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이담리에서의 악전고투
◆ 귀중한 생명 살린 작은 목선
제방공사에는 돌이 많이 소요될 수밖에 없었다. 특히 물살을 견뎌야 하는 석축 하단엔 큰 돌이 필요했다. 그러나 인근엔 그런 돌이 없었다.
강물을 따라 멀리 올라가 큰돌을 옮기게 됐는데, 여기엔 안동준이 만든 배가 요긴하게 쓰였다.
그런데 그가 미루나무로 만든 배가 급하게 쓰이는 뜻밖의 일이 발생했다.
그의 자형 홍순영씨가 급격한 복통으로 응급환자가 됐던 것이다. 시골이다 보니 가까운 곳에 병원이 있을리 만무하고, 그래서 자형을 그 배에 태워 충주 단월까지 가게 됐던 것이다.
응급실에 도착할 즈음 환자는 거의 실신 상태였고, 이를 본 의사는 “창자가 꼬여 혈액 순환이 되지 않아 생긴 급환이라 몇 분만 늦었어도 큰일날 뻔했다”고 말했다.
작은 목선 하나가 귀중한 생명까지 살린 것이었다.
배는 잉어수 제방을 쌓는 석재 운반에 큰 몫을 했다. 홍수가 나면 큰 수해를 입곤 하던 마을은 튼튼한 제방을 쌓은 덕에 50여년 간 강물의 범람을 막을 수 있었다.
◆ 피와 땀으로 준공한 이담학교
학교를 건축하는 데에도 많은 어려움이 따랐다. 악전고투였다.
때마침 수리조합 무너미 쪽에 있는 산에서 낙엽송을 벌채해 놓은 목재가 있어 그걸 사기로 했다. 목재를 구입한 이후 안동준은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혼자 지게를 지고 나무를 져 날랐다.
다음날 그 모습을 본 동네 사람들이 모두 동참해 힘을 모았다.
당시엔 레미콘도 없었다. 기초를 파고 돌을 채우고 다진 뒤 시멘트를 개서 붓고 그 위에 교실의 기초 틀을 짜서 세웠다. 그 속을 콘크리트로 채운 뒤 가마니로 덮고 며칠 뒤 물을 뿌려며 바깥 공사를 마무리했다.
기둥을 세우고 문틀을 짜고 유리창을 달고 페이트를 칠하며 교실을 완성해 갔다.
주전자, 컵, 쟁반 등속은 물론 분필까지 사야 했다. 그 돈은 그의 호주머니에서 나갔다.
그리고 드디어 준공식. 학부모와 학생들, 면과 군의 관계자들, 도청 학무국 관계관도 참석했다.
가슴이 뭉클했다.
10리길이 넘는 먼 학교를 다녀야 했던 아이들의 고생을 면하게 해준 것이 무엇보다 가장 큰 보람이었다.
◆ 청주중학교 국어교사가 되다
그러던 어느 날 낯선 이가 찾아왔다. 양복 차림의 노신사는 자신을 충주중학교 교장으로 있는 최종인이라 소개했다.
최 교장이 안동준에게 말했다.
“광복을 맞이해 일제가 물러가면서 아이들 가르칠 교사가 부족합니다. 안 선생은 동경에서 대학을 다니던 중 학병으로 갔다 돌아와 고향에서 학교를 세웠다고 들었습니다. 그 마음으로 우리 학교에서 교편을 잡아주셨으면 합니다.”
안동준은 부모님 승낙을 받은 후 찾아뵙겠다고 했다. 부모님은 선뜻 승낙해줬다.
장차 큰 일을 할 아들이 농사일이나 거들면서 시골에 있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1947년 4월 신학기부터 그는 충주중학교 교사로 교단에 서게 됐다. 담당 과목은 국어, 1학년 담임도 맡았다.
향학열에 불타는 어린 학생들의 눈을 바라보며 그는 큰 만족감을 얻었다.
충주서 자취를 하며 매주 고향을 찾아 부모님을 뵈었다. 학교서 이담리까지는 40여리. 그 길 가운데엔 ‘달은터’라는 높은 고개가 있었다.
매주 그 고개를 넘으며 그는 힘들다는 생각 대신 체력이 강해지고 있다며 뿌듯해 했다.
당시 충주중학교는 쟁쟁한 교사들로 꾸려져 있었다.
국어 과목을 맡은 이백하 선생은 한학자였다. 그는 기미년 만세운동 때 류관순 열사의 사촌언니인 류예도와 함께 비밀장소에서 밤새워 태극기를 만들고 독립선언서를 복사하는 등 독립운동을 주도했던 애국지사였다. 청빈하고 고고한 이였다.
류재형 선생도 국어과목을 맡았는데, 류 선생도 청농 재학시절에 만세 사건에 연루됐던 애국지사였고, 시인이었다.
이밖에 훗날 전국 최고의 과학고 교장이 된 수학담당 홍창기 선생, 일본서 대학 영문과를 졸업하고 학병으로 갔다 온 영어과목 최덕영 선생이 있었고, 과학과목 교사로는 단양공고 교장을 영전해 간 한창동 선생과 후일 청주농고 교장을 역임한 백승록 선생이 있었다.
김명기 기자 demiankk@dynews.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