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국민의 사랑받은 ‘꽃피는 팔도강산’의 방송극작가

1. 운사나무 표석을 건립하고(왼쪽부터 한운사 3남 한중원, 손녀, 탤런트 노주현, 드라마작가 김수현, 윤혁민, 성우 고은정, 한운사의 제자)
1. 운사나무 표석을 건립하고(왼쪽부터 한운사 3남 한중원, 손녀, 탤런트 노주현, 드라마작가 김수현, 윤혁민, 성우 고은정, 한운사의 제자)

 

[동양일보 유영선 기자]“뿌리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뿌리 없는 나무도 없습니다.

사람과 나무가 하나 되듯이

모두가 하나 되는 구름다리를 놓아 주소서”

-제자작가 윤혁민

 

 

2023년 10월, 충북 괴산군 청안면에 있는 ‘한운사기념관’ 앞에서 한 행사가 열렸다. 이곳 출신 방송극작가인 한운사(1923~2009) 선생을 추모하는 첫 추모제이자, 기념관 앞의 소나무 한 그루를 ‘운사나무’로 명명하고 표석을 세우는 행사였다. 동양일보와 한국방송극작가협회, 괴산군이 공동으로 표석을 세웠다.

김수현 등 한국의 내로라 하는 방송극작가들과 노주현 고은정 등 탤런트와 성우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열린 그 행사에서 방송극작가 윤혁민은 지팡이를 짚은 불편한 몸으로, 직접 쓴 제문(祭文)을 읽고, 강원도의 한운사 선생의 산소에서 퍼온 흙을 소나무 밑에 부으며 눈시울을 적셨다.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앞으로 선생님을 보듯 이 나무 앞에서 선생님을 추모하면 되니까요.”

1. 운사나무 표석
1. 운사나무 표석

 

‘운사나무’의 비문을 직접 쓰고, 표석에 스스로 ‘제자작가’라고 밝혔듯, 그가 방송작가로 활동하게 된 데는 한운사의 영향이 크다. 1959년 KBS신춘연속극 공모에서 한국방송극작가의 대부로 꼽히던 한운사 선생이 그의 작품을 뽑아주면서 방송작가의 길을 걷게 됐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방송 드라마는 충북 출신 극작가가 큰 맥을 이루고 있다. 1세대로 불리는 ‘빨간 마후라’의 한운사(1923년~2009년), ‘청실홍실’의 조남사(1923년~1996년)를 비롯해 윤혁민(1938~)과 김수현(1943년~) 그리고 나연숙 (1944년~2002년) 등이 그 주인공이다.

윤혁민은 TV가 보급되던 시절, 드라마 ‘꽃피는 팔도강산’으로 전 국민을 TV 앞으로 불러들인 한국 드라마계의 산 역사이다. 당시 면 단위에선 TV 있는 집이 몇 집 없을 때라서 드라마가 시작될 시간이면 마을 사람들이 TV 있는 집을 찾아가 함께 볼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국민 드라마’라는 이름을 얻으며 전 국민들의 마음을 쥐락펴락한 윤혁민 작가, 그는 자신의 문학의 뿌리를 풋풋하고 패기 넘쳤던 청주고 재학시절로 기억한다.

 

1. (왼쪽부터) 윤혁민, 애제자 김지수작가, 박영수 수필가
1. (왼쪽부터) 윤혁민, 애제자 김지수작가, 박영수 수필가

 

문학서클 ‘푸른문’ 주도적으로 창립



윤혁민(본명 윤병수)은 1938년 천안에서 교육자 집안의 10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진천중학교를 거쳐 청주고등학교로 진학했는데, 어릴 때부터 글쓰기에 재능이 있던 그는 고등학교에 진학한 뒤 혼자 습작을 하며 문학에 관심을 가졌다.

2학년이 되던 1955년, 윤혁민은 고등학생 신분으로 충청일보 신춘문예에 응모해 소설 ‘진눈깨비’로 학생부 1등, 시 ‘제사’로 일반부 1등을 차지한다.

