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과수원과 ‘문향 영동’을 지켜 온 시조시단의 원로 ‘사과농사 보다 시 한 편 쓰기가 더 어렵다’ 고백”

[동양일보]

충북 영동군은 군민 4만5,000명을 품고 있는 충청북도 최남단 지역이다.

기후가 따뜻하여 포도 사과 복숭아 등 과일의 산지다. 한국의 3대악성으로 꼽히는 가야금 명인 난계蘭溪박연朴堧(1378~1458. 영동군 심천면 고당리)의 고향이어서 그를 기리는 난계사당, 난계국악당이 있고 난계국악축제가 매년 개최되고 있어 ‘국악의 고장’이라 일컫는다. 그러나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나라 근세사 100년에 문명文名이 확실한 문인들이 군집群集해 있어 전국적으로도 ‘문향文鄕영동永同’이라 해도 지나침이 없다. 1920년대 아나키스트 시인 권구현(1898~1938)을 비롯, 군인 시인 이영순, 재미 시인이었던 고원, 영동 감나무 가로수를 심은 시인이자 방송작가였던 구석봉, 수필가 송도 등 4,50년대 문인이 활동한데 이어 60년대엔 최연홍(시) 송백헌(평론) 이동희(소설) 박명용(시) 박희선(시) 박용삼(시,소설) 장지성(시조)이 등단했고, 70년대 들어 한병호(시) 윤수천(동화) 송재영(평론) 이방남(시조) 이숙(수필) 박운식(시) 박희성(시조) 신갑선(시)이 문단에 얼굴을 내밀었으며, 80년대엔 김석환(시) 양문규(시) 윤중호(시) 강난경(소설) 전의홍(시조) 전태익(시조) 김혁(소설) 최정란(시조) 채길순(소설) 이용주(시) 박권하(소설) 나성호(수필) 김순지(방송극)가, 그리고 90년대에는 정경순(시) 한만수(시.소설) 박천호(시) 민영이(소설) 김인자(시) 이충웅(시)김명동(시) 김장규(시조) 정바름(시) 이명건(소설) 이미경(소설) 박정자(시) 박화배(시) 송문정(시) 임근수(시) 정삼일(시) 양선규(시) 정주일(시) 우명환(시조) 나성연(시조) 등 문인들이 대거 나타났고, 2000년대 들어서 박용하(시조) 한교희(시) 등이 한국문단에 이름을 올렸다. 줄잡아도 50명이 넘는다. 이들이 영동 출생이거나 현재 영동에 살고 있는 문인들이니 어찌 영동을 ‘문향’이라 이르지 않겠는가.



