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기자로 살아온 생애 소설보다 더 드라마틱… 사진과 필름 정리 곁들인 글쓰기에 남은 시간 짧아

[동양일보]1970년대 초부터 청주를 비롯한 충북의 곳곳에서 행하여진 크고 작은 행사와, 사건사고의 현장에선 작은 몸집에 버거운 듯 큰 가방을 메고 사진을 찍느라 여념이 없던 한 사진기자를 기억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지칠 줄 모르고 현장을 누비던 그 사진기자가 이젠 80대 중반, 숱한 세월의 주름살이 노인을 만들었어도 ‘사진’이야기만 나오면 신명이 나는 ‘충북의 사진기자 1호’ 김운기(金云基·86·청주시 상당구 영운동 수영로 삼일아파트)사진작가를 만났다. 그를 처음 만난 것은 58년 전(1966년), 필자가 대학신문 학생기자로 신문을 만들던 청주상당인쇄사에서였다. 그후 1971년 충청일보 기자로 첫 출발을 하면서 같은 직장의 선배 사원으로 다시 만났다. 공무국 사원으로 있던 그를 1호 사진기자가 되도록 주선했던 인연인데도, 기자 반세기를 지나는 동안 서로가 다른 소속사에서 ‘언론사 밥’을 먹으며 살았던 탓에 궁금한 게 많았다.



●한동안 건강 때문에 바깥출입을 하지 않으셨다 들었습니다.

“2년 전 집 욕실에서 넘어져 다친 허리가 말썽을 피웠어요. 내 허리는 어려서부터 몇 번 곤욕을 치렀지요. 어린나이인 11살부터는 나무를 해다 파느라 지게질로 고생을 했는데, 사진기자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아 1972년 8.19 단양수해 땐 수해현장에 갔다가 헬기가 송전선에 걸려 추락하는 바람에 허리를 다쳤지요. 그러나 먹고 사는 일이 우선이라 그동안 고통을 무릅쓰고 견뎠지요. 카메라 백이 얼마나 무겁습니까, 내 몸에서 가장 골병이 드는 건 늘 허리지요. 지난 해 부터 얼마 전 까지 8개월간을 거의 누워 지내야 했습니다.”



●누워 지내야하는 힘든 기간에 많은 생각을 하셨겠습니다.

“성격상 누워있기만 할 수 없었어요. 누운 채로 그동안 미뤄왔던 필름 정리와 사진 찍는 감각을 잃을까 싶어 핸드폰으로 TV에 나오는 옛날 가수들의 표정을 담았지요. 1985년부터 2000년까지의 가요무대 출연가수들을 모두 찍었어요. 2채널에서 재방송 하는 것을 찍었는데, 의상은 화려하지만 그들의 화려함 속 실상은 라면 먹으며 견디는 생활이기도 하여 마음이 아렸습니다. 통증을 참으며 누워서 ‘루뻬’확대경로 필름을 살피며 핸드폰 촬영을 하는 환자를 돌보는 아내(안후환·85)가 안쓰러웠지만, 어쩌겠어요. 타고난 사진쟁이의 숙명이니…”



●옛날엔 사직동에서 오래 살았지요?

“사직1동 543-8에서 59년이나 살았어요. 그 단독주택에서 부모님 모시고 아이들 5남매 다 낳고 키웠지요. 재개발 때문에 현재 아파트(35평)로 이사를 했습니다. 남들은 아이들이 잘 됐다고 그 때 집이 명당 터라고 해요. 가난했지만, 아이들이 열심히 공부하고 잘 커 줬지요”



●김현숙(61)여성가족부 장관이 장녀지요?

“그래요. 큰 딸이 한벌초-청주여중-일신여고를 나와 서울대 경제과에 합격을 하자 일신여고 출신으로 그 대학 간 것이 처음이라며 기뻐들 했습니다. 둘째 딸(정숙·49)은 인천대 교수,

셋째(경아·46)는 경기도 판교에 사는데 남편이 13층짜리 빌딩 사장입니다. 장남(동현·44)은 문화재 발굴 회사를 경영하고, 막내(주현·43)는 한‧미합작회사의 총괄운영이사여서 저마다들 제 밥은 먹고 살아요.지금 생각하면 이제까지의 살아온 일들이 기적의 연속이었습니다.”



