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으로 내려와 교육사업 시작하다
◆ 용납할 수 없었던 ‘친탁 통치’
학병동맹의 좌익 성향에 대해 안동준이 반발한 것은 나라의 ‘자주성’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일본 유학 시절에도, 일본군으로 징집돼 끌려갔을 때도 늘 일제로부터 자주적 독립국가로서의 조선을 꿈꾸었다. 비록 힘이 없어 조선이 패망했을지언정, 독립을 향한 그 정신만은 살아있어야 한다고 늘 생각했었다.
그런데 어렵사리 광복을 찾은 우리나라가 미군과 소련군에 의해 양분돼 신탁통치를 받는다는 것은 도무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미군정청 군사국으로부터 그에게 12월 5일 개교한 군사영어학교에 입학생을 약간 명 추천해 달라는 연락이 왔고, 그 자신이 이 조직에 몸담을 수 있었음에도 뜻을 두지 않은 건 극심한 좌우 이념대립에 대한 실망감이 있었고, 귀향을 통해 자신을 추스를 시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있었다.
◆ 반년만에 내려오게 된 고향
일본에서 귀국한 지도 벌써 반년이 넘었다.
그 시간이 지나도록 그는 고향에 들르지 못했다. 서울에만 머물렀던 건 해방 조국에 바쳐야 할 자신의 역할이 있을 것이란 믿음 때문이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니 모두 물거품과 같았다. 허망했다.
‘이제 고향으로 가야겠다.’
그날 밤 안동준은 학병단 임시총회를 긴급소집했다. 그리고 부모님 곁으로 가야만 한다며 양해를 구했다. 그의 후임으론 김완룡 부단장을 천거했다.
이틑날 새벽, 그는 고향으로 향했다. 가만히 되돌아보니 참으로 무심했다 싶었다.
그동안 서신으로는 몇 차례 문안을 올렸지만, 일본에서 돌아온 후 한 번도 부모님을 찾아뵙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미 저지른 불효, 그러나 부모님은 그의 뜻을 이미 헤아려주고 있었다.
다행스러운 것은 부모님과 큰어머니 세 분 모두 2년 전 그가 일본으로 학병 나갈 때와 다름없이 건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 고향으로 무사히 돌아온 청년들
옆집 동생 안길준도 고향에 돌아와 있었다.
길준은 그에게 애틋한 동생이었다. 함께 일본 중앙대학을 다녔고, 학병도 같이 나가 같은 부대에 배치됐었다. 그러면서도 만나보지 못했었다.
부대를 ‘탈영’했을 때도 길준에게 한마디 언질조차 못했었다. 탈영이라는 모의가 유출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징병과 징용으로 끌려갔던 이웃 동네 청년들도 대부분 무사히 돌아와 있었다.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었다.
그는 고향을 찾은 뒤 우선 며칠 동안 부지런히 친척과 친지 어른들을 찾아 인사를 다녔다. 모두들 한결같이 반갑게 맞아 주셨다.
그리고 고향이 참으로 좋았던 건, 서울에 광풍처럼 불어닥쳤던 ‘정치바람’이 없었다는 것이었다.
◆ 교육과 제방 석축 두 가지 과업
고향마을엔 그의 눈에 띈 두 가지 과업이 있었다. 교육과 석축 제방이 그것이었다.
광복이 된 조국, 이젠 우리 세상이 됐으니 자식을 가르치는 교육기관을 세워야하지 않겠느냐는 중론이 모아졌다. 목도보통학교가 있었지만 아이들 걸음으론 거리가 멀었고, 또 장마가 지면 등교를 하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담리 옆으로 흐르는 달천도 문제였다.
장마가 지면 으레 마을이 침수되곤 했다. 제방을 쌓아야 한다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 일의 중심엔 안동준이 있었다.
그럼에도 그에겐 시급한 것이 있었다.
그와 그에게 딸린 식솔이 홀로 있는 큰어머니 앞으로 출계(出系)한 까닭이었다. 그의 아내는 생가의 큰며느리이면서 이웃에 홀로 계신 큰어머니까지 모셔야 하는 입장이었다. 아침 저녁으로 두 집을 늘 왔다갔다 하면서 어른들을 살폈다. 하루 이틀도 아닌 것이기에 고달팠다.
그는 여러 궁리 끝에 결론을 냈다. 큰어머니를 자신의 집 바로 옆에 새집을 짓고 모셔오게 됐다.
김명기 기자 demiankk@dynews.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