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정통성을 지키는 대한민국 최고의 비평가
정지용 시인을 전후 최초로 문학사에 부각시킨 연구자
[동양일보 유영선 기자]문학이론서로 팬아
10명 중 6명이 1년에 책 한 권도 읽지 않는 나라에서 문학이론 책이 27쇄를 찍을 정도로 지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면 그 이유가 궁금해진다. 그것도 최신작이 아닌 30년 전에 출판된 책이라면. 바로 유종호의 <시란 무엇인가>(민음사) 얘기다. 이 책을 쓴 저자는 교사나 문인 학생들로부터 심심찮게 팬레터도 받았다. 책을 들고 와 사인을 받아 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 책만이 아니다. 대한민국에서 문학개론서의 정석이라는 <문학이란 무엇인가>(민음사)는 1989년에 출판된 책임에도 5만부가 나갔고, 아직도 글을 쓰고자 하는 사람들이 밑줄을 그으면서 읽는 책이다. 말랑말랑한 에세이도 아니고, 스토리가 있는 소설도 아니고, 그 흔한 자기계발서도 아닌 딱딱한 이론서가 사랑을 받는 것은 그의 글이 사람들의 마음을 잡는 힘이 있기 때문이지만 필요한 것을 교과서처럼 정확히 짚어주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최고의 문학평론가, 최고의 문장가로 공인받는 유종호(柳宗鎬) 문학평론가(그는 평생 불리었던 ‘교수’가 편하다고 했다)를 만나기 위해 서울 목동의 오래된 아파트를 찾아갔다. 아파트는 마로니에가 군데군데 섞인 울창한 나무들 사이에 있었다. 유종호 교수는 38년째 이 아파트에서 살고 있다. 전자도어록도 초인종도 없는 낡은 철제문을 두드리니 노학자가 미소를 지으며 반긴다. 푸근한 충청도 사람의 미소다.
‘충북선’에 담긴 유년기 추억
유종호 교수는 올해 구순이 됐다. 평생 문학 외길을 걸으며 여러 이름을 얻었다.
영문학자, 문학평론가, 이화여대 교수, 연세대 석좌교수, 예술원 회장, 시인, 인문학자, 문학계 천재, 최근엔 원로시인이란 말이 썩 잘 어울린다. 그는 칠십이 되던 해 시집 <서산이 되고 청노새 되어>를 펴낸 뒤 2022년 두 번째 시집 <충북선>을 출간했다. 그리고 이 시집의 표제시로 지난해 정지용문학상을 받았다.
1회 정지용문학상의 심사위원이었던 그가 35회 정지용문학상을 기꺼이 받은 데는 이유가 있다. 중학교 1학년때 정지용 시를 외면서 문학을 접하게 됐고, 1960년대 금기시되던 정지용의 시를 가장 먼저 문학사의 중심으로 부각시키면서 문학평론가로서 입지를 세운 대표적인 ‘정지용 연구자’로서, 만년에 시로 정지용문학상을 받는 것은 자신의 문학과 삶의 일관성에 대한 성과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충북선은 내 마음의/ 자연사 박물관/ 출발의 설레임은 언제나/ 종점의 허망으로 끝나고/ 달려와 사라지는 풍경에 끌리어/ 혼자만의 낮꿈을 즐겼지./ 카이저 수염의 백작인가/ 인단仁丹 광고판이 보이면/ 유치하게 부자가 되고 싶었지 /정하井下, 오근장梧根場, 도안道安, 소이蘇伊/ 이국정서의 낯선 매혹에/ 팔랑개비 나그네로 살고 싶었으나/ 지갑이 얇아서 책장이나 뒤졌지/ 선불 맞은 맹수의 비명/ 증기 기관차의 기적 소리 아니 나고/ 들리느니 이제는/ 점잖은 디젤의 기적일 뿐이나/ 충북선은 여전히 3등 노선/ 내 고독의 자연사 박물관/ 잃어버린 시간의 잔설殘雪이 푸르구나(‘충북선忠北線’)”
지금도 여전히 3등 노선인 충북선, 그에겐 유년기 추억이 충북선과 함께 고향에 그대로 남아있다.