앞서 열거한 문인 중 60년대에 문단에 나온 장지성(張芝城. 본명 장충섭.78.영동군 양강면 죽촌산막길26-22)시조시인을 눈여겨 보아야한다. 해방동이인 그는 영동중‧고와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를 나와 젊은 시절부터 이제껏 선친이 물려준 사과과수원을 경영하고 있다. 겉모습이 건장하고 말투가 투박하여 언뜻 시조시인이라는 생각이 미치지 않지만, 그는 고교생시절부터 충청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고 대학 졸업을 전후하여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시가 가작 입상하고 공보부가 주최한 6회 신인예술상 문학부문에 단편소설 ‘구약신서’가 특상 수상된다. 그리고 1969년 드디어 <시조문학>에 3회 추천이 완료되면서 주목받는 시조시인이 된다. 시-소설-시조를 섭렵한 그를 문우들은 ‘문학 깡패’라 했다. 그는 60년대 말 약관의 나이에 문단에 나온 지 13년이 지나서야 첫 시조집 <풍설기>1982년 뒷목출판사를 펴내고, 이어 시조집 <겨울평전>1991년 민족과문학사, 시집 <제목을 팽개쳐 버린 시>2003년 푸른사상사, 시조집 <꽃 진 자리>2010년 고요아침, 시조집 <외딴 과수원>2017년 시와에세이 을 출간했다. 그러는 사이 그는 정운(이영도)문학상, 충북문학상, 월하(이태극)시조문학상, 시조시학상 등을 수상하고, 중앙일보 시조백일장 심사위원, <월간문학> ‘이달의 시조’월간평 집필, 계간 <시조문학>심사위원 등을 맡아 좋은 작품과 시조시인을 찾는 일을 맡아 왔다. 우리 시조시단을 이끌어 온 이태극‧정완영‧이은방 시인 등이 아끼고 자랑하던 ‘영동 과수원지기 시인’ 장지성 시인이 한국문단에 나타난 지도 어언 60년이 훌쩍 넘었다. 만해마을 입구 시벽詩壁에 세계와 국내의 저명한 시인들과 함께 ‘아지랑이’정운문학상수상작품가 동판으로 새겨진 영예를 누리는 그의 역량은 좋은 시조작품을 쓰는 일에만 매달리는 ‘글쟁이’에 국한되지 않는다. 고향을 지키는 파수꾼으로, 고향 문인들의 대들보로, 고향의 문인들을 빛나게 하는 일에 팔 걷고 나서는 시인으로 그의 존재가치는 확연히 드러난다. 1985년 설립된 한국문인협회 영동지부의 초대회장이 되고부터 9년간 그는 자신의 사과밭에 쏟는 열정만큼 ‘문향 영동’에 혼신을 다했다. 그 첫 작업이 영동출신 작고문인 시비건립 사업이었다. 그는 1986년 당시 나기정 영동군수의 지원으로 영동군 용산면 출신의 조선초기 문장가이자 집현전 학사였던 괴애乖崖김수온金守溫(1409~1481)선생 시비를 건립했다. 그 후 양산면 송호리 국민관광지 천년 솔밭에 시비동산(후에 ‘문향의 숲’으로 명명)을 조성키로 하고 ‘흑성 권구현 시비’ ‘지오 이영순 시비’ ‘향산 구석봉 시비’를 세우기로 했다. 영동군의 지원과 건립모금운동을 펼친 지 3년 만에 건립기금은 1천200만원을 넘어섰고, 드디어 1993년 12월 4일 영동 출신으로 한국문단을 빛낸 선배문인 세분의 시비 제막식을 갖기에 이르른다. 당시 건립추진위의 사무국장을 맡았던 최정란(66)시조시인은 “그 때의 장지성 회장이나 정환식(지난해 5월 85세로 작고) 영동문화원장을 비롯한 조복휘(작고)‧임갑환‧정종원씨 등 문화원 이사들과 지역문인들 모두가 보여준 합일된 모습은 아직도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 있다”고 회상한다.



한평생을 사과농사를 지으며 묵묵히 고향을 지키고 있는 장 시인은 그러나 남모르는 눈물도 많이 흘렸다. 청소년기부터 부친의 ‘두 집 살림’에 따른 그늘진 가족사가 어쩌면 그를 시인의 길로 이끌었을 지도 모른다. 22년 전2001년엔 살뜰했던 아내(전선구)가 위암으로 떠났다. 덩그런 과수원집에 혼자살고 있는 그를 5분 거리에 살면서 수시로 드나드는 큰아들(장윤석.52.영동군청 근무)부부가 고맙다. 객지에 나가 사는 딸(장지영.49)과 작은아들(장은석.46)도 일손이 달릴 때 달려오지만 수년 째 함께 일하는 7,8명의 도우미들과 과수원 일을 꾸려나간다. 오랜 동안 영동문학단체를 이끌어 온 그에게는 1962년 2월 영동 최초의 문학단체인 ‘피노래’동인 발기인 명단부터 4월의 창립총회와 1964년 동인지 ‘해안림’창간, 1970년 7월 ‘영동문학회’출범과 동인지 ‘반석’출간, 1993년엔 협회지를 ‘영동문학’으로 개칭하고 2022년 고원시비 제막식까지의 영동문단의 역사가 빼곡하게 기록된 자료가 소중하게 보관돼 있다. 지난 2020년 영동군이 기획하고 있는 ‘영동문학관’설립 운영위원이기도 한 그는 이제 80을 눈앞에 둔 원로 시인이지만, 시조시인의 예민한 촉觸은 아직도 세상 돌아가는 이치나 주변 세태의 옳고 그름을 헤아리는 혜안慧眼이 맑고 밝아서 문단 후배들의 어설픈 행태를 그냥 넘기지 않음도 엿보게 한다. 그는 근래 들어 현대시조가 정형을 잃어가는 것에 대한 우려 또한 크다. 일부시인들이 시조의 변화를 내세워 장과 구의 구별을 무너뜨리고 종장만의 자구字句를 겨우 맞춰낸 기형적인 시조를 양산하는 것에 정면으로 맞서 ‘정형을 지키지 않으면 시조가 아니다’라고 외치고 있다. 시조의 형태는 3장 6구 12음보를 지켜야한다는 것이다. 그는 언제나 시조의 형식은 정형시만이 가질 수 있는 독특한 거처요, 가옥이요, 집이라고 주장한다. 스케치식의 기행시나 목적시격인 각종 축시 등은 가급적 발표를 자제하여 예술적 자각을 갖춰야한다고 꼬집는다. 시조가 문학적 향취-예술성을 지니지 못하고 감상과 예찬에 머물면 음풍농월이 되고 만다는 것. 그는 또 펜치나 몽키 등 철공소의 쇠붙이들도 적절한 요소에 접합시키면 참신한 시어가 될 수 있고, 시어발굴과 실험 정신이 있어야 빛나는 시가 될 수 있다고 충고한다. 충북에서 60년대 등단한 유일한 시조시인인 그는 적지 않은 시조시인들 중 가장 웃어른이지만, 시 작업에 관한 열정은 신인에 못지않아 문학-시 이야기만 나오면 아직도 시간 가는 줄을 모른다.



