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병거부운동, 들불처럼 번지다

▲ 학도병 시절의 중산 안동준. 강제로 끌려가 일본군이 됐지만, 안동준은 늘 스스로 조선인임을 잊지 않았다.

◆ 징병제 거부한 전국적 저항운동
여기서 일제의 징병과 이에 대한 거부 운동에 대해 살펴본다.
안동준처럼 일제에 의해 강제로 입대할 수밖에 없었던 이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이에 대항해 징병 자체를 거부했던 이들 또한 많았다.
이른 바 조선에서 전국적으로 일어났던 징병거부운동(徵兵拒否運動)은 일제가 추진한 학도병특별지원병제에 대한 반발에 따른 것이었다. 일제가 조선 청년을 강제동원해 일본군에 투입키로 한 징병제(徵兵制)의 시행에 반대해 일어난 전국적인 저항운동이었는데, 그 연원은 일제가 조선에 징병제를 실시한 1943년 3월 1일자로 개정병역법을 시행한 것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사실 이 징병제가 실시되기 이전부터 일제는 육군지원병·해군지원병·학도지원병 등 ‘지원’이라는 이름 아래 조선 청년들을 병원(兵員)으로 동원하고 있었다.
중일전쟁 이후 태평양전쟁에서 패망할 때까지, 일제가 조선 청년을 군인으로 동원한 과정은 몇 단계로 나뉘어 진행됐다.

◆ 중일전쟁 확전에 ‘황민화정책’
일제는 1937년에 도발한 중일전쟁이 확전되자 조선에 대한 황민화정책(皇民化政策)이 추진되는 상황에서 자질이 우수한 조선 청년들을 병력으로 흡수하고자 했다.
그리고 1938년 2월, 칙령 제95호 ‘조선육군특별지원병령’을 공포했다. 지원병령에 따르면, 만 17세 이상 소학교 졸업 이상의 학력을 가진 자는 육군 특별지원병으로 지원할 수 있도록 했다. 신체검사 합격한 지원자는 조선총독부 육군병지 원자훈련소에서 4개월의 훈련을 받은 다음 현역 입대하거나 제1보충역에 편입됐다.
그러나 말이 지원병일 뿐이었다. 다분히 강제성을 띤 것이었다.
경찰서를 비롯한 각 행정기관과 어용단체, 홍보기관 등이 총동원돼 지원을 강요하고, 또 직장별·지역별 지원경쟁을 부추김으로써, 해당자들은 지원하지 않고 배겨낼 수 없는 상황에 몰리게 만들었던 것이다.

◆ 법문계 재학‧졸업생까지 강제 동원
일제는 1943년 7월 칙령 제108호로 ‘해군특별지원병령’을 공포, 8월부터 시행하면서 다시 해군지원병이 동원됐다. 같은 해 10월에 제1기생 1000명, 1944년 4월에 제2기생 2000명이 진해에 있는 해군병지원자 훈련소에 입소해 6개월의 훈련을 받은 뒤 해병단(海兵團)에 입대했다.
다음 단계로 나타난 것이 이른 바 학도지원병이다. 태평양전쟁에서의 병력 소모가 가속화되자, 일제는 1943년 10월 병역법 일부를 개정했다. 고등·전문학교 이상 재학 중의 법문계(法文系) 학생에 대한 징집유예제도를 폐지했고, 이에 따라 그간 징집유예를 받고 있던 일본의 법문계 학생들이 같은 해 11월 일제히 입대하게 됐다.
육군성령(陸軍省令) 제48호로 ‘쇼와(昭和) 18년도 육군특별지원병 임시채용규칙’을 공포한 것이 그것이다. 병역의무가 없는 조선 학생들에 대해서도 법문계 재학생 또는 졸업생의 병원 동원을 강행했다. 이 조치로 국내외를 통해 4385명의 해당자들이 1944년 1월 20일 일제히 일본군문으로 끌려갔다.
안동준의 경우가 이 케이스에 해당됐다.

◆ 반란과 집단 탈출 모의도
이러한 예비과정을 거치는 한편, 1943년 8월부터 시행한 개정병역법에 의해 전면적 징병제 실시단계로 들어갔다. 이에 따라 1944년 4월 1일부터 8월 20일 사이에 제1회 징병검사가 실시되어 모두 20만6057명이 징병검사를 받았고, 합격자들은 1944년 9월부터 1945년의 일제 패망 때까지 순차적으로 징집됐다. 입대 인원은 최소한 18만4000명 이상인 것으로 추계되고 있다.
일제는 지원병·학도병·징병 등의 동원에 심혈을 기울였지만 결코 그들의 뜻대로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모든 수단을 동원해 계도·권장·강제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기피, 거부하는 저항이 일어났다. 우선 학도지원병의 경우, 적지않은 인원이 지원을 거부, 기피해 응하지 않았다. 그 중에는 산악지대에 은신처를 마련, 동지를 규합해 집단생활을 하면서 무장투쟁을 준비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학도병으로 입대한 경우에도 교육 중 일본군부대에서 반란과 집단탈출을 모의하거나, 일선에서 연합군측으로 탈출해 항일대열에 참가하는 예가 많았다.
김명기 기자 demiankk@dy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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