“네 살까지 진천 문백에서 살았어요. 원적지는 진천이죠. 충주는 외가가 있던 곳으로 어머니가 친정에서 나를 낳아서 출생지를 충주로 기록하고 있어요. 아버지 직장 때문에 5세에 증평으로 이사를 했어요. 청주에 큰이모와 작은이모가 살고 충주에 외가가 있어서 충북선 기차를 자주 탔어요. 6살 때 증평국민학교 입학을 했어요. 태평양전쟁이 일어나던 1941년 4월이었지요. 그 전해에 조선어 과목이 폐지되고 일본어를 배웠는데 2,3학년 때 담임이 잊혀지지 않아요. 오기하라 마사에란 가고시마 출신의 18세 여선생이었는데, 어린 학생들에게 ‘상’이라는 존칭을 붙여주고 깍듯이 존댓말을 썼어요. 4학년이 되던 해 충주 남산국민학교로 전학을 갔는데 가쓰라기라는 성을 가진 한국인 남자 담임선생이 하루도 학생들을 구타하지 않는 날이 없어서 공포의 1년을 보내며 학교기피증을 갖게 됐지요. 두 선생을 보면서 일인이라고 해서 무조건적인 악감정을 갖지 않게 되었습니다.”
해방되던 해인 5학년 때는 하루걸러 송탄 채취를 하던 기억 때문에 육체노동에 대해 거부감이 생겼고, 해방 직전 소련군의 청진 상륙과 참전으로 학교 주위에 곡괭이로 참호를 파다가 겨드랑이에 멍울이 생겼던 기억도 선명하다. 그의 기억력은 가히 천재적이다. 언제 어느 때의 이야기도, 연도와 숫자 사람 이름이 정확히 떠올려진다.
10살 때 한글 깨친 후 전쟁 중에도 시집 탐독
광복이 될 때까지 한글을 읽을 줄 몰랐다. <한글 첫걸음>이라는 책으로 10살 때 한글을 깨쳤다. 한글을 알자 책읽는 재미가 생겨서 이원수, 박영종(박목월)의 동요집을 읽었다. 중학교 1학년 때 정지용 시집을 읽고 빠져든 후로 김소월, 청록파, 윤동주, 유치환, 오장환, 이용악의 시집을 탐독했다. 계속해서 시를 읽다 보니 시들이 저절로 외워졌다. 그는 인터뷰 도중 시 이야기가 나오면 대부분 줄줄이 암송을 했다. 자신의 시는 당연히 대부분 암송한다고 했다.
“따라오지 않으련?/ 지나가는 바람이 내 귀에 소곤댄다.//같이 가지 않으련?/ 지나가는 바람이 또 귀에 소곤댄다” ‘지나가는 바람이’라는 시라고 했다.
그가 어릴 때부터 문학에 매료된 것은 집안 어른들의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 그의 큰아버지 유재기는 포석 조명희와 친구로 진천에서 같이 그룹 활동을 했고, 아버지 유촌 유재형은 시인으로 벽암 조중흡과 진천보통학교 동기생이었다. 조벽암은 하드커버의 시집 <향수>에 ‘유재형 학형’이라고 사인을 해주었다.
“아버지 형제분이 같이 청주농업학교를 나오셨어요. 부친은 세상물정은 어두운 좀 답답한 분이셨어요. 우리가 진천 살 때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서 부친은 늘 석유램프를 켜고 책을 보셨어요. 부친이 재산은 물려주지 않으셨지만, 대신 평생 재산인 책 보는 습관을 물려주셨지요.”
충주중 4학년때 6.25 전쟁이 일어났다. 미처 피난 갈 시간도 없이 인민군들이 들이닥쳤다. 충주중 교사이던 부친은 인민군 치하에서 어쩔 수 없이 교사활동을 계속했다는 이유로 부역자로 낙인찍혔다. 그 일로 수복 후 13명의 부역 교사 중 11명이 파직을 당하고, 그의 아버지는 정직을 당했다가 1년 후 복직이 됐다. 그 일은 지금도 그에게 ‘국가권력의 정당성과 정의라는 것’에 대해 근본적인 회의감을 갖게 한다.