6호 태풍 ‘카눈’이 올라오고 있다는 기상청의 숨 가쁜 예보가 거듭되는 데도 서로가 바쁘다는 이유로 약속시간을 바꿀 수 없어 7일 오후 2시 영동군 양강면 죽촌 ‘장시인네 사과밭’이란 큼직한 안내판을 따라 들어섰다. 영동군청 산림과 공무원이던 선친이 시작한 과수원인데 70년대 장 시인이 물려받아 더 키웠단다. 3,500평에 5년생 1,200주, 15년생 400주, 20년생 500주 모두 2,100주가 심겨져 있다. 그런데 사과가 달린 나무들이 손으로 따기 쉽게 얕고 옆으로 키워진 게 아니고 모두 미루나무처럼 키가 크고 다닥다닥 붙어 있어 걸음을 멈추게 한다.



●이제까지의 사과과수원에 대한 상식과 다르게 식재돼 있습니다.

“요즘엔 대부분의 사과농가에서는 평당 한 주씩 심는 고밀식 재배를 합니다. 묘목은 M9 M26 M106 등이 있는데 고밀식 재배가 가능한 M9로 키 큰 세장방추형 재배로 수확을 올립니다. 이 식재방법은 우리나라가 개발한 재배법으로 일본 보다 앞선 기술력이지요.”



●사과 수확까지 얼마나 손길이 가는지요.

“사과 꽃은 4월 중순쯤 개화되고 5월 초순쯤 열매솎기가 시작돼요. 사과를 크게 하려면 꽃봉오리 솎기를 하는데 이를 적뢰摘蕾라 하고, 개화되어 중심화를 남기고 제거하는 작업을 ‘적화’라 하며, 5~6개의 열매 중 중심열매를 한 개 남기고 제거하는 작업을 ‘열매솎기 적과’라 하지요. 이런 열매솎기를 1차 적과라 하는데 열매와 가지의 생육상태에 따라 수확할 때까지 미숙 사과 적과작업은 계속되며 사과 한 알에 필요한 나뭇잎은 5~60개여야 합니다.”



●사과 한 알에 나뭇잎이 몇 개냐 까지를 따져야 합니까?

“전문 기술진들의 끊임없는 연구와 개발의 결과지요. 사과약제치기도 발아 전 기계유제 살포 후 개화 직전과 직후 살포를 시작하여 10일 간격으로 15회 이상 하는데 병충해 관찰 상태에 따라 횟수를 늘려야 합니다. 옛날엔 과수원 김매기 등 제초제를 썼는데 지금은 가뭄과 지열을 방지하기 위해 나무 밑 40㎝ 제초작업만 하고 자연초를 키워 20㎝ 키가 자라면 승용제초기로 수시 제초합니다. 잘린 풀은 퇴비가 되어 사과나무 뿌리에 도움을 주지요. 시대의 변화처럼 과수농사도 꽤나 과학화되었어요. 수익이 높아져 고맙지요.”



