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감성의 근간은 청주서 누나들이 불러주던 솔베이지 송
음악가는 기술이 아니라 무엇을 표현하느냐가 중요
인문학적 지식 없이 진정한 음악가 될 수 없어

[동양일보 박현진 기자]전문 음악가들로부터 ‘국내 최고 지휘자’로 선정된 임헌정 충북도립교향악단 상임감독을 만났다.

그는 1985년~2019년 33년동안 서울대 음대 교수로 재직하며 후학을 양성했다. 코리안 심포니 음악감독으로 유럽투어 중 ‘린츠 브루크너 페스티벌’에 초청받았으며, 한불 수교 130주년 기념 페스티벌 초청 연주 등을 통해 한국 음악의 수준을 전세계에 알렸다. 한국인 최초로 DECCA레이블을 통해 ‘브루크너 교향곡 전곡’을 발매하고 2017년 미국 브루크너 협회의 올해의 음반상(The Society’s Rercording of the Year Award)을 수상했다.

그리고 지난해 3월 충북도립교향악단 5대 예술감독으로 취임한 사람, 그가 바로 임헌정(70) 지휘자다.

늦더위라는 단어가 무색할 만큼 35도의 폭염이 따갑던 지난 29일 낮 1시 청주시 율량동 모 플라자 중식집에서 임 감독을 만났다.

검은색 반팔 티셔츠의 가벼운 차림으로 들어선 임 감독은 활짝 웃으며 “너무 더워 땀이 많이 났어요. 예쁘게 좀 하고 올게요”라며 순식간에 뒷모습을 보이며 사라졌다. 웃음이 새어 나왔다. 초면의 ‘화려한 경력의 거장’을 만나는 데 대한 긴장이 풀리는 듯했다.

임 감독은 “1953년 청주시 사직동 변전소 골목에서 태어났다”며 오래 알고 지내온 친분인 양 스스럼없이 말문을 열었다.

지금은 3형제만 남았지만, 애초 10남매 막내로 태어나 연로하신 부모를 대신해 자연스레 누나들 손에 자랐다고 했다.

올망졸망 단체로 무심천 가서 멱 감던 추억이 유쾌하고, 경부고속도로 진입로 강촌 인근에 종중의 선산이 아직도 있다며 ‘청주 사람’임을 자랑한다. 사범학교 출신 교사였던 누나를 따라 초3 때 청주를 떠났지만, 그래서 청주를 방문할 때마다 초입의 가로수길이 얼른 나타나기를 시외버스 의자 바깥으로 목을 쭉 빼고 설렘을 즐기곤 한단다.

“나를 키운 감성의 근간은 그런 청주에서 누나들이 불러주던 솔베이지 송”이라는 임 감독.

그는 누나의 피아노 치는 모습을 보고 재밌겠다 싶어 따라 했고, 숫기 없는 평범한 꼬마의 남다른 호기심을 집중력으로 파헤쳐 가며 자연스레 음악의 길로 들어섰다.

일찍이 서울대 작곡과 재학 중 작곡 부문 우승자로 유일하게 동아 음악콩쿠르 대상을 수상했고, 스트라빈스키의 ‘병사의 이야기’를 국내 초연했다. 졸업 후 도미, 줄리어드와 매네스 음악원에서 작곡과 지휘를 공부했고, 귀국 후 신생 교향악단인 부천필하모닉을 맡아 국내 최정상의 오케스트라로 성장시켰다. 재임 기간 중, 국내 최초 말러 교향곡 전곡 사이클은 여전히 회자되고 있는 그의 진기록 중 하나다.

하지만 그는 “말러나 브루크너 연주의 특별한 계기는 없다. 그저 있으니까 끝까지 해보자 했던 것”이라면서 “인문학적 지식 없이 음악가가 될 수 없다”고 강조한다. 파우스트를 읽어야 말러도 할 수 있고 창세기를 알아야 서양문화를 알고 서양음악도 할 수 있다는 지론이다.

그러면서 임 감독은 도립교향악단 연습 중, 아무 ‘하자’ 없는데도 뭔가가 부족했던 어느 날을 떠올렸다.

그날 연습을 멈추고 단원들에게 “악보대로만 연주하지 말고, 잠시 가장 소중한 사람이 누군가를 떠올리고 그 사람에게 마음을 얹은 선물을 준다는 기분으로 연주해 보자”고 주문했다. 그리고 다시 시작한 연주는 훌륭했고 단원들도 환상의 하모니가 나온 것에 놀라며 그 성취감을 기억하며 매번 연주에 활용한다고 했다.

‘식품업자가 불량식품 만들면 불법행위로 감옥에 가듯이, 음악가가 불량연주를 들려주면 시민정서파괴행위로 감옥에 가야 한다’고 농담하듯 내던지는 그의 말 속엔 뼈가 있다. 그만큼 음악가는 기술, 기교가 아닌 무엇을 표현해야 하는지가 가장 중요하고 마음을 다한 연주를 해야 한다는 일갈이다.

법 헌(憲) 자, 정사 정(政) 자를 쓰는 자신의 이름처럼 그것이 자신이 만든 음악의 법이라는 임 감독.

그런 그가 일면식도 없었던 김영환 지사와 충북 도민을 만나 하고자 하는 일이 많아졌다.

“예술이 살아야 지역이 살고 국가가 산다”는 그는 “충북은 음악을 사랑했던 세종대왕의 족적이 살아있고 난계 박연과 우륵을 보유한 빼어난 음악의 성지”라며 “SNS를 통해 모든 공유가 가능한 시대, 취임 후 진행한 충주의 호수 음악회나 셀트리온 후원 배론성지 연주회처럼 수준 높은 연주를 하면 교향악단은 저절로 유명해진다”며 올겨울 푸치니 서거 100주년 기념 오페라 갈라콘서트를 충북학생교육문화원 대강당에서 개최할 예정이다. 그러나 임 감독은 “충북도립교향악단이 당초 소외지역 순회공연 목적으로 설립됐다 하더라도 불량 연주해주고 소외지역 배려했다 하면 그것은 위선”이라며 “충북도의 예산 지원과 일선 공무원들의 인식 개선·적극적인 협조가 필요한 일”이라고 역설한다.

“왜 찡그리고 사나? 자네가 즐겁게 살아야 자네의 마음을 담은 연주도 해피바이러스로 전파된다네. 안 그런가?”

농담처럼 건네는 임 감독의 뼈있는 가르침에 세뇌당한 제자들. 그에게서 그들로, 그들에게서 또 그 후대로 이어질 ‘음악으로 행복해지는 세상’이 기대되는 이유다. 박현진 문화전문기자 artcb@dy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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