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꾼은 ‘어떻게’가 아니라 ‘왜’로 표현돼야
나는 이미 청주사람, 무심천 그려내고파
내 정서의 근본은 ‘엄마’ 온전히 춤으로 보답
[동양일보 박현진 기자]“시간의 무게를 좍 끌고 나가는 듯한 느낌으로! 아... 좀 약한데... 좀 더! 조금만 더!! 호흡을 한번에 털지마. 한번에 버리지도 마. 천천히 그러나 절도 있게 생명이 살아 숨쉬듯 온몸에 기가 살아 있어야 해... 그렇지. 그래, 아주 좋아!”
속삭이듯, 낮고 허스키한 목소리가 청주시립무용단 지하 연습실을 제압한다. 그러나 힘 있는. 20분 남짓, 연습을 지켜보며 숨을 멈추고 몰입했다. 감독의 코치를 받는 남자 무용수는 비 오듯 땀을 흘린다. 움직임이 현란한 현대무용이나 댄스를 추는 게 아닌, 흡사 승무나 살풀이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한 절제된 춤사위는 감독의 ‘낮고 힘 있는’ 요구를 온몸으로 받아들이려는 산모(産母) 같다. 남자 무용수에게 산모 같다니..
그랬다. 잠시 지켜본 청주시립무용단 신임 예술감독의 취임공연 연습장은 마치 셰익스피어의 비극 ‘햄릿’의 연출자와 배우를 보는 듯 비장함마저 흘렀다.
‘인물’이 왔구나 싶었다.
가을비가 여름장마처럼 내리치던 21일 오전 청주예술의전당 상임안무자실을 찾아 한번 더 놀랐다. 전날, 비가 들이쳐 눅눅하던 시립무용단 연습실에서의 화장기 없는 진지함과 헐렁한 트레이닝복을 입었을 때와는 완연히 다른 ‘요조숙녀’가 기다리고 있어서였다.
변함없는 면도 있었다. 뭔가 일을 낼 듯한 의지 있는 눈빛과 낮은 목소리. 그가 바로, 1년여의 상임안무자 공백으로 청주 예술계의 이목이 집중되던 청주시립무용단 7대 예술감독이자 상임안무자로 지난 7월 1일자 임용된 홍은주(54)씨다.
홍 감독은 1971년 서울 출생으로, 선화예고와 성균관대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석·박사를 취득했다.
중요무형문화재 27호 승무 이수자이자 무용수로서, 국립극단, 워커힐예술단, 경회루연향 프로제트무용단, 울산시립무용단 등의 안무자로 활동해 왔다. 대통령상, 관객평가 1등상 등 다수의 수상경력과 서울예대 등 다수의 대학에서 후학양성에도 힘써왔다.
청주와는 아무런 연고가 없다.
그저 자신의 연기를 좋아하던 한 팬이 페북에 공연사진과 함께 청주시립무용단 상임감독 공모문을 올리며 “(당시 울산시립 감독) 홍 감독님 같은 분이 청주에 와서 활동하면 참 좋겠다”는 글 한 마디에 무조건 응모했고, 청주에 온 첫날 시내를 가로지르는 하천의 이름이 ‘무심천’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심장이 뛰면서 꼭 임용돼 무대에서 무심천을 그려볼 수 있으면 좋겠다고 간절히 바랐단다.
임용 후 후문으로 ‘어려운 시기, 어떻게 이끌겠는가’라는 면접관의 질문에 “동작으로, 실력으로 소통하겠다”고 대답한 게 후한 점수를 얻었다고 들었단다.
평소 생각이었다고 했다. 홍 감독은 ‘어떻게’ 연기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고 ‘왜’ 하느냐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움직임 하나에도 이유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춤꾼은 호흡이 잘 연결돼야 제대로 된 춤이 나온다며, 가장 쉽게 만드는 것이 가장 어렵다고 했다. 전공하지 않은 관객들이 가장 두렵다고도 했다.
절대 비굴함이 아닌, ‘존중’으로 관객과 동료를 섬기고 실력으로 소통하며 퀄리티를 유지하는 길만이 청주시립무용단만의 품격과 색깔과 명성을 이어나갈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다.
‘밀도 있는 움직임과 정확한 메시지를 온전히 춤으로 표현한다’는 그에 대한 무용계의 평가와도 같은 맥락이다.
홍 감독은 개인사업을 하는 최모(59)씨와의 사이에 사회복지사로서의 길을 당당하게 걷고 있는 1녀를 두고 있다. ‘닮지 않은’ 세 식구가 서로에 대한 ‘배려’가 있어 여기까지 올 수 있었지만 정작 숨은 공로자인 ‘일흔넷 엄마’의 존재를 떠올리며 잠시 눈시울을 붉혔다.
젊어서부터 식당을 운영하며 1남 2녀 중 장녀인 홍 감독의 뒷바라지를 하느라 잠 한숨 맘 편히 못 잤다고 했다. 늦은 시간 일 마무리하고 새벽까지 큰딸의 무용(한)복 다림질을 해준 ‘엄마’는 딸이 결혼하자 손녀 키워주고 사위 뒷바라지하며 아버지까지 먼저 보내고 지금껏 본가(경기도 수지) 큰딸의 집안 살림을 하고 있단다.
급하게 구한 청주의 숙소를 오가면서도 “엄마를 생각하면 게으를 수가 없다”며 “유전학적인 모녀를 넘어서 그분은 내가 무대에서 보여주는 모든 정서의 근본이 되고 있다”고 말하는 홍 감독.
“청주시립무용단의 예술감독이 된 그날 나는 이미 청주사람이 됐다”는 그는 내달 10일 청주예술의전당에서 치러지는 취임공연을 시작으로, 많은 스승들이 해왔듯 한국적 창작품을 기반으로 한 다양한 콜라보 공연을 선보이며 ‘가장 한국적이면서 가장 세계적인 무용단’으로의 도약을 위해 ‘존중’과 ‘섬김’을 소통의 제일장으로 이어나갈 계획이다.
뚝심 있는 전통 춤꾼의 활약이 기대되는 이유다. 글·사진 박현진 문화전문기자 artcb@dynews.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