1951년 1.4 후퇴 때 그의 가족은 보은을 거쳐 청산 근처까지 피난을 갔다가 청주로 와서 부친의 진인인 탑동 이중복씨 댁에서 신세를 졌다. 이때 유종호는 청주 역전에 있던 세칭 ‘마루보시’라는 운송회사 사무실에 자리 잡은 미 해병대 노동사무소에서 사환 일을 하게 된다. 미군의 보급부대를 따라 충주 달천, 원주 근교까지 이동하면서 많은 걸 배웠다. 서울대 출신의 통역자와 미국 흑인병사가 서로 짜고 보급품을 빼돌리는 것을 보고 ‘모두 별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매사를 삐딱하게 보게 되었다. 그는 청주의 노동사무소에서 사환노릇을 할 때 미군부대에서 받은 돈으로 정음사에서 육이오 직전에 나온 <현대시집 3>을 사서 읽었다. 서정주, 박목월, 조지훈, 박두진 등 4인이 스스로 고른 시편이 수록된 시집이다.
미국 유학 중 클래식에 매료
대학은 서울대 문리대 영문과로 진학했다. 그러나 전쟁 직후의 학교는 기대보다 못했다. 그래도 그가 견딜 수 있었던 것은 문학책에 탐닉할 수 있어서였다. 문학과 예술은 그에게 행복의 약속이었다. 그러나 문학을 하면서 고독했다. 책을 읽고 공명하는 친구를 찾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글을 읽다 보니까 좋은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쓴 것이 평론이었다.
대학을 졸업하던 해인 1957년 월간 <문학예술>에 ‘불모의 도식’, ‘언어의 유곡’으로 등단을 한다. 22살의 새파란 문학평론가였다. 글쓰기 주문이 오고 글을 쓰다 보니 자연스럽게 1세대 문학평론가가 됐다.
대학을 졸업하고 충주사범학교 교사를 거쳐 1962년부터 청주교육대 전임강사로 부임해 청주교대와 청주대에서 강의를 하며 청주에서 4년간을 살았다. 신동문, 민병산 등 문인들과는 충주시절부터 알았지만 그들은 4.19이후 상경해 최정여, 조건상, 홍신희, 이진환씨 등 학자들과 가까이 지냈다. 특히 청주대 최정여 교수의 도움이 컸다. 청주교육대 도서관에는 책이 없었지만, 청주대 도서관에는 모던 라이브러리 등 웬만한 문학책이나 원서를 갖추고 있어서 청주대 도서관을 드나드는 재미가 있었다.
미국유학을 떠난 것은 청주교대를 떠나 공주사대 교수로 있던 1971년이었다. 풀브라이트 장학금을 받아 뉴욕주립대(버팔로) 대학원에서 공부했다. 그는 혼자서 미국에 있는 동안 도서관의 책에 빠졌지만 가끔씩 외로웠다. 그때 그를 위로해준 것이 음악이었다. 음악은 아주 어릴 때부터 좋아했다. 마치 시처럼 한번 곡을 들으면 저절로 외워졌다. 미국에 있는 동안 음반을 많이 샀다.
“제일 좋아하는 음악은 바흐의 무반주소나타예요. 모차르트 피아노협주곡은 27개 중 20번과 23번을 좋아합니다. 베토벤의 현악사중주 16개 중에 15번을 좋아하고, 아 베토벤 첼로소나타 3번도 좋아합니다. 클래식은 다 좋아하지요.”
그가 음악을 좋아한다는 얘기를 들은 기독교방송에서 음악방송 코너를 맡아달라고 부탁해왔지만 여러 이유로 사절했다. 그 코너는 서울대 영문과 후배인 김정환 시인이 맡아 두툼한 책도 냈다. 몇 년전 서울대 영문과 장경렬 교수 덕에 좋은 스피커를 원가에 구입하게 돼 요즘은 매일 음악을 듣는 것이 더 행복해졌다.
늙음의 시 쓰려해...잘 외워지는 시가 좋은 시
유종호 평론가. 문단에서 그는 경직된 교조주의나 유행에 휩쓸리는 일없이 문학의 정통성을 지키는 대표적인 비평가로 평가받는다. 섬세하고 날카로운 언어감각과 균형잡힌 시각으로 작품을 대하면서도 글이 쉽고 핵심을 놓치지 않아 일반인들이 문학의 세계를 이해하고 공부하는데 도움을 준다. 그에게 어떤 시가 좋은 시인지, 주체적 독자란 무엇인지 물었다.
