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극만 1000여 편 쓴 한국 방송가의 전설 “천안 윤혁민드라마기념관 생기면 ‘천안 국제드라마제’ 만들고 싶어”

[동양일보] 60대 이후의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박정희 대통령-새마을 운동-‘꽃피는 팔도강산’을 자연스럽게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1970년 4월 22일 제창된 새마을운동은 5000년 가난으로 찌든 한반도 전역을 ‘잘 살아 보자’는 열기로 뜨겁게 채웠다. 광대뼈가 돋보이는 깡마른 얼굴에 썬 글라스를 쓴 박 대통령이 도시와 농촌을 가리지 않고 들불처럼 번진 새마을 운동의 작업현장에 나타나 독려하던 모습이 연일 언론을 덮었다. 새마을 운동의 거센 물결이 휩쓴 지 만 4년이 되는 1974년 4월14일, 전 국민적 노력이 ‘사투’死鬪(?) 끝에 ‘우리도 잘 살 수 있다’는 범국민적 노력과 희망에 기름을 붓는 일일방송극 ‘꽃피는 팔도강산’이 첫 선을 보였다. 김희갑·황정순·장민호·최은희·박노식·도금봉·태현실…등 당대 최고 스타들의 등장으로 엮어지는 재미와 감동은 순식간에 시청률 40%대를 기록했고, 1년 반에 걸쳐 397회 최장수 방영으로 한국방송사를 새롭게 썼다. 이 드라마가 방영되는 밤 9시 40분부터 10시까지는 거리가 한산할 정도였다. TV-드라마의 위력은 실로 상상을 뛰어 넘었다.



방송가에서 아직도 전설처럼 회자되는 KBS일일드라마 ‘꽃피는 팔도강산’을 쓴 윤혁민(尹赫民·본명 윤병수·85·충남 천안시 동면 행암길 61-7)작가는 키 175㎝에 체중 97kg의 거구다. 언뜻 보면 옛 장수將帥의 체격인데 사람을 웃기고 울리고 감동을 주는 ‘이야기꾼’-드라마 작가라기엔 영 ‘아니올시다’로 보인다. 그러나 그는 청소년 때부터 이미 ‘글쟁이 끼’를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그는 천안시 동면에서 교육자의 10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를 따라 이 곳 저곳으로 이사를 다니면서 진천중-청주고-중앙대 예술대(전 서라벌예술대)문예창작과를 거치는데, 청주고 재학시절엔 충청일보 신춘문예 학생부에 소설이, 일반부에 시가 입상하고, 청주시내 고교생문학도들의 모임인 ‘푸른문’을 결성하기도 한다.

그가 방송극작가의 문을 두드린 건 육군 훈련소에서 1959년 KBS신춘연속극 공모에 당선작 없는 가작으로 뽑히면서부터다. 그 때의 심사위원 중 한명이 충북 괴산군 청안면 출신으로 한국방송극작가의 대부로 꼽히던 소설가이자 언론인이던 한운사(1923~2009) 선생이었다. 군 복무를 마치고 막노동판도 다니던 그는 조흔파 씨의 ‘유쾌한 3형제’ ‘대타 작가’로 출발하면서 전속작가 겸 객원 PD가 되어 ‘양지를 찾아서’의 고정 프로그램을 맡아 전국을 누비며 극본을 쓰고 편집과 연출까지를 겸해 한껏 능력을 키운다. 공익 스파트를 매일 10편씩, 구민 씨가 출연하는 ‘방송만필’도 써댔다.

그는 “그 때가 인생에서 제일 바빴던 때”라고 회상한다. 한운사 선생의 인기드라마 ‘남과 북’도 그가 담당했던 프로그램이었다. ‘현해탄은 알고 있다’ ‘현해탄은 말이 없다’ ‘승자와 패자’ 3부작 소설로도 명가를 높인 한운사 선생은 윤혁민(진천)을 비롯해 ‘언어의 마술사’ 김수현(청주·1943~), ‘야, 곰례야’를 쓴 나연숙(충주· 1944~2022)등 충북출신 방송극작가들의 스승이자 고향선배로 큰 그늘이 돼줬다.

‘이 생명 다하도록’ ‘현해탄은 알고 있다’ ‘빨간마후라’ ‘남과 북’등 당대의 인기절정이던 드라마가 모두 한운사 극본이다. 2009년 선생이 타계하신 4년 후인 2013년 청안 고향집 근처에 ‘한운사기념관’이 섰다. 그로부터 10년이 되어가는 지난해 10월, 이곳에서 첫 한운사추모제가 치러졌는데 이 자리에서 기념관을 떠받치고 있는 큰 소나무를 ‘운사나무’로 명명하고, 동양일보와 한국방송극작가협회와 괴산군이 공동으로 기념비를 세웠다.
 

