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일보 유영선 기자]나는 ‘제1의 박영희’
청주첨단문화산업단지 1층엔 문화도시 청주시민 아카이브 - ‘ㄱ의 숲’이 있다.
청주문화예술자원의 기록과 문화현장의 기억, 법정문화도시 청주5년을 기념하는 의미를 공통된 자음 ㄱ(기역)에 함축하고, 청주가 문화와 예술로 풍성한 숲이 되길 기원하는 의미로 ‘ㄱ의 숲’이라 이름지은 곳이다. 푸른 숲을 모티브로 삼아 나무 내음 가득한 이 공간 아카이브관에서는 청주를 빛낸 4명의 예술인을 만날 수 있다. 그 가운데 유일한 여성이자 생존자인 박영희 작곡가가 있다.
박영희, 영희 파안(Younghi Pagh-Paan). 청주 출신으로 독일에서 활동하고 있는 세계적인 작곡가 박영희는 언젠가 인터뷰에서 “나를 제2의 윤이상으로 부르지 말고, 제1의 박영희로 불러달라”고 주문했다. 맞다. 그는 제2의 타인이 아닌 제1의 자신, 박영희다. 그의 가슴 속에는 언제나 당당하고 자존감 높은 제1의 박영희가 살아있다.
‘ㄱ의 숲’ 아카이브관에는 작곡가 박영희의 독일에서의 삶을 엿볼 수 있는 ‘작곡가의 방’ 사진이 있다. 지난해 문화도시 청주의 ‘다음세대를 위한 기록활동 프로젝트’로 KBS방송팀과 청주시문화재단 관계자가 독일 브레멘에 다녀오면서 기록한 자료다. 작곡가의 방에는 쉼 없는 작곡 작업으로 소매와 팔꿈치가 해진 카디건과 작업대와 안경, 그리고 평생 손으로 악보를 그린 흔적의 몽당연필까지 그의 온기가 깃든 물건들이 정겹게 자리 잡고 있다. 파킨슨병과 허리협착증으로 혼자 생활이 어려워진 그는 그 촬영과 기록을 끝으로 집을 정리해서 요양원으로 거주지를 옮겼다.
세 선생님이 음악의 길 안내
박영희는 해방이 되던 해인 1945년 10월 26일(음) 청주시 남문로1가 182번지에서 태어났다. 지금은 가구골목이라고 불리는 옛 약전골목이다. 9형제 중 8번째로 태어나 아버지로부터 귀여움을 많이 받고 자랐다. 어린 그를 안고 노래를 부르거나 가끔씩 통소를 불었던 아버지는 그의 인생에서 음악적인 영감을 준 첫 음악선생님이었다.
두 번째 음악선생님은 깽깽이(해금)를 켜는 거리 악사였다. 어떤 아저씨가 매일 집 앞 길거리에서 하루 종일 해금을 연주했는데, 듣다보면 아름답기도 하고 슬프게도 느껴지면서 오래도록 귀에 남았다. 그의 인생에서 처음 들은 음악이 바로 그 거리 악사의 해금연주였다.
세 번째 선생님은 실제로 음악으로 진로를 정해준 둘째 언니 박영숙이다. 사범학교를 다니던 언니는 아버지가 초등학교 5학년 때 돌아가시자 부모노릇을 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슬픔을 잊게 해주려고 동화책을 사주고 피아노를 가르쳐 주었다. 난생 처음 만져본 피아노는 그에게 새로운 세계였다. 그러나 집에 피아노가 없으니까 두꺼운 종이에 피아노와 똑같은 건반을 그려서 그것을 가지고 다녔다. 그는 종이 건반을 항상 옆에 끼고 다니면서 어디 가서든 시간이 있으면 펴놓고 그 종이건반 위에 손가락을 올려놓았다. 상상의 소리를 들으면서.
