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문학, 삶의 향기… 임벽당의 시는 곧 공간이었다”
서천군 비인면 남당리, 조용하고 깊숙한 골짜기를 따라 들어선 ‘임벽당 정원’은 여름 햇살 아래 적막하다.
드문드문 이어지는 돌담과 마당, 마을 어귀의 고목들. 이곳은 조선 중기의 여성시인 임벽당(1492~1549), 의성 김씨의 삶과 정신이 고스란히 깃든 공간이다.
임벽당 정원 입구에 들어서자 먼저 눈에 띄는 건 500년 된 두 그루의 거대한 은행나무다. 높이 25m, 밑동 둘레 8.4m에 이르는 고목은 세월을 껴안은 채 당당히 서 있다.
둥치에는 수 많은 가지들이 다시 움을 틔우며 ‘세월 속에서도 삶은 계속된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둘레에 세워진 시비군(詩碑群)은 마치 이 은행나무의 무언의 시선과 대화하는 듯하다.
은행나무에서 100여m 생가터에 세워진 시비는 후손들이 제작한 것이라고 했다. ‘임벽당 정원’ 표지판에 그의 시비가 줄지어 서 있다. 현재는 16대 후손 유희춘씨가 귀향해 정원을 돌보고 있어 공원 주변이 정갈했다
임벽당을 발굴 연구해 세상에 알린 문희순 박사는 “임벽당은 시, 문, 서, 자수에 모두 뛰어난 조선의 대표 여류 시인이자 문화예술인으로, 그녀의 삶이 고스란히 배어 있는 이 정원은 단지 유적지가 아닌, 여성 문학사의 상징적 공간”이라고 소개했다.
임벽당은 부여 중정리 출신으로, 18세에 서천 비인현 도화동으로 시집 와 남편 유여주와 함께 은거했다. 당시 유여주는 기묘사화에 연루돼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고, 부부는 이곳에 연못을 파고 소나무와 대나무를 심어 ‘선취정’과 ‘임벽당’을 조성했다. 마을 이름도 배꽃과 복숭아꽃에서 유래해 도화동(桃花洞), 이화동(梨花洞)으로 불렸다.
임벽당이 지금까지 전해지는 시는 단 7수. 그러나 그 시는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여성 문학의 품격과 자존을 대변하는 언어다. 대표작인 '빈녀음(貧女吟)'은 다음과 같다.
으슥하고 외진 곳이라 오가는 이 드물고/ 산은 깊어 세상 일도 아득하다/ 집이 가난해 술 한잔 넉넉지 못하니/ 찾아든 손님도 밤이 되면 돌아가네<전문>
이 시는 단순한 고백이 아니라, 자족의 삶과 인간적 품위를 지키는 한 여성의 사유다. 특히 이 7수는 그녀가 직접 수놓아 베개에 새겼고, 후손들이 200여년간 간직하다가 1683년 <임벽당칠수고>로 엮어낸 것이 알려져 더욱 특별하다.
임벽당 정원은 단순한 추모의 공간을 넘어, 임벽당이라는 인물이 걸었던 삶의 방식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살아있는 문화 공간’이다. 마을 안 청절사(淸節祠)까지 이어지는 길은 그가 살았던 삶의 경로를 더듬게 한다.
임벽당이 남긴 시 정신이 정원 곳곳에 드러나 있는 곳. 그곳에 가면 시간을 거슬러 갈 수 있다. 500년 된 은행나무는 단지 과거를 기억하는 유산이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삶을 가르치고 있다. 은행나무 그늘 아래 서면, 그녀가 남긴 시 한 구절이 떠오른다.
“꽃이 피면 봄을 알고, 잎이 지면 가을인 줄 아네.”
임벽당의 시는 그렇게 지금도, 이 정원에서 다시 피어나고 있다.
서천 도복희 기자 phusys2008@dynews.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