●수확 시기는 종류별로 다르겠지요?

“사과 종류는 썸머킹 등 조생종, 홍로 등 중생종, 후지계통의 만생종으로 나뉘는데 모든 사과는 익는 상태에 따라 1~3회 나눠 수확하고 사과크기를 선별하여 ‘콘티’플라스틱 상자에 담아 저온창고에 저장합니다. 저장된 사과는 이듬해 6~7월까지 저장해 택배나 계통출하하지요. 일부 농가는 지역 농협공선회에 위탁해 판매 일체를 위임 후 정산하는데, 나도 무거운 콘티 운반이 두려워 만생종은 농협공선회에 위탁 판매합니다.”



●지원금은?

“농기계부터 비료 퇴비 사과박스 은박지 시설비 등 사과농사에 따른 비용의 20~50%는 정부 지원을 받습니다.”



●사과 생산의 전 과정을 간추리면?

“사과묘목을 심어서 전지 전정작업을 하면서 착근시켜 비료와 퇴비-적뢰-적화-적과-10회 이상-적엽(착생을 위한 잎따주기)-하기전정-10일-사과따기 2~3회-저장-선별작업-위탁이나 택배의 순서를 겪어야 합니다.”



●사과 한 알 한 입 베어 먹기가 예사롭지 않겠습니다. 그런 일 년 농사의 사과 생산과 시조작품 한 편 쓰는 것과 비교하면 어느 쪽이 더 어려운가요?

“시 한 편 쓰기가 훨씬 어렵지요. 오죽하면 독일의 괴테같이 위대한 시인도 ‘시는 쓰는 것이 아니라, 낳는 것’이라 했겠습니까?. 하루 종일, 일 년 삼백예순날을 머릿속에 시조 한 편 쓰려고 고민하고 벼르는 데도 1년에 10편을 넘게 쓰기가 힘들지요. 이제까지 60년 넘게 썼는데도 고작 400여 편 밖에는 쓰지 못했습니다.”



●1969년 시조문학 천료작품인 ‘과수원 마을’<풍설기>부터 ‘가을 과수원’<겨울 평전> ‘겨울 과수원’<외딴 과수원> ‘외딴 과수원’<외딴 과수원> 등 4권의 시집을 뒤져도 과수원에 관한 작품이 생각보다 많지 않더군요.

“풍요 속의 빈곤일까요? 평생을 과수원 속에 있으니 오히려 과수원 밖에 더 관심이 있나봅니다.(웃음)”



●한국시조시단의 웃어른 백수白水정완영鄭##. 1919~2016선생께서 꽤나 아끼신 후배시인이어서 장 시인에게 우정 어린 시 한 수도 선물하셨다지요?

“과분한 애정을 쏟아주셨음에 늘 감복하고 있지요. 고향인 김천으로 거처를 옮기신 직후에 가끔씩 호출하시면 달려가 밤늦게까지 시담詩談을 나누곤 했습니다.

”이암離岩을 불러놓고, 실개천을 흘러놓고/철 따라 꽃이 피는 과수원을 차려놓고/잘 가꾼 세월 한 자락 지성芝城이 난 부럽다…”로 시작되는 시조인데, 돌아가시기 7년 전 어느 날 흰 봉투에 육필로 쓰신 원고를 건네주시더군요. 그 때의 감동을 잊지 못하지요. 지금도 눈을 감으면 선생님 생전의 그 지고至高하신 담소의 내용이며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하고 싶은 일이라면?

“10년만 젊었으면 서재 겸 거실이 큰 집을 지어서 계절마다 친지들을 초대해 술밥을 나누며 허튼소리도 하고 싶은데, 늦은 듯합니다. 내년쯤엔 시조시집을 하나 더 엮으려합니다. 그리고 내 나이 80대에 들어서면 그동안 써온 시와 시조와 소설과 평론 등을 모아 <장지성문학전집>을 만들고자 합니다. 이 과수원은 아직 관리가 잘 돼 있어 앞으로 수년간은 운영에 별 어려움이 없을 것이고요. 이제 모든 것을 정리해야 할 때여서 차근차근 깊이 생각하며 남은 날들을 열심히 살아가려 합니다.”



■ 동양일보 회장·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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