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선 탈락 아픔 딛고 ‘권토중래’
◆ 김창룡, 친일 지우려 반공 선봉에
김창룡이 한 일은 군 내의 공산주의자 색출이었다.
이병주 소령을 비롯한 좌익 장병들을 대거 옭아맸고, 이후 여순 반란 사건을 계기로 숙군 작업이 본격화되고 반공 이데올로기가 맹위를 떨치면서 그에게는 출세의 길이 열리기 시작했다.
그는 또 안두희에게 김구 암살을 지시한 배후로 가장 유력한 인물이기도 하다.
안두희가 김구를 살해한 직후 경교장 주위에 있던 대한민국 육군 헌병들에게 체포돼 끌려갔는데, 바로 김창룡 앞이었다고 한다. 이때 그는 안두희에게 “안 의사, 수고하셨소”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후 안두희를 끊임없이 챙겼는데 감옥에 있을 때 좋은 음식을 대접했고 책 쓰는 것을 도와줬으며 6.25 전쟁이 발발하자 안두희를 형무소에서 빼내 주었다. 그래서 김구 암살의 배후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이승만에게 절대적인 신뢰를 얻은 그는 1951년 5월 15일 육군 특무부대 대장으로 임명됐다. 당시 그의 나이는 불과 30세였다.
이렇듯 엄청난 출세와 이승만의 신임을 얻었지만 어느 정도 조작된 숙군과 학살, 부역자 처벌로 그에 대한 반대 세력은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결국 1956년 1월 30일 아침, 김창룡은 출근하던 도중 골목길에서 허태영 대령, 신초식, 송용고, 이유회 등 특무대 출신 4명의 저격을 받고 암살당했다.
◆ 총선 탈락의 고배를 마시다
안동준은 1957년 5월 미국 국무성 초청으로 미국의 입법제도를 시찰할 기회를 얻게 됐다. 2개월 동안 미국 의회와 입법기관 등을 살펴본 안동준은 일정을 마친 뒤 대서양을 건너 유럽 각국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긴 해외 체류 탓인지 안동준은 귀국 직후 실시된 자유당 의원총회의 국회 국방위원장 후보자 공천 선거에서 단 한 표 차이로 송우범에게 패배했다.
그런데 정작 안동준에게 닥친 더 큰 시련은 그 이후였다.
1958년 4대 총선을 앞두고 자유당 당무회가 안동준의 괴산 지역구를 무공천지구로 결정한 것이었다.
그의 회고에 따르면, 자신이 공천을 받지 못한 이유는 이기붕의 부인인 박마리아가 김원태를 지원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김원태는 고등고시 행정과에 합격하고 내무부 지방국장과 농림부차관, 내무부차관을 지냈는데 그의 아내가 박마리아의 제자였다. 괴산 지역 공천 문제는 사실상 이기붕 부부의 싸움이 된 셈이었는데, 결국 아무도 공천하지 않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하지만 실제 선거에서 경찰은 김원태를 지원했다. 결국 안동준은 7000여 표 차이로 패배했다.
◆ 몰락하게 된 자유당 정권
4대 총선에서 낙선한 후 안동준은 자유당 출신 낙선 의원들과 함께 ‘자유구락부’라는 친목 모임을 결성했다. 그리고 국민회 훈련부장을 거쳐 1959년 3월 대한반공청년단 조직처장에 선출됐다. 대한반공청년단은 1960년 4대 정부통령선거에 대비해 1959년 1월 21일 국민회 청년건설대 등 친여계 청년단체를 통합해 만든 조직이었다. 안동준은 선거를 앞두고 충북 지역에 파견돼 자유당 후보의 선거운동을 벌였다. 하지만 이 선거는 사상 유례가 없는 부정선거였다. 결국 이승만 정권과 자유당은 부정선거에 반발해 일어난 4.19민주항쟁으로 몰락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하와이로 망명했고 이기붕 일가는 자결했다.
1958년 총선에서 공천을 받지 못했지만 안동준과 이기붕의 관계는 매우 친밀했다. 보좌관 시절 안동준은 허약한 이기붕의 약 수발을 들기도 했고, 안동준이 괴산에서 당선되자 역시 괴산 청천면 출신인 이기붕이 어린 시절 유모를 찾아달라고 부탁을 한 일도 있었다고 한다. 4대 총선에서 낙선해 뚝섬에서 과수 농사를 짓고 있을 땐 이기붕이 찾아와 위로를 건네기도 했다. 안동준은 이기붕을 ‘착한 이’로 기억했다. 1960년 4월 28일 이기붕 일가가 자살했을 때 안동준은 사건 현장을 찾았다. 망우리 묘지에서 열리는 이기붕 추도식에도 종종 참석했다.
이승만과 관련해서는 안동준의 아들인 안건일(현 충주미덕학원 이사장)의 에피소드가 있는데, 이승만이 망명 후 하와이 요양원에서 사망했을 때 당시 하와이대학에 재학 중이던 그가 영안실로 가 망자의 신원을 확인하고 장례식에서는 어셔(usher)로 추모객들을 안내했다. 안동준도 아들과 함께 하와이 요양원으로 여러 차례 이승만을 방문했으며 한국에서 거행된 장례식 때는 운구를 맡았다.
물론 이기붕이나 이승만이 잘한 건 아니었다. 그럼에도 정승집 개가 죽으면 문상을 가지만, 정작 정승이 죽으면 문상을 안 간다는 세태는 씁쓸한 것이었다. 염량세태(炎凉世態), 권세가 있을 때는 아첨해 좇고, 권세가 없어지면 푸대접하는 게 세상의 인심이었다.
◆ 5대 총선서 무소속으로 압도적 승리
이후 안동준이 재기의 발판을 마련한 건 1960년 7월 29일 실시된 5대 총선이었다. 안동준은 고향인 괴산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했다. 가장 강력한 경쟁 상대는 민주당의 공천을 받은 김사만이었다. 그런데 개표 과정에서 예기치 않은 사건이 발생했다. 처음 도입된 부재자투표에서 몰표가 나오는 등 안동준의 우세가 뚜렷해지자 30여명이 개표소에 난입해 투표함 일부를 파괴한 것이다. 당시 안동준은 1만2000여 표를 얻어 당선이 확실시되고 있었다.
차점자인 김원태는 4172표에 불과했고 김사만은 3943표였다. 이와 같은 투표함 소각・파괴 사건은 괴산 뿐 아니라 창녕 고성 등 모두 13곳에서 발생했다.
결국 8월 13일 21개 투표구에서 재선거가 실시됐다. 결과는 2만3332표로 유효투표의 47.97%를 얻은 안동준의 승리였다.
김명기 기자 demiankk@dynews.co.kr