실제 피아노가 너무 치고 싶을 땐 깜깜한 새벽 남문로에서 중앙초등학교까지 걸어가서 철제 교문을 타 넘고 강당에 들어가 피아노를 치기도 했었다. 아마도 그가 작곡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어린 시절부터 피아노를 통한 상상의 소리를 익혔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독학으로 작곡공부, 서울대 진학
중앙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청주여중·고를 다녔는데 그 시절은 우울했다. 아버지의 빈자리가 큰 데다, 가정형편상 서울로 고등학교를 진학하지 못한데 대한 쓸쓸함도 있었다. 그는 외로움을 잊고자 혼자서 독학으로 작곡을 시작했다. 라디오에서 듣는 음악을 오선지에 그려서 그의 방식으로 표기하면서 악보를 만들었다. 막상 좋아하는 일이 생겼지만 배울 사람을 찾지 못했다.
고등학교 졸업반이 되자 어머니는 교육대학을 가길 바라셨지만 작곡가가 되고 싶은 마음이 너무 강해 음대를 고집했다. 그때도 둘째 언니가 밀어주었다.
음악선생님에게 음대 원서를 내밀며 사인을 부탁했더니 선생님이 “너는 음악 시간에 입도 한번 안 벌리던 애가 무슨 음악대학을 가냐”고 했다. 음악 선생님이 모를 정도로 내색을 하지 않고 혼자서 작곡 공부를 해왔던 것이다.
막상 서울대 음대로 진학을 했지만 초기엔 진로를 바꿀까 고민을 했다. 그러나 3학년 때부터 본격적으로 공부에 매달렸다. 대학교 졸업을 하자마자 대학원 진학을 했다.
그때 그에게 인생을 바꾸는 계기가 생긴다. 바로 윤이상의 음악을 만난 것이다.
“1971년 시민회관에서 윤이상 선생님의 음악, 예악(禮樂)을 처음 들었어요. 너무나 황홀했어요. 음악이 저를 완전히 흔들었어요.”
윤이상의 음악은 그에게 독일로 유학을 가야 되겠다고 결심을 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마침 독일학술교류재단(DAAD)이 장학생을 뽑는다는 공고가 있었다. 1973년 그는 시험에 붙는다. 독일정부 장학금을 받아 유학을 떠나는 그에게 어머니는 “영희야, 힘들면 언제든 돌아와라. 그러나 엄마 때문에는 돌아오지 마라. 돌아오는 이유를 만들지 마라.”고 하셨다. 어머니의 말은 공부하는 내내 그를 지키는 힘이 되었다.
20년간 프라이부르크에서 작곡공부
그가 간 곳은 독일 프라이부르크시에 있는 프라이부르크 음악대학이었다. 독일에 도착해서 공부를 시작한 뒤로는 이상하게도 우울하지 않고 행복했다. 한국에서 대학을 다닐 때 느꼈던 우울함이나 진로에 대한 불안감이 거짓말처럼 사라져 버려 오직 ‘공부를 하고 싶다, 공부가 재밌다’는 생각으로 공부에만 매달렸다. 하고 싶었던 공부를 맘껏 할 수 있어선지 독일생활이 외롭거나 낯설지도 않았다.
“그렇게 공부에 매달릴 수밖에 없던 것은 독일에서의 공부가 정말 재미있는데, 제가 받은 장학금이 2년짜리였거든요. 2년 만에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으려면 다시 장학금을 받아야 하잖아요. 2년은 금방 지나가버려요. 그래서 2년짜리 장학금을 다시 받고, 또 공부하고, 그게 끝나면 또 다른 장학금을 받으며 공부를 했어요. 1979년부터는 프리랜서 컴퍼니스트로 제가 작품을 써서 작곡료를 받아서 생활을 할 수가 있게 되었어요. ”
그렇게 20년을 프라이부르크에서 살았다.
