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우익 이념 충돌했던 해방공간

▲ 경찰이 학병동맹본부 기습하는 와중에 총격에 의해 사망한 학병동맹원 박진동·김성익·이달삼 등 삼학병의 묘.

◆ 가장 혼란했던 ‘해방공간’
해방공간(解放空間)은 1945년 광복 이후부터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 이전까지의 시기를 말한다. 일제로부터 ‘빛을 되찾은 시기(光復)’로 온 국가가 환희의 물결을 뒤덮여 있었을 이 기간은, 그러나 역설적으로 가장 혼란한 시기였다.
온 나라를 휩쓸어버린 이데올르기의 광풍은 정치, 사회적 혼란을 낳았고 분열로 치달았다.
이 시기가 안동준의 인생에 던져놓은 의미는 컸다.
학병동맹사건(學兵同盟事件)을 거치면서 그가 우익 성향을 견지하게 됐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1945년 맞은 광복은 민초들에게 생존의 회복이요, 존엄을 되찾는 축복이었다. 그러나 그 기쁨엔 불안이 내재돼 있었다. 일본이 항복하기 전인 1945년 8월 초, 미국과 소련은 포츠담회담에서 한국을 38선을 기준으로 양분하기로 이미 합의해 놓은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이에 따라 한국은 광복과 동시에 미군과 소련군에 의해 남북으로 분할 점령됐고, 우리는 자주성을 지닌 주체로서의 역할을 상실해 버렸던 것이다. 이른 바 신탁통치에 의해 우리의 국정은 좌표를 잃은 채 흘러갔던 것이다.

◆ 반탁‧친탁으로 좌우익 대립
학병동맹사건 또한 이와 무관하지 않았다.
반탁을 주장했던 우익과 친탁으로 돌아선 좌익간 싸움의 연장선이었다.
전술한 바와 같이 학병동맹은 1945년 8월 15일 해방 직후 일제시기 강제로 징집됐던 학병 출신들이 만든 사설군사단체였다.
초기에는 이념의 구분없이 학병 출신들을 대상으로 조직돼 8.15 직후 경찰서를 접수하거나 치안유지 활동 등을 전개했다. 이들의 목표는 향후 국가 수립 이후 군대창설의 주역이 되겠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학병’이라는 잡지를 발간하며 1945년 12월 자신들의 경험으로 만든 연극 ‘피어린 기록’을 공연해 얻어진 수입금 3만4000원을 전재민 돕기 성금으로 서울신문사에 기탁했따. 또 학병 징집일인 1월 20일을 ‘학병의 날’로 정했다.
그러나 학병동맹이 1945년 10월 중순께 좌익계 청년단체들이 만든 청년단체대표자회(靑年團體代表者會)에 참가하는 등 점차 좌익 성향으로 기울어지자 내부 반발이 일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안동준이었다. 우익 성향의 학병들은 학병동맹에서 이탈해 12월 16일 학병단(學兵團)을 만들었다.

◆ 경찰 총격으로 3명 사망
1945년 12월 27일 동아일보의 보도로 시작된 신탁통치를 둘러싼 논쟁은 사회 각 분야로 확대됐다.
1946년 1월 18일 서울 정동교회에서 반탁전국학생총연맹 주최로 반탁성토대회가 개최된 직후 가두시위가 벌어졌다. 시위 학생들이 미국영사관과 소련영사관 앞에서 반탁 결의를 밝히고, 광화문 네거리를 지나 서대문 쪽으로 접어들었다. 그때 그들은 돌연 좌익 계열 청년들의 습격을 받았고 40여 명의 학생이 다쳤다.
이에 학생시위대는 을지로 입구의 인민보사(人民報社)와 서울시인민위원회 인민당본부 등을 습격한 뒤 학병동맹본부를 습격했다. 학생시위대는 1월 19일 새벽 3시 다시 삼청공원에 있는 학병동맹본부를 습격했으나 학병동맹측의 반격을 받고 후퇴했다.
이때 경찰은 학병동맹에 출동해 학병동맹원 박태윤(朴泰潤)·이창우(李昌雨) 등 2명을 검거했고, 이들을 취조해 다량의 무기가 은닉돼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어 장택상(張澤相) 경기도경찰부장의 직접지휘로 무장경찰대가 출동해 학병동맹 본부를 기습했다. 경찰은 학병동맹원 32명과 국군준비대원 89명을 경기도경찰부로 연행했다. 학병동맹원 32명 중 23명은 1개월 후 석방되고 신요철(申堯徹) 외 9명은 기소됐다. 그리고 이 와중에 학병동맹원 박진동(朴晉東)·김성익(金星翼)·이달삼(李達三) 등 3명이 경찰의 총격에 희생됐다.
김명기 기자 demiankk@dy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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