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일보 유영선 기자]피아니스트 신수정
천재(天才)란 선천적으로 보통 사람보다 뛰어난 능력이나 재주를 가지고 태어난 사람을 뜻한다. 어릴 때부터 남다른 두각을 나타내 ‘천재’소리를 듣는 사람들. 그것도 자매가 나란히 천재소리를 듣는다면 당연히 화제가 될 일이다.
대한민국예술원 회장 신수정(申秀貞.1942~) 피아니스트와 동생 신수희(申秀喜.1944~) 화가는 어릴 때부터 신동, 천재로 불렸다. 훗날 신수정이 서울대 음대에 수석 입학하고 4년내내 수석을 하면서 졸업생 전체 중 최고학점으로 대통령상을 받고, 26세의 나이로 서울대 음대 기악과 최연소 교수가 된 일이나, 신수희가 이화여중고 6년 1등에 예비고사 전국 여학생 최고점수로 서울대 미대 수석 입학, 수석 졸업을 한 것은 타고난 재주와 노력이 겸비됐기 때문이다. 두 자매가 외국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은 것도 유명한 일화다. 신수정은 독일정부로부터 일등십자공로훈장을 받았고, 동생 신수희는 프랑스정부로부터 문화분야훈장 ‘기사장’을 받았다. (그의 형제들은 모두가 서울대 동문이며, 막내 남동생도 서울대 수석입학이었다.)
청주에서 예술의 씨앗 싹터
1987년 아버지 신집호 씨가 고희가 되던 해, 이들 수재 집안은 의미있는 행사를 열었다. 교육자이자 서예가인 아버지가 첫개인전(5.21~27 서울 백악미술관)을 열고, 신수정은 인천시립교향악단과 협연(4.9~10)을 했으며, 신수희는 개인전(3.25~4.3 선화랑)을 열었다. 당초는 같은 공간에서 행사를 열려고 했던 것인데, 장소가 여의치 않아서 별도로 했다.
초등학교 글씨 교본 교과서를 집필했던 아버지는 청주중앙공원의 비에도 글씨를 남겼다. 이들의 예술의 씨앗은 본적지인 고향 청주에서 싹이 텄다. 신수정은 평양사범을 나온 아버지와 경성사범을 나온 어머니가 충주에서 근무한 관계로 충주에서 태어나 남들보다 2살이나 어린 6살에 어머니가 근무하던 충주사범부속초등학교에 입학했다. 그리고 아버지의 직장 이동에 따라 옥천을 거쳐 초등학교 3학년 때 청주로 이주했다.
“피아노를 처음 시작한 것은 옥천에서였어요. 학교 창고 같은 곳에 아주 낡은 피아노가 있었어요. 업라이트피아노였는데, 아마 2차 세계대전후 미국이 구호물자로 보낸 것 같아요. 어머니가 사다주신 어린이바이엘로 시작을 했어요. 그런데 저는 컴컴한 곳에 들어가 피아노 치는 것보다 책읽는 것을 더 좋아했어요.”
청주로 이사온 뒤 본격적으로 피아노를 배웠다. 김하경 교수(청주교육대, 청주대사범대학장)에게 배웠는데 당시 청주에서 피아노를 치는 학생은 불과 두셋 정도였다.
“청주사범부속국민학교(현 청주교대 부설초)를 다녔는데, 학교가 멀었어요. 바람부는 들판을 걸어가다가 양지쪽에서 쉬었다 가곤 했지요.”
용두사지 철당간 앞에 있던, 지금은 사라진 ‘청주극장’에서 첫 연주회를 했다. 모차르트 소나타 331장의 마지막 악장인 ‘터키행진곡’이었다. 6학년 언니 이은경과 똑같이 원피스를 입고 머리에 커다란 리본을 달고 연탄을 했는데 공연 중 정전이 되었는데도 멈추지 않고 쳤던 기억이 있다. 그때 들리던 우레같은 박수소리는 아련한 그리움이다.
피난지 부산에서 콩쿠르 참가
그러다가 6.25를 맞는다. 6.25 이틀 전에 막내동생이 태어나서 늦게 피난을 떠났다가 아버지만 떠나고, 가족들은 집으로 돌아와 9.28 수복을 맞았다. 석달동안 인민군 치하에서 지내며 고구마 줄기를 따서 먹고 포탄 소리가 들리면 마루 밑에 숨으며 지냈다. 옆집에 폭탄이 떨어진 것도 보았고, 죽은 사람들의 시체도 보았다.
