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세에 ‘국회의장상’… 한국 조각계 새로운 물결의 ‘중심’
[동양일보 유영선 기자]조각가 김경화
누구나 한 번쯤 전원생활을 꿈꾼다. 공기 좋고, 볕 좋고, 전망 좋은 곳에서 사는 일. 그러나 익숙한 도시생활을 접고 물설고 낯선 곳으로 훌훌 떠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조각가 김경화(金敬華. 1946~ )공주대명예교수를 만나러 강화도로 가는 길은 ‘부러움반, 호기심반’이었다. 그는 강화읍 송해면 솔정리, 오래된 소나무 두 그루가 지켜주는 집에 살고 있었다. 소나무는 250년 된 보호수라고 했다. 집의 이름도 ‘여송재(餘松齋)’다.
마당에 놓인 조각작품 위로 뒷산의 참나무 잎들이 시나브로 떨어져 내리고, 볕 좋은 뜰에는 새끼를 친 들고양이 가족 여섯 마리가 아예 둥지를 틀었다. 집 안으로 들어오니, 통창을 낸 베란다로 넓은 강화벌이 한눈에 들어온다. 아 좋다.
그는 2년 전 서울 여의도의 집을 정리해서 김포에 주 거주지를 두고 이곳으로 들어왔다. 이 집을 택한 것은 같은 조각가의 길을 걷는 동생 김윤화(金潤華. 1954~ )한국교원대학교명예교수가 먼저 들어왔다가 추천을 해줘서였다. 김경화 김윤화 두 사람은 각각 국회의장상과 대통령상을 받은 형제 조각가로 미술계에서 이름이 높다.
정진국 선생 만나 미술 시작
김경화 조각가는 1946년 충북 음성에서 5남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 음성에서 자랐고 초등학교 교사였던 아버지를 따라 진천을 거쳐 청주로 이주, 한벌초를 졸업했다. 초등학교 시절 친지로부터 일제 크레용을 선물 받고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는데, 미술을 전공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대성중학교에서 정진국 선생을 만나면서였다. 서울대 미대를 중퇴한 정진국 선생은 까까머리인 그에게 석고 데생 등 기초적인 미술표현을 가르쳐 주었다.
“정진국 선생님의 귀여움을 많이 받았어요. 중3때인가는 단둘이 서울대에서 열린 전국중고실기대회에 간 적도 있었어요. 참 고등학교때 안승각 선생님께도 잠깐 배웠네요. 내가 졸업은 청주고에서 했지만, 입학은 병설고등학교로 해서 그때 안승각 선생님이 계셨어요. 병고는 폐교되면서 청주고와 병합이 되었어요.”
전국의 사범학교가 교육대학으로 바뀌는 과정에 병설고등학교가 설립되었다가 폐교된 시절이 있었다. 청주사범학교 교사였던 안승각 선생은 교육대학이 설립되면서 교육대학 교수가 되었다. 그러고보니 초등학교 시절에도 미술과 관련된 추억이 있다. 사직동 청주여중 옆 언덕에 고아원이 있었는데, 어떤 인연으로 그곳을 드나들었는지 모르지만, 크리스마스 무렵이면 미국의 후원자들에게 보내는 카드를 그려주는 봉사활동을 했었다.
고등학교 시절엔 전국학생미술실기대회 등 그리기 대회에 빠지지 않고 나갔다. 청주에서는 주로 중앙공원이나 청주여고 교정에서 풍경화를 그렸는데, 수상도 여러 번 했다.
정진국 선생 만나 미술 시작
조각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우연이었다.
“고2때까지 학교를 다니고 1년을 쉬었어요. 진로를 고민하면서 서울에 가서 미술학원도 다니고 혼자 이곳저곳을 돌아다녔어요. 그때 서울의 거리에서 조각들이 눈에 띄었어요. 평면 그림만 그리던 내게 입체작품은 무척 새로웠어요. 작품의 뒤까지 볼 수 있다는 것이 흥미로웠지요. 그때부터 조각을 해보고 싶어졌어요.”
도록을 살펴보며 스스로 조각에 대해 눈이 떠진 그는 1965년 홍익대 조소과에 입학한다. 입학을 하고보니 전국에서 모인 학생들의 수준이 비슷비슷했다. 조각을 하고 싶다는 생각들만 했지, 모두 기초가 없어서 경쟁을 할 만 했다.
당시 홍대 조소과에는 김정숙 박종배 전뢰진 최기원 등의 교수가 있었다. 학교에서 이론과 기초는 배우지만, 실제 작업은 도제(徒弟) 교육으로 익히던 시절이었다. 그는 김정숙 교수의 댁에서 기거하며 작업을 돕기도 했다. 김정숙 교수의 남편인 김은우 교수(이화여대. 교육학)로부터 이야기를 듣고 산책도 하면서 영감을 얻기도 했다.