이 상을 계기로 윤혁민은 청주의 문학도들 사이에서 ‘글 잘 쓰는 학생’으로 이름이 알려졌다. 그러나 윤혁민이 본격적으로 청주의 학생 문학도들과 뭉치게 된 계기는 1956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신동문 시인의 시 ‘풍선기’가 당선되면서였다. 당시 신동문 시인은 결핵치료차 청주도립병원에 입원을 하고 있었는데, 거의 완치가 된 시기라서 청주시내 고등학교 문예부 학생들에게 문예지도를 해주고 있었다. 신동문 시인이 1955년 한국일보와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가작으로 입상한 뒤 이어 1956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자 청주시내 문학도들 사이에 문학에 대한 열망이 생겼다. 이 일을 기폭제로 그해 5월 윤혁민은 청주공고생이었던 박영수 임찬순 등과 함께 주도적으로 고교생 연합동아리 ‘푸른문 문학동호회’를 창립한다. 전국 최초 고교생 연합 문학동호회였다. 이 문학회에서 윤혁민은 회장을 맡고 신동문을 고문으로 모셨다. 그리고 첫 행사로 청주시 대성동 YMCA회관에서 ‘푸른문 창립기념, 시 낭송의 밤’ 행사를 열었다. 청주 최초의 청년 문학행사였다.

신동문의 신춘문예 당선과 푸른문 창립의 자극으로 성인 문학애호가들도 나섰다. 1957년 신동문을 중심으로 문총(충북문화인총연합회)을 창립한데 이어, 1959년 충북문인협회가 결성되면서 청주에 비로소 첫 성인 문학단체가 탄생했다.

 

1. ‘윤혁민드라마기념관’ 발족식
1. ‘윤혁민드라마기념관’ 발족식

 

KBS신춘연속극 공모로 작가 입문



그가 방송극작가의 길로 들어서게 된 것은 1959년 KBS신춘연속극 공모에 ‘내일에의 사랑을’이라는 작품이 당선작 없는 가작으로 뽑히면서부터다. 그는 군대 입대 전 원고를 써서 아내에게 투고를 부탁하고 입영을 했다.

“입영전날까지 겨우 원고를 완성했어요. 마지막에 등장하는 인물표는 쓸 시간이 없어서 아내에게 부탁했지요. 1960년 논산훈련소에서 내 작품이 당선작 없는 입선작 중 한 편으로 선정된 것을 알았어요. 이때의 심사위원 중 한 분이 한운사 선생님이었어요. 훈련병 신분이었던 탓에 시상식엔 아내가 대신 참석했지요.”

그러나 원고는 방송되지 못했다. 소록도를 무대로 펼쳐지는 나환자들의 이야기라서 ‘민감하다’는 방송국 내부의 평 때문이었다. 훗날 이 원고는 ‘소라의 꿈’으로 개작을 해서 방송도 타고,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방송극 쓰기에 자신감이 생긴 그는 군대 병가 중에 ‘날개를 다오’라는 글을 써서 또다시 KBS공모에서 입상을 한다. 덕분에 현역군인으로서 배려를 받아 현충일 특집극 ‘새로운 다짐으로 내일을 보라’를 썼고, 드라마가 방송을 타자 군대내에서 일약 유명스타가 됐다.

이듬해 제대 후 딱히 일자리를 얻지 못해 막노동판을 다니는데, 방송국에서 연락이 왔다. 조흔파 씨의 주간 라디오극 ‘유쾌한 3형제’의 ‘대타 작가’ 부탁이었다. 원고를 써서 넘기곤 집에 라디오가 없어서 자신이 쓴 드라마를 듣기 위해 신촌 로터리 전파상 앞을 서성거리곤 했다.

그렇게 차근차근 글솜씨를 인정받으면서 윤혁민은 KBS 전속작가 겸 객원 PD가 되었다. ‘양지를 찾아서’라는 고정 프로그램을 맡아 매주 녹음기를 둘러멘 채 전국을 누비며 소재를 찾아 극본을 쓰고 편집과 연출까지를 도맡았다. 그 사이에 공익 스파트를 매일 10편씩 썼고, 구민 씨가 출연하는 ‘방송만필’도 써댔다. 그는 그때가 자신의 인생에서 제일 바빴던 때였다고 회상한다.