“전쟁이 제게 준 이익도 있었어요. 음악하시는 분이 피난을 오셨다가 제가 피아노 치는 것을 보곤 ‘얜 재주가 있다’며 대구로 피난 가신 이애내 선생님께 저를 소개하신 거예요.”
이애내(1908∼1996)선생은 한국인 최초로 피아노로 독일 유학을 했으며, 현대식 개념의 독주회를 연 1세대 피아니스트였다. 어머니는 대구의 아는 사람 집에 그를 맡겨놓고 떠났다.
“저는 겁도 많고 부끄럼도 많이 타서 남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성격이에요. 어린 나이에 혼자 떨어지니 집이 그리워서 밤이면 울고 낮에는 선생님 댁에 가서 피아노를 쳤지요.”
전쟁 중이던 1952년 제1회 이화경향콩쿠르가 부산에서 열렸다. 피난 막사의 흙바닥에서 열린 이 대회에서 그는 2등으로 입상했다. 1위는 김덕주, 3위는 한동일, 4위는 이경숙이었다. 10살 때의 일이다.
1956년 1월27일, 모차르트 탄생 200주년이 되던 날, 신수정은 14세(만 13세)의 나이로 서울 풍문여고 강당에서 ‘모차르트 피아노협주곡 20번’을 연주하고, 그해 3월, 이 곡으로 명동 시공관에서 서울시향의 전신인 해군교향악단과의 협연으로 화려하게 데뷔한다. 드레스 입기가 부끄러워서 색동 치마저고리에 교복 바지를 껴입고 운동화 차림으로 연주했다. 무대 공포증으로 떨었던 기억이 선명하다.
이 공연으로 신문에 ‘천재 자매 상경’이라는 기사가 났다. 동생 신수희도 1954년 남대문 옆 자유회관에서 첫 개인전을 연데 이어, 1956년 두 번째 개인전을 동방문화회관에서 열었기 때문이다. 청주 중앙초를 다니던 신수희는 자유회관 전시 전, 청주시 남문로 ‘서울제빵홀’에서도 개인전을 열어 “실로 10세의 아동으로서는 천재라 하지 않을 수 없다”는 지도교사 정창섭(당시 청주여고 교사, 서울대 교수)의 코멘트과 함께 “꼬마화가 신수희 개인전” 기사가 <충북신보>에 보도됐다.
부모님 뒷바라지로 피아노 전념
청주여중을 졸업한 신수정은 서울예고 1회 입학생으로, 신수희는 이화여중에 각각 입학하면서 서울로 유학을 갔고, 6개월 뒤 청주여고 교장이던 아버지가 경기도 장학관으로 발령이 나면서 온가족이 청주를 떠나 서울로 이주했다. 어머니 김석태 여사는 치마 두 개로 살면서 근검 절약해 신수정에게 새 피아노를 사주었다. 야마하 업라이트였다. 신수정이 방에서 피아노를 치는 동안 동생들은 불평없이 시끄러운 피아노 밑에서 시험공부를 했다.
“부모님에 대한 고마움은 뭐라고 말할 수 없어요. 아버지의 재산은 오로지 책이었어요. 우리는 학교 관사에서 살았는데, 책과 옛날 독일 악보가 많았어요. 6.25때 피난을 가면서 청주의 집 다다미를 들어내 그 공간에 책과 악보를 숨겼는데, 그게 다 무사했어요. 어머니는 경성사범을 다니실 때 일본 아이들만 피아노를 가르치고 한국아이들은 풍금을 치게하는 것을 보며 내 아이들은 꼭 피아노를 치게 해줘야겠다고 결심하셨대요. 제 친구들이 피아노를 상상도 할 수 없을 때 어머니는 넉넉지 않은 살림 속에서도 제가 피아노에만 매달릴 수 있도록 뒷바라지 해주셨어요. 저의 오늘은 어머니의 노력이 절반이라고 할 수 있어요.”
올해(2024년) 8월, 103세의 나이로 별세한 그의 어머니는 서울대에 장학금 1억원을 쾌척했으며, 이어령 장관에게 제1회 장한 어머니상을 받았다.
