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류작가 구순전 대한민국 유일, 100세 전 준비
90세에 90점 작품, 동양일보 초대전으로 관람객에 선봬
내달 수마트라섬 출사 계획, 프로필 사진도 남기고파
[동양일보 박현진 기자] “산부인과 의사 사모님이었던 적 없다. 슬리퍼 신고 빗자루에 쓰레받기 들고 병원 구석구석 청소만 하고 다녀서 나를 사모님으로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직원들 빼고는.
게다가 위급한 환자 있으면 병실에서 밤새 간호도 해가며 전체를 지휘했고 외부 업무도 도맡아 했다. 돈은 많이 벌었는데도 그때가 제일 불행했다. 정말 원하는 건 돈이 아닌데 돈 때문에 병원에 매달려 있으니 속에선 천불이 났다.”
지난 16일부터 청주 문화제조창 3층 한국공예관에서 구순전을 열고 있는 조유성(90) 생태사진작가를 만났다.
90세의 나이에 동남아 곳곳을 누비며 찍은 90점의 작품을 선보이는 조 작가의 이번 전시는 여류작가로서는 대한민국 최초·유일의 구순전이라는 점에서 남다른 의미를 갖는다. 동양일보는 꺾이지 않는 노익장의 열정을 2019년에 이어 두 번째 초대전으로 그 의미를 되새기고 있다. 전시는 30일까지다.
관람객에게 열심히 필사과정을 설명해 주는 노 작가를 보며 그의 젊은 시절 회고담이 떠올랐다.
평범한 듯 평범하지 않은 가정주부로 살던 조 작가의 오랜 세월 쌓인 ‘불’을 식혀준 건 나이 마흔에 시작한 사진이었다. 당시 한국사단의 중견작가인 고 오고의 선생에게 사사하고 1년 만에 굵직굵직한 상은 다 탔지만 정작 혼자서는 무엇을 찍을지조차 몰라 풍경사진부터 시작했다.
닥치는 대로 풍경을 찍다보니 꽃이 보였고 꽃을 찍다보니 곤충이 보였고 그 작은 미물의 생명의 신비에 매료됐다.
조 작가는 “생태사진은 빛을 못 본다고 모두가 말렸는데 고집스럽고 미련하게 달려온 세월이 어느덧 50년이 됐다”며 “다 내 팔자”라고 호탕하게 웃는다.
청주 가경동에서 청주밝은안과를 운영하며 돈 버는 데는 관심 없어 웬만해선 수술을 안한다는 애교쟁이 막내아들(유재인·65) 얘기를 할 때만큼이나 밝은 표정이다. 지난번 개막식 때 윤건영 충북도교육감 등 지역의 기관단체장으로 있는 막둥이 친구들(청주고 52회)이 우르르 몰려왔던 것도 기분 좋은 기억이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그에게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오래전, 언제인지도 모르겠다며 기억조차 하고 싶지 않은 큰아들과의 사별이 떠올랐을까.
그런 어머니의 묵은 불덩이를 사진으로나마 다 풀어버릴 수 있게 뒷바라지하고 있는 둘째 아들 유재빈(67·싱가포르 거주)씨는 조 작가가 현재 10년째 거주하고 있는 인도네시아 수라바야 산골마을의 20여평 작업실 겸 거처를 마련해주고 경비 지원은 물론 오가며 수행을 자처하는 전천후 비서 역할을 하고 있다.
그 아들을 향해 조 작가는 “내가 다른 이에게는 빚진 게 없는데 둘째한테만큼은 처음부터 끝까지 빚 천지”라며 그러면서도 “기왕 빚진 거 100세까지만 하라”고 친구에게 하듯 너스레를 섞는다. 구순전에 이어 100세에 한 번 더 전시를 하고 싶은 노모의 포석이다.
그는 내달 6일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섬으로 다시 카메라를 메고 떠난다. 매일 나방만 찍느라 제대로 된 프로필 사진 한 장이 없어 더 늦기 전에 찍어두려고 다른 카메라맨 2명을 대동한다. 물론 둘째 아들은 늘 그랬듯이 어머니의 뒤를 따른다.
또 이번 출사에서는 자연배경을 살린 곤충 사진도 구상하고 있다. 구순전을 준비하며 수십만장 사진 중에 고르다 보니 우연히도 모두 배경지를 놓고 찍은 사진들만 전시돼 아쉬움이 많다. 다음 전시 때는 수마트라섬의 풍광을 배경으로 자연미가 돋보이는 생태사진을 선보이겠다는 의지다.
그러면서 그는 깨닫는다.
인도네시아에서는 출사 나갔다 들어오면 천장 뚫린 목욕탕에 모기가 달려들고 쥐와 도마뱀이 극성을 부려 무서워 편히 씻을 수가 없다. 그래 시설 좋은 한국에 가면 날마다 목욕하리라 마음먹었는데 웬걸, 열흘이 지나도록 세수도 안하고 퍼져서 뒹굴고 있단다.
모름지기 사람은 적당히 긴장하고 적당히 고생스러워야 한다고 스스로 주문을 건다.
하지만 강단 있어 보이는 그 역시 힘들 때가 있다. 그래서 ‘좀 쉴까?’ 생각하다가도 지레 깜짝 놀라 정신이 번쩍 들곤 한다. 이 나이에 쉰다는 것은 곧 세상과의 작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아직 카메라 들 힘이 남아 있을 때 하고 싶은 일, 할 수 있는 일을 해야겠기에 또다시 마음을 다잡는 조 작가.
구순의 작가가 질곡의 세월을 견디며 또 다시 100세 사진전을 꿈꾸는 것은 자연의 신비, 생명의 경이를 깨달은 혜안 때문이리라. 박현진 문화전문기자 artcb@dynews.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