뿌리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뿌리 없는 나무도 없습니다.

사람과 나무가 하나 되듯이

모두가 하나 되는 구름다리를 놓아 주소서

이 <운사나무 표석>의 비문을 쓴 이도 ‘제자작가 윤혁민’이라 각자돼 있다.

윤 작가는 초등학교 교장이던 부친이 부산 출장 중 여관비를 아끼려 여인숙에서 자다가 연탄가스 중독으로 별세한(1970년)이후 장자의식長子意識으로 늘 어깨가 무거웠다. 1994년 76세로 돌아가신 어머니를 본인이 태어났고, 아버지를 모신 천안시 동남구 동면 수남리에 모셨다. 어머니가 생전 그토록 내려와 살고 싶어 하시던 곳을 생전이 아니라 ‘관 머리를 앞세우고’돌아 온 불효에 가슴이 메어 집안조카가 살던 집을 빌어 시묘 살이를 했다. 그렇게 3년을 지내자 아예 눌러 살게 됐다.

현재 살고 있는 집은 부모님 산소에서 시오리(6㎞)떨어진 마을. 시골집 방을 털어 서재를 꾸미고 한켠에 침대를 놓았다. ‘몽각산방夢覺山房’이란 당호를 달았는데 방문객들마다 묻는단다. 집 주인인 그는 “뒷산 이름이 몽각산인데, 꿈속에서만이라도 깨달으라는 말인지, 꿈 깨면 깨달으란 말인지는 느끼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라며 허허 웃는다. 동갑나이였던 부인(변정숙·2017년 별세)과 사별한지도 어느새 6년, SBS에서 정년퇴임한 아들(윤경섭·62)과 보훈처에서 서기관으로 있는 딸(윤소영·60)들은 저마다 잘들 살고 있어 마음이 놓인단다.

지난 13일, 청주에 나오셔서 점심이나 함께 하시면 좋겠다는 후배의 떼거리에 못 이겨 우중임에도 모처럼 청주 나들이를 하셨다. 지난 5월 28일 천안에서 있었던 ‘윤혁민드라마기념관건립추진위원회’ 결성식 행사장에서 보다 더 건강한 모습이었다. 5년 전 대장암 수술 후 ‘완치’판정을 받았고, 지난 해 8월 위암수술을 받았는데 술,커피는 금하라는 의사의 권고가 있었지만, 수술 후 1년이 되면서 “의사가 보지 않으니까 커피는 슬쩍 슬쩍하고 있다”며 장난기 있는 소년처럼 웃는다.
 

 

●건강해 보이십니다. 외롭지는 않으신지요.

“잘 지내고 있어요. 함께 살고 있는 후배 작가들-김지수(61·‘의가형제’ ‘잊혀진 여자’ 등을 쓴), 박철(49·‘보쌈’을 쓴)씨와 한 식구들이어서 즐겁게 지내요. ‘꽃님이 엄마’로 불리는 윤석례(72)씨를 비롯한 그 주변 친구들의 살뜰한 보살핌이 벌써 27년이나 이어지고 있지요. 과분한 축복이지요. 매일 들러 하루 3시간씩 뒷바라지를 해주는 방문요양사의 따뜻함도 생활에 큰 도움이 돼요.”



●천안서 추진되고 있는 윤혁민드라마기념관건립추진위 활동은 어떤지요.

“자세히는 모르나 얼마 전 천안의 어떤 분이 땅 1500평을 희사하겠다고 나섰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추진하는 분들이 열심히 활동하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송구스럽지요.”



●기념관이 건립되면 그동안 쓰신 1000편 이상의 드라마 자료가 모두 그 곳에 보관되게 되겠지요?

“아무래도 그렇게 되겠지요. 내가 그동안 써서 방송된 자료를 다 찾으면 2000건도 넘을 것입니다. 보관도 중요하지만 숨겨져 있는 작품을 찾아내는 작업도 만만치 않을 것입니다. 모든 일이 쉬운 것은 없지요.”



●몇년 전 ‘생전生前장례식葬禮式’과 ‘생전장生前葬상여놀이’ 등 드라마 같은 행사를 직접 마련하셔서 화제가 됐었지요?