●기적적인 일들을 기억나는 대로 더듬어 보신다면…

“광부의 아들로 강원도 금화에서 태어나, 10살 때 강원도 화천으로 이사와서 살 때였어요. 산이 깊은 곳이어서 밤이면 ‘눈 큰놈’(호랑이)이 나온다고 이웃 마실도 못 가게 할 때인데 방문 앞에 시퍼런 불빛을 뿜는 짐승을 보았지요. 소리도 못 지르고 겨우 방문을 닫고 숨을 고르고 있기를 얼마나 흘렀는지요. 이튿날 들으니 옆집 큰 개를 물어갔답니다. 두 번째는 군 복무 중일 때 지리산 피아골에서 창경원에 납품할 토끼를 기르면 돈이 된다하여 대대적으로 토끼집을 짓고 어미토끼 16마리를 사다 키웠는데 알고 보니 사기를 당한 거예요. 그 때의 곤경에서 빠져나온 것도 기적이지요. 군 제대 후 나무하러 간 산에서 쉬고 있는 곳 3,4ⅿ 옆에 늑대 두 마리가 와 앉는 거예요. 가슴이 두 방망이질을 해댔지만 도망을 가야한다는 생각에 나뭇짐을 지고 얼마나 뛰었는지요. 3년 전 이곳에서 노인이 늑대에게 물려 죽었다는 소문을 아는 터라 죽을 힘을 다해 뛰었어요. 그 때 살아난 것도 기적이에요. 충주에서 잠시 살다가 진천을 거쳐 청주로 이사와 동네 형을 따라 국민일보(충청일보 전신)문선부에서 해판解版작업을 하거나 상당인쇄사와 충청일보에서 문선공으로 일을 하다 평생의 직업인 사진기자가 된 것도 기적이지요. 다섯 번째 기적은 1972년 단양 8.19 수해 사진을 찍으러 갔다가 탑승했던 37사 소속 헬기가 남한강변에서 송전선에 걸려 추락했어요. 강가 자갈밭에 떨어졌는데 그때 허리를 다쳤지만 살아 난 것이 기적이었습니다.”

 

 

●1947년 남하할 때 떼어 놓았던 누님도 찾았다지요?

“남하할 때가 11살 때였어요. 부모님은 그 때 다시 와서 데려가겠다며 누님은 떼어놓고 왔어요. 그런데 21년 만에 춘천에서 기적처럼 만나게 되지요. 마주치니 너무 감정이 북받쳐서 서로 멍하니 바라보며 울지도 못했어요. 생각해 보면 광부의 아들로 태어나 남하하여 목숨을 이어가는 고비 고비가 기적의 연속이었지요.”



●가장 큰 기적은 군에서 통신병과를 받아 사진기술을 익힌 것이 아닐까요?

“결과적으로 보면 그렇지요. 학력이라고는 초등학교 5개월만 다니고 독학으로 한글을 깨우치고 구구단을 외우고…하면서 겨우 눈을 떴는데 중학교 졸업이라고 속여 통신학교에 들어갔다 나와 1960년에 ‘육군 사진병’이 된 것도 기적이죠. 이를 기점으로 내 인생의 항로가 정해지고 평생을 카메라와 더불어 희로애락을 함께 하게 되었지요.”



●나는 1971년 2기 수습기자로 입사한 후 얼마 되지 않아 충북 ‘사진기자 1호’의 탄생을 함께 지켜본 기억이 새삼스럽습니다. 카메라 한 대와 확대기 하나 달랑 갖춰 암실을 함께 만들고도 감개가 무량하여 꿈에 부풀었던 그 때가 잊혀 지지 않습니다.

“당시 충청일보의 재정이 워낙 열악하여 대판 4페이지짜리 신문을 납 활자를 조판하여 평판으로 찍던 시대여서 사진기자를 둘 형편이 못 되었었지요. 그 당시 공무국 문선부에서 편집국 사진부로 발령을 받고 밤을 새워 암실을 꾸몄지요. ‘보도’라고 큰 글씨가 새겨진 모자를 쓰고 행사장에 나타나면 모두가 호기심어린 눈으로 지켜보았습니다. 그 당시엔 TV도, 다른 지방신문도 없던 때여서 독무대처럼 누비고 다녔지요. 도청과 도교육위원회(현 도교육청)와 시,군청에 만 공보실에 사진기사 가 있을 때여서 사진기자는 내가 유일했습니다.”



●그때는 지금처럼 카메라 배낭을 짊어지고 다니지 않을 때여서 키가 작은 ‘김운기 사진기자’의 카메라 백이 더 커 보이고 무거워 보였었지요.(웃음) 그런데도 참 바지런하게 돌아다니시던 모습이 선연합니다.

“내 육군 사진병 시절의 별명이 ‘라이터 돌’이었어요. 키가 워낙 작아서 오히려 한 번 보면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득이 되기도 했지요.”



●사진에 관련한 책도 여러 권 내셨지요?

“1978년에 낸 <초보자를 위한 기초사진>을 비롯해 현장 사진을 모은 <대청댐, 그 때 그 사람들>, <충주댐, 그 때 그 사람들>, 충북도계 답사기 <소백산>, <고향 이야기>, <충북인의 기억이 머무는 곳>, <어머니, 그 고향의 실루엣>, 대청댐이 생기면서 고향을 떠나야 했던 4개 시‧군 86개 마을 2만6000여 명 주민의 흔적 일부를 담은 <그때 그 속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 등10권이 넘습니다. 신문 연재도 ‘아름다운 충북’(100회), ‘생명의 씨앗’(67회), ‘충북 어제와 오늘’(36회), ‘아름다운 우리 꽃’등이 있어요.”



