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의 동굴에서 만나는 색의 향연
가족나들이, 데이트코스, 나홀로 사색... 전천후 힐링 공간

▲ 국방색 얼룩무늬 당산 벙커 입구는 노랑 봄옷을 입고 도민을 맞고 있다. 사진 박현진 기자
대성로 충북문화관 쪽 입구의 노랑 조명밭 사이를 사람들이 걸어가고 있다. 인기있는 포토존이기도 하다.
대성로 충북문화관 쪽 입구의 노랑 조명밭 사이를 사람들이 걸어가고 있다. 인기있는 포토존이기도 하다.

[동양일보 박현진 기자] 입춘에 우수, 경칩, 춘분도 지나며 개구리가 깨어나고 낮밤의 길이도 같아진 봄날에 때아닌 눈보라가 휘날리던 주말 오후, 옷깃을 잔뜩 여미고 들어선 동굴에서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가 엮어내는 ‘문 리버’ 선율이 잔뜩 움츠러진 가슴에 온기를 불어넣는다.

순식간에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의 여배우 오드리 헵번이 살아 돌아온 듯 치렁치렁한 소매자락을 휘날리며 얼굴을 반이나 가린 검은 선글라스를 콧등에 얹고 보석상을 스캔하는 모습이 선율 따라 넘실댄다.

 

휴식광장의 방에서 관현악 합주가 펼쳐지고 있다.
휴식광장의 방에서 관현악 합주가 펼쳐지고 있다.
문양 체험존에서 가족 관람객들이 작품을 만들어 보고 있다.
문양 체험존에서 가족 관람객들이 작품을 만들어 보고 있다.
양기용, 심규석 작가의 한글 조형물 체험존에서 자신만의 조형물을 만들고 있는 청소년들.
양기용, 심규석 작가의 한글 조형물 체험존에서 자신만의 조형물을 만들고 있는 청소년들.

연주가 끝나자 울려 퍼지는 박수소리는 공명이 있어선지 더 우렁차다. 거기에 이 방, 저 방에서 들리는 아이들의 청량한 환호성은 어린 시절 추억까지 소환하며 마법 같은 감흥에 빠져들게 한다.

당산 생각의 벙커다.
당산 생각의 벙커는 1973년 충북 도청사 인근 당산의 암반을 깍아 만든 폭 4m, 높이 5.2m, 길이 200m, 전체 면적 2156㎡ 규모의 총 14개의 방으로 조성된 충무시설이다.

지난 50년 동안 전시에는 지휘통제소, 평시에는 충무시설로 사용되던 거대한 공간은 지난해 10월 도민에게 전격 개방되면서 문화향유를 위한 실험적인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지난해 연말 휴식광장의 방에서 열린 어린이 공.이
지난해 연말 휴식광장의 방에서 열린 어린이 공.이
수백 개의 지등이 설치된 꽃등의 방에 사람들이 몰려 있다.
수백 개의 지등이 설치된 꽃등의 방에 사람들이 몰려 있다.

지난해 10~11월 비밀의 공간에서 깨어나기 위한 첫 전시 ‘오래된 미로’에 이어 연말연시에는 8명의 설치미술 작가가 함께하는 2차 행사 ‘동굴 속 화이트크리스마스’ 를 열었다.

부대행사로 충북의 대표 베이커리 9곳이 참여한 빵커축제도 진행하고 설 명절에는 각종 문화공연을 비롯해 윷놀이, 강강수월래 등 새해맞이 전통놀이 행사를 이어가며 공간을 알렸다. 동굴이 개방되고 100여일 동안 3만여명의 관람객이 다녀갔다.

이제 벙커에도 첫봄이 찾아왔다.
지난해 10월 처음 개관했을 때만 해도 국방색 얼룩무늬로 군사시설 냄새가 물씬 풍겼던 입구는 20여일의 임시휴관과 전시기획을 위한 휴지기를 지낸 후 노랑 봄옷을 입고 도민을 맞았다.

지난달 15일 3차 행사 ‘당산 생각의 벙커, 색에 물들다’로 문을 연 회색빛 동굴은 생기 넘치는 컬러로 가득 채워졌다.

 

최성임 작가의 플라스틱 망, 공을 담아 직조한 붉은색 중앙통로 설치 작품 ‘Holes 구멍들’
최성임 작가의 플라스틱 망, 공을 담아 직조한 붉은색 중앙통로 설치 작품 ‘Holes 구멍들’

 

 

 

 

전시는 △‘오늘 기분은 노란색이에요! ’를 주제로 한 노랑의 방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게 되는 파랑의 방 △호기심을 부르는 신비로운 느낌의 빨강의 방 등 8명의 작가가 벙커 내 8개의 방과 출입구, 통로를 변신시켜 관람객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며 오는 6월 3일까지 환상의 세계를 체험하게 한다.

엄마, 아빠가 도로시 엠 윤, 김윤수, 쑨지, 최성임, 노경민, 이규식 작가의 노랑, 빨강, 파랑의 세계를 여행하는 동안 아이들은 한글 체험존과 키즈존에서 자신만의 작품을 만들기도 하고 소리에 반응하는 설치 조형물 앞에서 팔딱팔딱 뛸 때마다 켜지는 네온에 환호성을 지르기도 한다. 즐거워하는 아이들을 보는 것만큼 행복한 일이 또 있을까.

이규식 작가의 붉은 글씨 자서전 설치 작품
이규식 작가의 붉은 글씨 자서전 설치 작품
고정원 작가의 재활용을 활용한, 소리에 반응하는 네온사인 설치 작품 ‘시그널’
고정원 작가의 재활용을 활용한, 소리에 반응하는 네온사인 설치 작품 ‘시그널’
조은필 작가의 파란색 날개 설치 작품 ‘깃털들’
조은필 작가의 파란색 날개 설치 작품 ‘깃털들’

다른 즐거움도 있다. 동굴을 걸으며 중간중간 시선이 닿는 곳마다 ‘이왕 떨어져야 한다면 봄날의 벚꽃처럼 그토록 순수하고 찬란하게’, ‘흰색은 죽음과도 같은 고요가 아니라 가능성을 품은 색이다’(바실리 칸단스키), ‘노란색은 신을 매혹할 수 있는 색이다’(빈센트 반 고흐) 등 잠깐 생각에 잠길 수 있는 글귀들을 만나는 재미 또한 쏠쏠하다.

작품 감상과 함께 월별 각기 다른 테마의 공연은 매주 토요일 오후 1시, 3시 휴식광장의 방에서 펼쳐진다.

주말 특별 프로그램으로 준비된 로봇체험전시존에서 아이들이 태블릿으로 로봇을 움직여 보고 있다.
주말 특별 프로그램으로 준비된 로봇체험전시존에서 아이들이 태블릿으로 로봇을 움직여 보고 있다.

여름엔 시원하고 겨울엔 따듯한 곳, 당산 생각의 벙커는 매주 월요일 휴무일을 제외하고 매일 오전 10시~오후 6시 머리가 복잡할 때 잠시 들러 작품 감상하며 혼자만의 휴식을 취할 수도 있고 아이들과 함께하는 체험으로 가족나들이를 할 수도 있으며 나름한 오후 벗들과의 티타임을 대신하기에도 충분하다.

성안길-도청-충북문화관-청주향교를 잇는 문화의 바다 중심에 자리잡은 벙커가 청주 원도심의 정취와 근대문화유산을 동시에 즐길 수 있는 새로운 문화예술관광의 거점으로 거듭날 날도 머지않았다. 박현진 문화전문기자 artcb@dy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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