프라이부르크 음악대학에서는 클라우스 후버 교수에게 작곡을, 브라이언 페르니하우 교수에게 현대음악분석법을, 페터 푀르티히 교수에게 음악이론을 배웠고, 피아노는 에디트 피히트-악센펠트 교수에게 공부했다. 그는 작곡, 전통음악 이론을 전공하며 두 학과의 디플롬을 동시에 받고 졸업했다. 유학 학창시절에 그는 이미 유럽 현대 음악학계로부터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국제콩쿠르 1위 휩쓸며 화려하게 등장
1978년 그는 스위스 보스빌에서 열린 국제 작곡제에 참가한다. 보스빌 국제콩쿠르는 일종의 신인 발굴대회로, 작곡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화려한 등용문 같은 콩쿠르다. 일반 콩쿠르처럼 곡 하나를 발표하는 것이 아니라 참가자들이 먼저 작품을 내면 그중에서 열 명을 뽑아 한 건물에서 일주일간을 지내며 연주를 하고 토론을 하고 세미나를 한다. 그 과정을 평론가와 출판가들이 지켜본다. 그리고 최종 수상자를 뽑는데 박영희는 그 대회에서 1등으로 뽑혔다. 콩쿠르에서 박영희는 제목을 독일어로 붙이지 않고 한국어로 ‘만남’이란 제목을 붙였다. ‘MAN-NAM(클라리넷과 현악 삼중주)’.
그리고 작곡가로서 독일에서 쓸 이름을 박씨 성 대신 파안(Pagh-Paan)이라고 정했다. 독일에서 작곡가로 살며 한국인의 박씨 성 작곡가들이 계속 나온다면 구별이 되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파안은 ‘크게 웃는다’는 의미의 ‘파안대소(破顔大笑)’에서 따왔다. 한국에 왔을 때 우연히 도올 김용옥 씨를 만나 파안의 글씨를 부탁드렸더니, ‘깨질 파(破)’가 좋지 않다고 화선지에 파안(琶案)이라고 써주었다. 비파 파(琶)자에 책상 안(案), 또는 생각할 안(案)자였다. 비파와 책상, 비파를 놓고 생각하라. 그에겐 최고의 이름이었다.
유럽에서 작곡가 첫발이 그렇게 시작됐다. 그 이듬해인 1979년 도나우에싱겐 현대 음악제에 오케스트라곡 작곡을 위촉받았다. 도나우에싱겐 현대 음악제는 2024년 현재 103년이 되는 국제적으로 전통있는 음악제다. 박영희는 그 음악제 역사상 여성작곡가 최초로, 동양인 최초로 오케스트라의 작곡자로 위촉을 받은 것이다. 그는 이 오케스트라에서 광주민주화운동을 생각하며 쓴 ‘소리(SORI)’라는 곡을 올렸다.
젊은 시절엔 내면에 저항의식이 강했다. 반나치 저항조직인 하얀 장미 단원들의 격문과 편지, 최후 변론 등을 읽고는 ‘봉화’라는 곡으로 표현하였고, 1987년에 만해 한용운 스님의 시에 영감을 얻어 ‘님’이라는 곡을 썼다. 그림자를 좇지 않고 ‘님’이라는 실체를 알기 위해서 10년 동안 ‘님’에 대한 곡을 여러 곡 썼다.
최양업 신부의 삶을 쓴 오페라 ‘길 위의 천국’은 ‘님’을 발견하고 만든 곡이다.
“저는 최양업 신부님의 서한문을 읽고 ‘님’을 발견했어요. 자신을 바치는 큰 정신이 저의 ‘님’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최양업 신부 탄생 200주년 기념작 박영희 오페라 ‘길 위의 천국’을 쓰게 된 것이지요. 우리말을 얹을 음악은 판소리에서 가져왔어요. 오페라의 마지막곡을 완성하기까지 브레멘의 집에서 1년이 넘도록 거의 외출도 하지 않고 곡을 썼네요.”
그렇게해서 탄생한 <근대 서양문화의 선구자 최양업 신부 탄생 200주년 기념작 - 박영희 오페라 ‘길 위의 천국’>은 2021년 11월 청주예술의전당에서 세계 초연을 했다. 그리고 서울과 광주 공연으로 이어졌다.
동양인 최초 독일예술원상 수상
그의 이름 앞엔 항상 ‘여성최초’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보스빌 국제콩쿠르, 도나우에싱겐 현대음악제 작곡, 독일어권 음악대학에서 여성 최초 작곡과 정교수, 부총장 등. 그는 유럽에서 여성 음악인으로 길을 내며 걸어왔다.