●지난 5월에 김운기 장편소설 <소설 농부>라는 책을 내셨더군요. 왜 갑작스럽게 소설을 쓰셨는지요.

“옛날에 심훈의 <상록수>를 읽은 감동이 평생 사라지지 않아요. 농촌계몽을 위해 젊은 청년과 그의 연인이 정열을 쏟는 내용이 가슴 뜨거웠어요. 1960년대부터 산업사회로 발전된 1990년대까지 농촌을 부흥시키면서 자식들을 공부시킨 한 머슴의 일대기를 그리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농촌을 다니며 느꼈던 것이나 앞으로 농촌에서 이런 이야기들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당초의 생각에는 많이 못 미친 것 같지요. 의도와 실제와 결과가 다 달라진 것 같습니다.”



●보도사진작가가 문학이거나 소설이라는 창작예술의 영역을 아무런 준비-공부도 없이 뛰어든다는 것이 억지스럽다거나 엉뚱하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으셨나요?

“책을 쓰면서 ‘농부가 나라의 보배’라는 주제에 매달리다보니 세태와 산업사회로의 전환 등 염두에 두어야 할 것들이 욕심이 생겨 픽션과 넌 픽션의 개념도 없어지는 등 혼동을 빚었습니다. 누군가가 이런 내용으로는 ‘소설을 쓰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으면 차라리 자료집처럼 만들었을 것이란 후회도 합니다. 이왕 나온 책이니 주변 지인들에게 ‘객기’부렸다며 한 권씩 선물이나 하려 합니다.”



●지나온 세월 특별한 기억이나 아쉬움이라면…

“돌이켜 보면 우리는 모두 가난한 시대를 살아 왔지 않습니까? 사진기자 생활을 하면서 가장 뼈저린 아픔은 회사로부터 ‘필름 많이 쓴다’는 지청구였습니다. 이해 못하는 상사들은 신문에 사진은 몇 커트 들어가지 않는데 웬 필름을 그렇게 많이 쓰느냐는 것이지요. 행사나 스포츠 장면이나 신문에 한 커트 싣기 위해 얼마나 많은 장면을 찍어야합니까. 그리고 기록용으로 꼭 찍어 놓아야할 것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참 많이도 힘들었지요. <소백산>을 연재할 때도 300명이나 인터뷰를 했어요. 전국소년체전 때나 대청댐, 충주댐 수몰지 현장도 남들이 쉬는 토·일요일이나 공휴일에 일일이 걸어 다니면서 기록을 남겼습니다. 무거운 가방을 메고 하루 수 십 리길을 걸어 다니다 보면 식당은커녕 구멍가게조차 없어서 굶기가 다반사였어요. 허기지고 피곤하지만 역사의 기록자라는 사명감으로 현장을 누볐지요. 예술사진을 찍는 작가들은 ‘잡동사니만 찍고 다닌다’며 조롱을 하지요. 그런데 보세요. 지금 우리에게 남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그 때 시간과 몸이 따르지 못해 더 찍어 놓지 못한 것이 한이지요.”



●지금까지 썼던 카메라는 몇 대나 되는지요.

“모두 13대 인데, 유감(?)스럽게도 한 번도 새 카메라를 구입해 보지 못했어요.



●명필은 붓을 탓하지 않는다는 말이 생각납니다. 보도사진을 찍으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면?

“72년 단양수해 보도사진전을 열었을 때 수해의연금이 생각 보다 많이 답지했던 감동과, 4회 전국소년체전이 열리고 있을 때 서울 동대문운동장에서 개막식에 참석했던 육영수여사가 가까이 다가와 ‘김 기자님- 수고 많으세요’라며 손을 흔들어 주고 갔을 때였습니다. 무리지어 있던 수많은 사진기자들이 얼마나 부러워했는지요. 전국소년체전은 충북이 해마다 종합우승을 하여 ‘하면된다’와 ‘내륙의 기적’이란 신문표제가 주먹활자로 장식될 때였지요. 그 당시는 온 도민들이 소년체전 때문에 어깨를 으쓱대며 다닐 때였지요. 그리운 추억의 한 커트지요.”



●살아온 사연 사연이 소설 보다 더 드라마틱한 삶을 살아오셨습니다. 남은 생애 더 하실 일이라면?

“그동안 다하지 못한 사진과 필름 정리에 곁들인 글쓰기로도 시간이 짧을 것 같습니다.”



●충북의 보도사진작가 1호로 건재하시기를 빕니다.

 

조철호 동양일보 회장·시인
조철호 동양일보 회장·시인

 

■ 동양일보 회장·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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