“2011년 4월 14일, 봄맞이 겸 살아있는 고등학교 친구들 100여 명을 초대해 ‘살아서 치르는 장례식’을 기획해봤지요. 내 죽어서 치르는 장례식은 가족장으로만 할 것이어서 그 땐 부르지 않을 것입니다. 동기생 400명 중 100명은 이미 죽었고, 100명은 투병중이고, 50명은 외국에 살거나 연락이 닿지 않아 초대된 친구들끼리 순대 한 첨에 소주 한 잔 씩 나눴지요. 6월 15일엔 방송국 지인들의 모임인 드라마 패밀리 6월 모임을 몽각산방에서 ‘49재’로 치렀어요. 방송관계자들은 물론 청주친구들과 원동식구들과 밤새 노래하고 술 마시고 질탕하게 놀았어요. 이사람 저 사람들이 먹을 것을 대다보니 큰 잔치가 되더라고요. 어떻게 보면 살아 있는 동안 한 번 더 만나려는 속셈도 있었지만, 죽을 때 후회할 게 아니지요. 재미있었고 감동적이었어요.”



●살아오시는 동안 가장 후회스러운 일이라면?

“60년간을 함께 살아온 아내 생전에 ‘사랑 한다’는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해 준 것이지요. 은혼식과 금혼식은 아내가 병상에 있어 못하고, 회혼식은 아내가 입원 중이어서 못했지만 매년 결혼기념일인 4월 23일엔 꼭 꽃다발을 보냈지요. 환갑이 지나서 친구들과 술 마시다가 그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쑥스러우면 전화로라도 한 번 사랑한다고 하라는 친구들 권유에 아내에게 전화를 했지요. “‘여보, 사랑해~’라고 했더니 아내가 대뜸 ‘당신 술 취했지?’하는 겁니다. 그래서 모처럼 벼르고 했다가 ‘무효’판정을 받았어요. 속사랑을 아는지 모르는지… 허, 참내-” (다 지나간 얘기라며 씁쓸하게 웃었다.)



●젊은시절부터 글 쓰랴, 술 마시랴 바쁘시다보니 부인께서 고생을 많이 하셨지요?

“30대 후반 들어 어떤 날 밤 아내가 술 한 잔을 하자더니 한운사 선생님을 모시고 꼭 할 말이 있다기에 어렵사리 전화를 드렸어요. 선생님이 단숨에 달려 나오셨는데 대뜸 ‘이 사람이 선생님 말씀만 들을 것 같아 모셨어요.’라더니 ‘제발 술 좀 못하게 하고, 집에 생활비 좀 가져 오라 해 주세요’ 하는 거예요. 나는 술이 확 깼지요. 그런데 한 선생님이 하시는 말씀이 ‘송아지를 고삐를 매서 풀밭에 두면 제 근처 풀 밖에 못 먹어요. 고삐를 풀어 놓아야 멀리 있는 맛좋은 풀을 먹을 수 있지요’ 였어요. 선생님이 돌아가시고 아내가 2차를 가자더니 ‘어떻게 작가라는 x들은 선배나 후배나 한결 같으냐’라며 소리를 지르더군요. 원군援軍을 구하려다 실패한 패장敗將의 포악暴惡이었지요”



●요즘은 어떤 생각을 하고 계신지요?

“지팡이를 짚는 처지지만, 내 남은 소망이 유유자적하며 세상을 한 바퀴 도는 것입니다. 가능하면 휴전선을 넘어 개성-평양을 거쳐 북녘을 지나 중국이며 러시아-유럽-아프리카… 마음대로 휘젓고 싶어요. 많은 것, 많은 사람들을 보면서. 그런데 그런 내 꿈을 이뤄주겠다며 미국 사는 유광현(85·청주고 동기로 서울대 불문과 졸)이 가지고 있는 캠핑카를 갖고 들어오려 수속 중이니 11월까지 기다리라는 연락을 주었어요. 한 선생님이 아끼던 후배 가수인데 시인 김지하·김정남 등과 동기들로 한 선생님이 쓴 ‘가슴을 펴라’(원제는 ‘대학가의 건달들’)주제가를 불렀지요. 수학여행 기다리는 중학생처럼 가슴이 설레요.”



●드라마 더 쓰고 싶은 생각은 없으신지요.

“내 살아온 인생을 녹인 드라마로 쓰고 싶지만 이젠 어려울 것이고… 혹 내 드라마기념관이 생긴다면 ‘천안 국제드라마제’를 만들고 싶습니다. 세계의 영화제처럼, 세계인들을 울리고 웃긴 드라마를 한자리에서 감상하는 때가 왔다고 봅니다. 아직도 드라마를 단순히 상업극 정도로 여기는 경향이 있는 듯해요. 이 같은 행사를 통해서라도 후배 극작가들의 훌륭한 작품들이 공인 받고 인류 문화에 기여하는 참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곧 그런 날이 올 것이라 믿어요.”



●올 11월 이후 캠핑카를 타고 세계여행 나서시는 모습을 뵙고 싶습니다. 먼 길 어려운 걸음 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조철호 시인·동양일보 회장
조철호 시인·동양일보 회장

 

■ 조철호 동양일보 회장·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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