서울예고에서 정진우, 신재덕 선생을 사사한 신수정은 서울대에 수석 입학한다. 그리고 재학중인 1961년 제1회 동아음악콩쿠르에서 피아노 1위로 입상한다. 서울대를 졸업하던 1963년 신수정은 오스트리아 가톨릭부인회의 장학금으로 빈 국립음악예술아카데미로 유학을 떠났다. 항공노선이 없었을 때라서 도쿄에서 하루 자고, 홍콩에서 하루 자고, 사이공, 베이루트를 거쳐서 3일 만에 도착했다. 빈에서는 4년간 수녀원 기숙사에서 살았는데 생활이 궁핍했다. “한 달 생활비 80달러로 살았어요. 옷 한 벌 안 샀고, 안경 플라스틱이 삭아서 부러질 때까지 썼어요. 귀국하고 보니 한국에서 가져간 화장품을 그대로 가져왔더라고요.”
빈에서 디 힐러(Josef Dichler) 교수를 사사하며 1964년 스테파노프콩쿠르에서 입상한 뒤, 이태리 부조니 국제 피아노 콩쿠르, 베토벤 국제 피아노 콩쿠르 등 국제적인 대회에서 실력을 겨뤘다. 스테파노프콩쿠르에서 신수정은 한복을 입고 고무신을 신고 대회에 나갔다. 드레스를 처음 입어본 것은 1967년 2월, 빈 국립 아카데미를 우등으로 졸업하고, 베토벤의 ‘디아벨리 베리에이션’으로 빈(브람스 잘)에서 데뷔 독주회를 열었을 때였다. 유학 온 후배의 드레스를 빌려 입었다.
귀국하면서 신수정은 아버지가 장학관으로 파견돼 있는 일본에 들러 도쿄 이이노홀에서 ‘디아벨리 변주곡’으로 일본 음악계에 데뷔를 한다.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와 그해 12월 시민회관에서 ‘쇼팽 소나타 3번’으로 귀국독주회를 열었다. 그러니까 빈 아카데미를 졸업하면서 빈과 도쿄 서울 등 3곳에서 데뷔 공연을 연 셈이었다.
26세에 최연소 서울대 교수로
귀국 공연을 한 이듬해 서울대 음대 기악과의 최연소 교수가 되었다. 26세 때였다.
“학생들을 가르치고 연주도 하면서 바쁘게 지냈어요. 그때 미국 피바디로 교환교수로 가신 안용구 선생님이 ‘여기 레온 플라이셔라는 교수가 있는데 굉장히 유명해’라고 연락을 해오셨어요. 여름방학 때 쫓아가서 썸머캠프를 했지요. 플레이셔는 슈나벨(Artur Schnabel, 1882~1951. 오스트리아의 피아니스트)계통인데 신선한 충격이었어요. 저는 서울대 재직 5년 만에 풀브라이트 프로그램으로, 토플시험을 보고 피바디대학원으로 유학을 떠났어요.”
캘리포니아에서 머물며 리사이틀도 열고, 백건우, 정명화 정경화 트리오와도 어울렸다. 정명화 형제들과는 어린 시절부터 가까웠다. 그렇게 10년 쯤 머물다가 미국에서 돌아와 경원대학교(현 가천대)로 간다. 그리고 첫 여성학장이 되었다.
그는 유독 1회나 처음과 인연이 많다. 1회 ‘이화경향콩쿠르’ 입상(1952), 1회 서울예고입학, 서울대 수석입학, 수석졸업, 1회 ‘동아콩쿠르’ 1위(1961), 최연소 서울대 기악과 교수, 경원대 음대 첫 여성학장, 서울대 음대 첫 여성학장, 서울대 첫 여성총동창회장, 대한민국예술원 첫 여성회장 등. “남 앞에 서는 것도 싫고, 학교 때 반장 한번 해본 적이 없다”지만 그에게는 끊임없이 리더의 일이 밀려온다.
그동안 런던 필하모닉, 베를린 체임버, 뮌헨 체임버, NHK 교향악단, 뉴 재팬 필하모닉, KBS 교향악단, 서울시향, 피바디 오케스트라 등과 협연했고, 정경화와 첼로의 야노슈 스타커, 바이올린의 루지에로 리치 등 세계 정상급 연주자들과도 연주했다. 또 뮌헨, 베토벤 콩쿠르, 더블린 콩쿠르, 도쿄 국제콩쿠르 등 세계 유수의 콩쿠르에서 심사위원을 맡았다.