그는 대학 재학시절부터 국전에 도전하여 17, 18, 19, 20회 국전에서 내리 입선을 한다. 작품제작에 자신감이 생겼다. 1969년 대학을 졸업한 후 학교에 남아 조교로 근무하다가 서울시내 중등학교에서 7년간 미술교사로 근무했다. 자나 깨나 조각만 머리에 떠오르던 시절이었다. 그는 재료를 구조적, 구축적으로 조합 분해하며 재조립하는 등 실험적인 작품에 몰두했다. 국전에도 연이어 도전해 21, 22회 대회에서 특선을 했다.
그리고 마침내 1974년 23회 국전에서 조각부문 최고상인 국회의장상을 받았다. 국회의장상 수상으로 조각계에서 ‘스타’처럼 떠올랐지만, 운이 좋아서가 아니라, 치열하게 매달렸던 노력의 결과였다. 그 무렵 그는 철재 중심에서 목재를 복합재료로 활용하면서 끊임없이 변화를 시도하고 있었다. 입상작 ‘의지’는 철과 나무가 절묘하게 조합을 이뤄 심플하고 차가운 철의 맛위에 나뭇결의 따뜻함이 입혀진 작품이다.
“상금을 80만 원 받았어요. 그 돈으로 결혼도 하고, 서울 홍제동에 살림집도 마련했지요. 그런데 큰 상을 받은 것이 독도 되었어요. 독이 된 것은 젊은 나이에 최고상을 받은 것에 대한 부담으로 실험적인 도전이 자유롭지 못했거든요.”
29세에 ‘국회의장’상 수상
그러나 그는 안주하지 않았다. 연이어 국전에서 특선을 차지해서 최연소 국전 추천작가가 됐다. 추천작가는 국전에서 연속 특선 4회 이상 입상을 해야 하는 규정이 있었다. 연속이 아니고 한해라도 거르게 되면 특선을 6회 입상해야 하고, 특선이 아닌 입선일 경우는 연속 입선 12회를 해야 자격이 된다. 추천작가가 된 이후 4년간 작품을 계속 출품하면 초대작가 되고, 다시 4년이 지나면 국전심사위원의 자격을 얻을 수 있다.
그는 차례대로 이 과정을 따라갔다. 추천작가가 되는 것이 쉽지 않다 보니 대학에서 ‘박사’ 학위에 준하는 인정을 해주었다. 그는 이 자격으로 젊은 나이에 경남대학교 교수가 되었다. 34살 때 일이었다. 대학에서 강의를 하면서 홍익대 대학원에 입학해 80년도에 졸업을 했다. 졸업을 한 이후엔 고향과 가까운 공주대학교 미술교육과 교수로 자리를 옮겼다.
“경남대학교에 있을 때 재밌었어요. 아무리 교수라지만 30대 초반에 타지로 가니까 외롭잖아요. 그래서 교수 자리가 날 때마다 고향 사람들을 불러 내렸죠. 한국화 이석구 교수와 변상봉 교수를 차례로 불렀어요. 이석구 교수는 청주상고를 나온 홍익대 선배이고, 변상봉 교수는 고등학교와 홍익대 모두 선배였지요. 그러다 보니 6명의 교수 중에 3명이 청주사람인 거예요. 두 분 모두 훌륭한 작가들이었어요. 후에 이석구 교수는 나처럼 공주대로 오고, 변상봉 교수는 타계할 때까지 마산에 남았어요. ”
작품에 본격적으로 매달릴 수 있게 된 것은 대학원을 졸업하고 공주대 교수로 재직할 때이다. 공주대뿐 아니라 모교인 홍익대에도 강사로 나가면서 조각의 새로운 물결을 익히고 작품에 몰입했다.
80년대 들어 김경화는 과거의 작품에 변화를 주어 조각에 리듬감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철재와 목재, 대리석과 화강석 등 다양한 재료들을 활용하면서 자연물의 생성 등을 찾아내고 물성(物性)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특히 집합체들의 상호 유기적 관계를 중시해 사물이나 생산물 등을 재구성하는 작업을 시도했다.
88올림픽후 새로운 물결의 ‘중심’
1988년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한국 조각계에 새로운 물결이 도입됐다. 기념조형물, 조각공원출범 등 대형조각의 세계가 시작된 것이다. 그동안 실내에서만 머물던 작품들이 외부 광장으로 나오고 대형화되면서, 주제가 있는 작품, 기념물 등으로 조각의 형태가 다양화 되었다. 외부에 설치하는 작품은 조형성뿐 아니라 환경과의 조화도 중요했다.
김경화는 새로운 물결의 중심에 있었다. 그의 손에서 태어난 조형물들이 국내 중요한 공간들에 설치됐다. 1989년 김경화는 프랑스 출신의 세계적인 조각가 아르망과 만나 작업에 대한 철학과 가치관을 나눌 기회를 가졌다. 아르망은 신사실주의(누보레알리즘)를 창립한 작가로 개념적 장르를 파괴했다는 점에서 큰 평가를 받는 작가이다. 공업생산품의 부품과 잡다한 쓰레기들로 집적(集積) 작품을 만들어 대량생산의 소비사회를 비꼬았다. 아르망은 천안 아라리오 광장에 자동차축을 10여 미터 쌓아놓았다.