“유럽에서는 음악대학 정교수가 되는 것이 쉽지 않아요. 독일 스위스 등 독일어권에 음악대학이 25개가 있는데, 교수가 되려면 시험을 봐야 합니다. 1994년 시험을 거쳐 브레멘 국립예술대학교 교수로 선임되자 화제가 됐어요. 유럽에서도 여성을 폄하하는 시각들이 있는데 주임교수를 거쳐 부총장까지 지내고 은퇴를 했으니 첫 여성교수로서 길을 잘 낸 셈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브뤼셀에서 곡을 발표한 뒤 제가 무대에 나와 인사를 하니까, 어떤 분이 ‘여자가 어떻게 이런 곡을 썼어요?’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여자니까 이런 곡을 쓰죠’라고 대답을 했어요. 다행히도 사람들이 제 음악을 들을 땐 음악으로 듣지, 여자가 쓴 곡이라는 선입견을 갖지 않았어요. 저는 그런 데에 신경을 쓰지 않고 곡을 썼어요.”
그는 작곡으로 많은 상을 많았다. 그 가운데서도 2020년 받은 ‘베를린 예술대상’은 수상 소식을 듣고 박영희도 놀랄 정도로 독일에서 가장 전통있고 영예로운 상이다. 베를린 예술대상은 독일 예술원이 선정하는 상으로 음악, 순수미술, 건축, 문학, 공연예술, 영화 등 6개 부문 중 1개 부문에 대해서만 6년 주기로 대상 수상자를 선정한다. 박영희는 동양인 최초이자 여성 최초로 이 상을 받았다.
그의 곡은 매우 다양하다. 사회참여의 곡과, 인간 본연의 그리움, 모성, 한(恨) 등 감수성을 그린 곡, 고향과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명상음악과 영성을 바탕으로 한 종교음악까지.
박영희는 말한다.
“어느 곡이든 제 음악의 본류는 인간의 가치에 대한 소중함, 자유와 소통하고자 하는 것에 변함이 없습니다. 반세기가 넘게 떠나 살아왔지만 제 음악의 뿌리는 한국문화이고, 나를 키운 고향 청주입니다.”
그는 통합청주시의 ‘청주시민의 노래’를 작곡했고, 통합청주시 명예시민 1호를 받았다.
수년전 은사이자 남편이었던 클라우스 후버를 먼저 떠나보내고, 브레멘의 이층집에서 작곡에 몰두하던 박영희 작곡가. 이제는 혼자 생활하기가 버거워 요양원으로 거주지를 옮겼지만, 그는 여전히 단단하고 단정하고 단아한 모습으로 인류를 위한 선율을 창작하고 있다.
박영희, 영희 파안( Younghi Pagh-Paan)은
* 1945년 청주시 상당구 남문로1가 182번지에서 출생
* 청주여고 졸업후 서울대 작곡과와 동 대학원 졸업
* 1974년 독일 프라이부르크음대진학
* 1978년 스위스 보스빌 국제 작곡 콩쿠르 1위
* 1979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유네스코 작곡콩쿠르 1위
* 1979년 도나우엔싱겐 현대음악제 초연(오케스트라 곡 ‘소리’)
* 1991년 오스트리아 그라츠 음악·공연예술 대학교 초빙교수
* 1994~2011년 독일 브레멘 예술대학교 작곡과 주임교수(독일어권 여성 최초)
* 1995년 독일 하이델베르크 여성예술인상 (동양인 최초 수상)
* 2011년 브레멘시 예술 및 학술 공로수상
* 2014년 1호 명예 통합청주시민
* 2016년 제1회 국제 박영희 작곡상 제정(주 독일 한국대사관, 한국문화
원)
* 2018년 독일작곡가협회 FEM-Nadel상
* 2020년 베를린 예술대상(베를린 예술원)
* 2021년 오페라 ‘길 위의 천국’ 세계 초연(청주예술의전당 대공연장)
* 2022년 도나우에싱겐 음악축제 초청, 작품 위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