무대에 선 지 70년. 국내 음악계에서 전문 연주자 시대를 연 피아니스트로 평가받고 있지만, 권위나 거드름이 없다. 그의 연주는 깔끔하고 견고하면서도 관록이 증명하듯 맑고 편안하다. 특히 고전파 작품의 해석과 연주에 뛰어나다.
모차르트 연주와 특별한 인연
신수정은 모차르트와 인연이 특별하다. 모차르트는 그에게 첫사랑이자 평생의 연인이다. 모차르트 탄생 200주년이던 1956년 모차르트 생일날, 13세의 나이로 모차르트 협주곡 20번으로 데뷔했고, 모차르트 서거 200주기 기념행사에서는 9회에 걸친 ‘피아노협주곡 전곡연주’로 모차르트 연주를 했으며, 또 모차르트 탄생 250주년인 2006년에는 세종문화회관에서 정명훈의 지휘로 서울시향과 모차르트 협주곡 20번을 협연했다. 그리고 매달 모차르트홀에서 모차르트 음악회를 열었다.
‘모차르트홀’은 신수정의 어머니가 서초동에 지은 200석 규모의 아담한 클래식 전용홀이다. 신수정은 이곳서 2004년부터 코로나로 쉬던 해를 빼고는 20년째 연말이면 박흥우 바리톤과 슈베르트의 ‘겨울나그네’ 공연을 한다.
나이가 들면서 많이 베풀려고 한다. 서울예고에 이어, 최근엔 서울대 음대에도 발전기금으로 1억원을 내고, 동아콩쿠르에도 5000만원을 지원했다.
“내 시간은 늘 비슷해요. 일요일엔 성당가고, 가끔 연주하고, 집의 스튜디오에서 피아노 가르치는 일에 집중해요.(조성진이 그의 제자인 것은 유명하다). 오늘은 머리가 하얘져서 염색을 했네요. 집은 방배동 주택에서 동생네와 같이 살아요. 1층은 내가 살면서 지하를 연습실로 쓰고, 수희네는 2층에 살면서 3층을 화실로 쓰지요. 아, 출입문은 각각 달라요. 그런데 내가 82세, 제부가 81세(배순훈 전 정보통신부 장관, 전 국립현대미술관 관장), 동생 수희가 80세로 모두 힘든 나이가 돼서 엘리베이터를 놓았어요. 건강관리? 아무 것도 안해요. 참, 12월30일 겨울나그네 들으러 오실래요?”
안경너머 눈빛이 선한 82세의 현역 연주자, 신수정은 여전히 바쁘다. 인터뷰가 끝나자마자 몇 군데 전화를 하고, 모차르트홀을 관리하는 조카를 불러 당부를 하고는 곧 예술원엘 가봐야 한다면 총총 일어선다. “조심해서 내려가라”며 손을 잡아주는 원로 피아니스트의 손이 따뜻하다. 건반 위를 현란하게 춤추는 손이 아닌 온기가 느껴지는 고향 선배의 손이다.
신수정은
1942년 충주출생
청주사범부속초-청주여중-서울예고
1952년 1회 이화·경향음악콩쿠르 입상
1956년 해군정훈음악대(현 서울시향) 협연
1961년 1회 동아음악콩쿠르 수석입상
1963년 서울대학교 수석졸업
1964년 스테파노프콩쿠르 입상
1967년 빈 국립음악예술아카데미 우등졸업
1968∼81년 서울대음대 교수
1974년 미국 피바디음대 대학원졸업
1989∼2000년 경원대 음대교수, 학장
2000~2007년 서울대 음대교수, 학장
2007년 대관령국제음악제추진위원회 위원장
2009~ 현재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회장
〈수상〉 대한민국예술원상, 국민음악상, 옥관문화훈장, 한국음악상, 독일정부 일등십자공로훈장, 한양백남음악상
<연주> 런던필, Tokyo 심포니, KBS, NHK오케스트라, 홍콩필, 베를린 실내악단, 뮌헨실내악단 등 협연과 서울, 도쿄 빈, 독일, 미국 등에서 독주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