 

꽃피는팔도강산 드라마 홍보물
꽃피는팔도강산 드라마 홍보물

 

‘꽃피는 팔도강산’ 최장수 방영



한운사 선생을 만난 것은 그 무렵이었다. 그가 담당했던 프로그램 중에 한운사의 ‘남과 북’이 있었다. 한운사 선생으로부터 원고를 받아 읽은 뒤 줄거리를 첨부해 결재를 올리고, 연출계에 넘겨주는 일이 그의 일이었다. 그는 한 선생이 쓴 드라마의 최초 독자가 된다는 것이 너무 행복했다. 그 당시 ‘남과 북’의 인기가 얼마나 대단했던지, 직접 체험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어느 날 조치원에서 청주가는 기차를 탔는데, 갑자기 승객들이 한쪽으로 모이며 웅성거리는 거예요. 무슨 일인가 싶어서 가보니 승객 한 명이 트랜지스터라디오로 ‘남과 북’ 재방송을 틀고 있었는데, 그걸 듣기 위해 승객들이 몰려간 거예요. 말은 안했지만, 내가 그 프로그램 담당자라는 것에 우쭐했지요.”

그는 한운사 선생을 고향 선배이자 스승으로 깍듯이 모셨다. 시인, 소설가, 서예가, 극작가, 대중음악 작사가, 영화 시나리오 각본가 등 만능 예술인이기도 했지만, 대한민국 최고의 드라마 작가로, 한국 드라마의 격을 높여놓았다는 점에서 그를 따르고 존경했다. 한운사 선생 역시 후배들에게 큰 그늘이 되어주었다.

타고난 이야기꾼인 윤혁민은 본격적인 자신의 글을 쓰고 싶어서 5년 만에 KBS를 떠나 전업작가의 길을 시작한다. ‘즐거운 우리 집’, ‘김삿갓 북한방랑기’ 등 여러 작품을 썼다.

1974년, 윤혁민은 가족드라마 ‘꽃피는 팔도강산’을 집필한다. 주제가도 직접 지었다.

“뜰아래 반짝이는 햇살같이/ 창밖에 속삭이는 별빛같이/ 반짝이는 마음들이 모여삽니다/ 오손도손 속삭이며 살아갑니다/ 비바람이 불어도 꽃은 피듯이/ 어려움 속에서도 꿈은 있지요/웃음이 피어나는 꽃동네 새 동네/ 행복이 번져가는 꽃동네 새 동네”

새마을 운동을 벌인 박정희 대통령 시절이었다. KBS는 국민들에게 희망을 주는 그 드라마에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김희갑·황정순·장민호·최은희·박노식·도금봉·황해·김용림·박근형·태현실·문오장·윤소정·오지명·전양자·한혜숙·…등 당대 최고 스타들이 출연하는 드라마는 재미있고 감동적인 이야기로 화제를 몰고 오면서 단숨에 시청률 40%대를 기록했다. ‘꽃피는 팔도강산’은 1년 6개월 동안 397회 최장수 방영으로 한국방송사를 새롭게 쓴 것은 물론 갖가지 ‘최초’도 기록했다.

“드라마가 인기있다 보니 방송사의 투자가 달라졌어요. 드라마 사상 최초로 녹화차가 도입됐지요. 또 대한항공의 파리 취항을 계기로 1975년에는 유럽 현지 녹화도 이뤄져 최초의 해외로케를 하게 됐고요. 포항제철 지원으로 드라마 사상 최초로 일간지에 전면 컬러 광고를 낸 일도 있어요.”

그러나 보이지 않는 고생도 많았다. ENG 카메라가 등장하기 전이라 대부분을 야외 녹화로 진행해야 했고, 전국을 누비며 촬영하다 보니 장비나 인력, 제작비 등도 많이 들었지만 배우들의 피로도 또한 심했다. 그는 자신의 글 때문만이 아니라, 제작진과 출연자들의 노력, 국민들의 관심과 사랑이 최장수 연속 드라마를 만든 것이라고 말한다.



후배작가들과 행복한 ‘몽각산방’



윤혁민은 현재 천안시 동남구 동면 행암리에 거주한다. 1994년 함께 살던 어머니가 76세로 돌아가시자, 아버지를 모신 수남리로 어머니를 모셨다. 수남리는 어머니가 생전에 늘 내려와 살고 싶어 하시던 고향이었다. 그는 어머니의 소원을 생전에 들어드리지 못하고 ‘관머리’를 들고 온 회한으로 집안 조카가 살던 집을 빌어 3년간 시묘살이를 했다. 그리곤 3년이 지나자 아예 터를 잡고 눌러살았다.

현재 살고 있는 집은 부모님 산소에서 6㎞ 떨어진 마을로, 시골집 방을 털어 서재를 꾸미고 숙소를 만들었다. 당호가 ‘몽각산방(夢覺山房)’이다.