“아르망과 이야기하면서 생각이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이 사람의 작품에서 소재를 집합하고 재구성하는 나의 모습을 발견했다고나 할까요. 그때 내가 가고 있는 방향이 옳다는 확신을 얻었어요.”
그는 최기원 김영중 교수와 함께 목포조각공원 조성에 참여한다. 목포조각공원은 국내 최초의 대규모 조각공원이었다. 이후 제주조각공원 등 전국에 설치되는 조각공원에 관여하고, 독립기념관 조형물 등을 기획하고 참여했다.
그 무렵 그가 열심히 노력했던 일이 또 한 가지 있다. 문화예술진흥법이 만들어질 때 하종현 한국미협회이사장, 김영중 교수 등과 법률의 초안 작성에 참여한 것이다. 당시 그는 한국미협 수석부이사장이자 한국현대조각회 회장이었다. 그때 만난 인연으로 조경희 한국예총회장(정무2장관 역임)과는 오래도록 각별히 지냈다.
“똑같은 작품의 복제는 몇 개 이상은 안된다든가, 제3의 사람이 유사한 작품으로 모작하면 안된다든가 등의 작가와 작품을 보호하기 위한 저작권을 법조문에 넣느라 애를 썼었지요.”
그 법의 통과를 위해 국회의원을 직접 찾아가고 저작권 문제를 브리핑했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머릿속 지도...전국 곳곳에 작품
이제 80의 고개를 넘으면서 돌아보니 제자교육과 작품 속에 빠져서 살았던 세월이다. 제자로는 임형준, 이경우, 박영환, 김희양 등이 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의 작품은 따로 기록해 놓은 것이 없다. 어느 핸가 집에 화재가 나서 도록이며 그나마 남겨놓았던 기록이 재로 변한 뒤 자신을 위한 기록을 해놓는다는 것이 새삼스러워 그냥 머릿속의 기억으로 살고자 한다.
그의 머릿속에는 전국 곳곳에 있는 그의 작품들이 지도로 그려져 있다. 과천 현대미술관, 광주시립미술관, 부천시청 광장 앞, 금천구청 앞, 충주 탄금대 조각공원, 땅끝마을, 충청남도 개도100주년 웅비탑, 인천광역시 88올림픽기념탑, 서울교육회관 광장, 영등포 앙카라공원, 중국 광저우 IT기념공원 기념탑, 칠갑산노래비, 임하댐준공기념탑, 삼성생명 건축조형물, 청주 무심천유래비 등. 박세리 U.S 오픈 우승기념조형물 등 동상제작도 여럿 했다.
동생 김윤화가 같은 길을 걸어서 한번쯤 ‘형제 전시’를 할 수도 있었겠지만, 서로 바쁘다 보니 그럴 기회를 갖지 못했다. 학교도 직속 후배지만 개성이 강해 서로의 작품에 대해서는 평하지 않는다면서도 “윤화가 어릴 때부터 손재주가 뛰어났어요. 서울대 입시 날엔 시험장에 데려다주고 왔더니 나보다 먼저 집에 와 있잖아요. 시험을 안 본거지요. 그러더니 홍익대 조소과엘 들어갔어요.”라며 학생 때부터 조각에 대해 집념을 가졌던 일화를 전해 준다.
그는 얼마 전 청주고 100주년기념 동문 미술전람회에 작품 2점을 출품했다. “가까운 후배인 김재관 쉐마미술관장이 자신이 소장하고 있는 내 작품 2점을 전시해도 좋겠냐고 연락을 해왔어요. 갑자기 인연의 끈끈함이 소중하게 느껴졌어요. 그게 고향의 힘인 것 같네요.”
이제 그는 바쁜 생활을 접고 큰 소나무 아래 작은 집에서 작품구상을 하며 평화로운 시간을 보낸다. 곧 그의 손에서 평화롭고 따뜻한 작품이 탄생될 것 같다.
김경화는
1946년 충북 음성출생
한벌초-대성중-청주고 졸업
1965년 홍익대 조소과 입학
1968년 국전입선(17회~20회)
1969년 홍익대 조소과 졸업
1979년 국전특선(21회~22회, 24회)
1974년 제23회 국전 조각부 최고상 ‘국회의장’상 수상
1974년 국전 최연소 추천작가(25회~28회)
1978년 국전 초대작가(29회~30회)
1978년 경남대학교 사범대 조교수
1980년 홍익대 대학원 졸업
1980년 공주대학교 사범대 교수
2012년 공주대학교 명예교수
작품
과천 현대미술관, 광주실미술관 등 소장
88올림픽기념탑(인천)
충청남도개도100주년기념 웅비탑 등 다수
대한민국예술인상 ‘대상’수상
한국예총 ‘예술문화상’ 수상
• 서울현대조각공모전 심사위원, 대한민국미술대전 운영위원 심사위원, 동아미술제 심사위원, 홍익조각회 회장, 한국현대조각회 회장, 한국미술협회 부이사장 등 역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