생활을 했고, 교수시절 두 젊은 교수의 죽음을 겪으며 목회자로 들어서게 되어 하나님의 사랑 안에 들게 되었지요. 젊은 때는 자기중심에서 벗어나지 못해 후회스러운 것이 많았지만, 이제는 하나님만 바라보고 살게 됐고, 또 그렇게 삶을 마감하고자 마음먹어 평안을 누리고 있습니다. 앞으로 허락받은 삶이 그리 많이 남아 있지 않을 것임을 알기에 더 열심히 복음을 전하는 일에 정진하려 마음을 다지고 있어요. 은퇴자라 하여 그저 편하고 인생을 즐기는 일에 마음 쓰기보다는 시간을 틈내 설교준비하고, 큰 교회 만드는 것 보단 작은 집단이라도 만들어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사도 역을 하고자 합니다. 남은 생애 놀고 즐기고 할 시간이 없습니다”



●그렇게 목회자의 사명을 다하려면 건강을 챙겨야 하실 텐데요.

“그래도 잔병치레 같은 것은 아직 없어요. 몸이 좋지 않은 아내가 노인복지센터에서 오후 4, 5시 쯤 나오면 그길로 1시간 쯤 햇볕을 쪼이며 함께 걷지요. 그리고 저녁식사는 꼭 외식을 해요. 매일 입맛에 맞는 집을 찾아가는데 아무래도 전에 아내가 해주던 밥상만이야 한가요. 아침식사는 거의 내가 조리를 하다시피 하는데 아내가 옆에서 지켜보고 있어 그래도 안심이 되지요.”



●존경하는 인물은?

“예수님의 사도 바울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열두 제자에 끼는 사람도 아닙니다. 예수그리스도와는 1세기 뒤의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사도가 되기 전엔 지극히 세속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열렬한 유대교도였던 그가 기독교도를 박해하러 다마스쿠스로 가다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사람이 되고부터 전 생애를 오로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영육을 다 바친 사람이지요. 그런 바울이 로마에서 순교하기 전 <로마서>, <고린도서>, <갈라디아서> 등의 저술을 남긴 것이 전해집니다. 그런 바울의 생애가 진정으로 부럽고 존경스럽지요.”



●더 남기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다시 말씀드리지만, 젊은 시절 먹고사는 일이 화급하여 오직 자신만을 위해 자신의 세계에 빠져있던 짧지 않은 세월이 아쉽고 부끄럽지요. 자신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향해 하나님을 바라보며 사는 것이 소원이어서 이제부터라도 겸허히 그렇게 살고자 합니다.”



●가까이서 한 신앙인의 소박하고 땀 밴 생애를 50년 넘게 지켜보아 왔는데, 오늘 대담을 통해 하나님을 향한 굳은 결의를 다시 봅니다. 부디 오래 건강한 모습 뵙기를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조철호 동양일보 회장·시인
조철호 동양일보 회장·시인

 

■ 조철호 동양일보 회장·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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