“사람들마다 당호의 뜻을 물어봐요. 우리 집 뒷산 이름이 몽각산예요. 몽각, 꿈속에서라도 깨달으라는 말인지, 꿈 깨면 깨달으란 말인지, 느끼는 대로 해석하면 되지요.”

그는 이곳에서 수년 전 지인들을 초대해 ‘생전장례식’과 ‘생전장(生前葬)상여놀이’ 등 드라마 같은 행사를 열어서 화제가 되었다.

“2011년 4월 14일, 고등학교 친구 100여 명과 제자들을 초대해 ‘살아서 치르는 장례식’을 기획해 실현해 봤지요. 내 진짜 장례식은 가족장으로 할 거라서 그땐 부르지 않을 거예요. 동기생 400명 중 100명은 이미 죽었고, 100명은 투병 중이고, 50명 쯤은 외국에 살거나 연락이 닿지 않아 초대한 친구들과 잔치 같은 행사를 했어요. 49재 때는 방송국 지인들을 불러 밤새 노래하고 술 마시며 놀았어요. 죽을 때 후회할 일이 아니라 살아있는 동안 한 번 더 만나는 게 중요하지요. 재미있었고 감동적이었어요.”

80대의 중반이 지나며 건강에 조금씩 이상이 왔다. 몇년전 대장암 수술 후 ‘완치’판정을 받았는데, 2년 전 또 위암이 생겨 수술을 받고 회복중이다.

아내(변정숙·2017년 별세)와 사별하고, 아들(윤경섭. SBS 정년퇴임)과 딸(윤소영.보훈처 서기관)도 떨어져 살아 외로울 법도 하지만, 사람 좋고 품이 넓은 그의 옆엔 늘 사람들의 온기가 넘친다.

‘의가형제’ ‘잊혀진 여자’ 등을 쓴 김지수와 ‘보쌈’을 쓴 박철 등 후배 작가들이 몽각산방으로 내려와 식구처럼 함께 살고 있고, 천안과 병천에 살고 있는 주변 친구들이 가족처럼 그를 보살핀다. 게다가 천안에서 ‘윤혁민드라마기념관’ 건립이 추진되고 있어 기분이 고무되고 있다.

“천안의 몇몇 지인들이 드라마관을 세우자고 했을 때 처음엔 반대하다가 나중에 승낙했어요. 그 이유는 우리나라에서 국제영화제는 많지만 국제드라마제를 개최하는 곳은 서울드라마어워즈 밖에 없어서, 늘 내가 살고 있는 지역에 ‘국제드라마제’를 유치했으면 하는 싶은 꿈이 있었거든요. 지금 세계적으로 K드라마의 영향력이 대단하잖아요.”

기념관이 건립되면 그동안 그가 집필하여 방송된 자료 2000여 건이 정리되고 보관돼 한국 드라마의 연구자료로 활용될 것이다.

“더 바라는 것이 더 있다면 우리 후배작가들의 훌륭한 작품들이 세계속으로 퍼져 인류 문화에 기여하는 참모습을 보고 싶은 것입니다.”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뚝뚝 끊어 말하는 그의 말 속에서 한국드라마에 대한 애정과 진심이 느껴졌다.





△윤혁민은



1938년 충남 천안에서 10남매 중 장남으로 출생

진천중-청주고-서라벌예대 졸

1955년 충청일보 신춘문예 소설 ‘진눈깨비’로 학생부 1등, 시 ‘제사’로 일반부 1등

1956년 고교생 연합동아리 ‘푸른문 문학동호회’를 창립 회장

1959년 KBS신춘연속극 공모 ‘내일에의 사랑을’ 당선작 없는 가작(한운사 심사)

1960년 KBS공모 ‘날개를 다오’로 입상

현충일 특집극 ‘새로운 다짐으로 내일을 보라’집필

1974년 가족드라마 ‘꽃피는 팔도강산’ 집필. 주제가 작사

1975년 국내 방송계 최초 유럽 해외로케

1994년 어머니 시묘살이 3년(천안시 병천)

주성대 문예창작과 예우교수

2011년 친구 100여 명과 제자들을 초대해 ‘살아서 치르는 장례식’

2023년 괴산군 청안면 ‘한운사기념관’에 운사나무 표석건립



한국방송 대상 극본상 수상.

'꽃동네 새동네', '옛날에 이 길은' 등 드라마 200여편 집필.

한국방송대상 극본상

새마을훈장 근면상

한국방송작가협회 이사, 상임이사, 부이사장

현재 천안시 동면 행암길 61-7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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