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사업의 첫 출발 이담국민학교
◆ 귀향 후 이담국민학교 설립
안동준이 군사영어학교 입교가 아닌 귀향을 선택했던 것은 출세보다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시간을 갖겠다는 의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 나라를 위해 일을 하려면 스스로를 먼저 닦아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귀국하고도 반년이 더 지나 돌아온 고향에서 그는 달천(達川)의 범람을 막기 위해 제방을 쌓고 사재를 털어 이담국민학교를 설립하는 등 지역 활동에 열정을 쏟았다.
안동준의 백부에겐 아들이 없었다. 백부가 타계한 뒤 안동준이 입양됐는데, 이담국민학교 설립엔 백부의 유산이 많은 몫을 담당했다.
1948년 2월 착공해 그해 10월 2일 이담공립국민학교로 정식 개교했고, 1950년 4월 1일 이담국민학교로 교명을 변경했다. 1987년 2월 18일 이담초등학교 병설유치원을 인가받았으나 1993년 감물초등학교 이담분교장으로 격하됐다.
그리고 청년 안동준의 피땀이 배어 있던 학교는 세월이 지나 학생 수가 감소하면서 1995년 3월 1일 결국 폐교됐다. 현재 학교 자리에는 개교 20주년을 기념해 세운 ‘중산안동준선생기념비’가 놓여 있다.
◆ 억울한 사연 숨겨진 이담국민학교
그런데 이담국민학교와 관련해선 참 ‘억울한 사연’이 숨겨져 있다.
안동준이 귀향해서 처음 한 일은 아이들 교육이었는데, 이는 그의 사랑방에서부터 시작됐다.
그는 손수 아이들을 모아 교육을 했다.
그의 교육에는 일본 유학과 서울 생활을 통해 얻은, 넓은 세상을 보는 눈이 있었다. 그러다 공부하고자 하는 학생들이 늘어나게 되자 큰 맘 먹고 이담국민학교를 세우게 된 것이었다.
이담국민학교를 세우는 데에는 그가 양자로 들어간 백부의 재산도 일조를 했지만, 대부분 그의 피와 땀과 의지가 컸다. 가난한 시절 입성 먹성은 차치하고서라도, 늘 가난을 대물림하는 아이들에게 교육을 통해 꿈을 키워줘야 한다는 신념이 무엇보다 이담국민학교를 설립하게 만든 원동력이었다.
그렇게 국민학교 인근 이담리와 계담리 학생들은 그 배움의 터에서 세상을 향한 큰 꿈을 키워갔다. 그러나 학생 수의 감소로 결국 1995년 폐교됐던 것이다.
폐교된 교사와 부지는 기부채납(寄附採納)을 통해 국유재산으로 귀속됐다.
기부채납은 국가 또는 지방자치단체가 무상으로 사유재산을 받아들이는 것을 말한다. 기부는 민법상의 증여와 같은 것이며, 채납은 승낙에 해당하므로 기부채납된 재산은 국유재산이 된다. 다소 억울한 면이 없잖았으나 그 당시 관행이 그랬다.
◆ 문화공간 조성의 뜻은 실패로
그런데 정작 문제는 이담리 주민들의 뜻을 수렴해 이 곳을 문화공간으로 조성하고자 하는 데서부터 시작됐다.
1992년 미국에서의 대학교수 생활을 접고 귀국한 중산의 장남 안건일(현 미덕학원 이사장)씨는 동창회에서 1000만원, 자비 1000만원을 부담해 재원을 마련한 뒤, 문화공간 조성을 위한 서류를 만들어 괴산교육청에 제출했다.
그러나 괴산교육청은 이 부지를 농협으로 매매해 버렸다.
더욱이 어이없는 일은 괴산교육청에 건넨 2000만원 조차 돌려받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안건일 이사장은 말한다.
“다소 억울하지만, 다 지나간 일. 예로부터 관하고 싸워 이기는 개인이 있던가요?”
현재 이담국민학교가 있었던 곳엔 불정농협 산지유통센터가 자리잡고 있다.
다만 아이들의 배움의 터, 아이들의 재잘거림과 맑은 웃음소리가 가득했던 곳의 한 켠에 ‘중산안동준선생기념비’가 우두커니 서있을 뿐이다.
◆ 제방 석축에 매진하다
이담리는 달천이 휘돌아가는 지점에 있었다. 그래서 장마가 나면 큰 수해를 입곤 했다.
온 동네가 물바다가 돼 마을 사람들은 발을 동동구르며 피난을 갈 수밖에 없었다.
안동준의 눈에 들어온 건 그것이었다. 고향 사람들의 고통을 줄여줘야겠다고 그는 결심했다.
고향 인근에 조부 소유의 미루나무 숲이 있었다. 그걸 베어 배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1947년, 당시 26세였던 그는 고향을 위한 ‘대사역’을 벌이게 된다.
손수 나서 미루나무를 베어 목재로 만들었고, 그 목재로 직접 배를 건조했다.
배를 만들게 된 것은 석축을 쌓을 때 쓸 돌을 운반하기 위해서였다.
김명기 기자 demiankk@dynews.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