“좋은 시는 잘 외워지는 시예요. 시를 많이 읽다 보면 저절로 외워지는 시가 있어요. 그것은 그 시가 이해되기 때문이지요. 많은 사람들이 주체적인 독자가 되지 못하고 남이 좋다면, 왜 좋은지를 모르면서 따라서 좋다고 합니다. 시를 공부한다는 대학생들에게 물어봤어요. 어떤 시를 좋아하느냐고. 대개 김수영 시를 좋아한다고 말해요. 그러면 좋아하는 구절을 외워봐라, 왜 좋으냐, 물으면 대답을 못해요. 남들이 좋다고 하니까 그냥 좋은 거지, 스스로 좋은 점을 찾은 것이 아니거든요. 우리 문학교육의 실패예요. 교과서에 실렸으니까, 사화집에 실렸으니까, 교사나 비평가의 영향력이 곁들여진 것이죠. 적정한 향수능력과 감식력이 배양됐다면 주체적으로 시를 취사선택할 수 있고, 그에 대해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지요. 그런 독자가 바로 주체적 독자입니다.”
그는 수많은 책을 썼다. 번역서도 많이 펴냈고, 논문도 많이 썼다. 그는 수많은 자신의 책 가운데 <시란 무엇인가>, 외에 <서정적 진실을 찾아서>, <다시 읽는 한국시인>과 회상기 <나의 해방전후>, <그 겨울 그리고 가을>이 마음에 드는 책이라고 했다. 2022년 펴낸 <사라지는 말들-말과 사회사>(현대문학) 역시 오랜 세월 독자들로부터 사랑을 받을 만한 역작이다.
이 책은 지금은 다른 말로 대체되거나 쓰지 않는 우리 말 ‘곤댓짓, 그리마, 말전주, 밥심, 설은살, 송방, 얼레 발, 오진 살, 입찬소리, 출반주, 호습다, 티껍다’ 등 명사, 동사, 형용사 207개를 찾아내 그 말에 얽힌 일화나 예문으로 이해하기 쉽도록 정리한 책으로 사전보다 재미있고, 아는 즐거움이 있다. 그가 이 책을 쓴 것은 평생 우리 말을 아끼고 사랑한 시인이자 학자로서, 사라지거나 사전풀이가 잘못된 말의 배경과 쓰임을 정확히 기록하고자 한 것이다.
이제 구순의 나이가 되면서 그는 욕심이 없다.
평생 좋아하는 일을 하고 살아서 후회도 없고, 문학을 하길 참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시나 좀 쓰려 해요. 눈이 나빠지면서 긴 글 쓰기가 어려워졌어요. 내 시는 늙음에 대한 시예요. 우리나라엔 늙음의 시가 별로 없어요. 왜냐하면 시인들이 모두 일찍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죠. 늙었다고 해야 옛날 사람들은 60이었는데, 지금 내 나이로 보면 젊은 사람들이죠. 늙음의 서러움이 뭔가, 늙음의 어려움이 뭔가, 또 늙을 때 무슨 생각이 나는가 이런 것들을 그냥 기록 삼아서 쓰려고 해요.”
유종호는
*1935년 10월 25일 (양력) 충주에서 출생
*1941년 증평초입학, 충주남산초, 충주중·고
*1957년 서울대학교 문리대 영문과 졸업
*1957년 월간 <문학예술>로 평론 등단
*1959년 제4회 현대문학 신인상 (현대문학사)
*1962~64년 청주교육대학교 전임강사
*1966~75년 공주사범대학교 영어교육과 조교수
*1971~73년 뉴욕주립대(버팔로) 대학원(석사)
*1976년 <세계의 문학>(민음사) 편집위원
*1979~91년 서강대학교 영문과 대학원(박사)
*1977~96년 이화여자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교수
*1989년 캘리포니아대학교 샌디에이고 객원연구원
*1995년 제3회 대산문학상 (대산문화재단)
*1996~2006년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석좌교수
*1998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2000년 동인문학상 심사위원회 종신위원
*2001년 대한민국은관문화훈장
*2002년 제16회 인촌상(문학부분)
*2006년 대한민국예술원상
*2007년 만해학술상
*2013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장
저서: <유종호 전집>(전 5권), <비순수의 선언>, <문학과 현실>, <동시대의 시와 진실>, <사회역사적 상상력>, <문학이란 무엇인가> <시란 무엇인가> <서정적 진실을 찾아서> <다시 읽는 한국 시인 : 임화 오장환 이용악 백석> <시 읽기의 방법> <시와 말과 사회사> <한국근대시사> <문학은 끝났는가? : 반시대적 문학 옹호> <그이름 안티고네> <사라지는 말들-말과 사회사>
시집 : <서산이 되고 청노새 되어> <충북선> 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